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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몬의 오판 (행 8: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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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오판 (행 8:18-25)


[시몬은 사도들이 손을 얹어서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내고서, 말하기를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 하니,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그대가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소. 그러므로 그대는 이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시오. 그러면 행여나 그대는 그대 마음 속의 나쁜 생각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오. 내가 보니, 그대는 악의가 가득하며, 불의에 얽매여 있소.” 시몬이 대답하였다. “여러분들이 말한 것이 조금도 내게 미치지 않도록, 나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의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

• 사마리아에 나타난 표징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복음이 전파되던 초창기에 벌어진 한 사건을 톺아보려 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헬라어를 사용하는 많은 제자들이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흩어진 사람들은 숨기는커녕 오히려 두루 다니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가장 도드라진 사람은 빌립입니다. 그는 사마리아에 이르러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증언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많은 표징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중풍병 환자와 지체장애인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성에는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성경 구절을 볼 때마다 노골적으로 불편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있습니다. 귀신 운운하는 것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나 할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지식의 총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 시대에도 귀신 이야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벌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귀신이 있네 없네 따지고 논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의 핵심에서 벗어나기 쉽습니다.

저는 귀신이란 우리 마음을 뒤흔들고 갈기갈기 찢어놓아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힘을 일컫는 상징어라고 생각합니다. 음울하고 어두운 기억들, 원통한 일들이 우리 마음에 쌓이고 또 쌓여 더께를 이루면, 그것은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지배하는 힘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귀신이 아닐까요? 귀신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인답게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예수 앞에서는 귀신들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와 만나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있고, 귀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어둡고 음습한 세력이 물러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사마리아에서 귀신 들린 사람들, 중풍병자, 지체 장애인들을 고치시고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넘쳤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서 기쁨이 솟아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2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누릴 기쁨은 마치 아이를 출산한 여인의 기쁨과도 같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기쁨은 이처럼 생명이 깨어나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도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마술과 신앙

그 놀라운 사건에 누구보다도 크게 놀란 것은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를 마술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술사 하면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이 떠오릅니다. 눈속임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마술사의 신기한 솜씨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은 마술이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세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겁니다. 마술을 보면서 즐기기보다 기어이 마술사의 눈속임을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얘기가 곁길로 같습니다만 사마리아 성의 마술사 시몬은 그런 마술사가 아닙니다. 

그는 자연 과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고대 세계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를 소개하면서 누가는 마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한다고도 했고, 스스로 큰 인물인 체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신들의 세계에 대한 남다른 지식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신들의 마음을 얻거나 신적인 힘을 빌리는 방법을 안다고 자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레 그를 허풍선이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몬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나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빌립이라는 떠돌이 전도자를 통해 나타나는 기사와 이적을 보고는 존재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신적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몬은 빌립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듣고는 그 가르침에 귀의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았고, 빌립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 다녔습니다. 

저는 그를 비교적 순박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자기의 기득권을 침해한다고 여길 때 사람들이 보이는 일차적 반응은 적대감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예수님의 경우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체제를 통해 경제적 이득과 사회적 존경을 누리던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예수를 없애기 위해 모의를 했고 결국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진리보다 이익이 힘이 센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정을 생각해보면 시몬은 차라리 순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빌립을 모함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선동해 쫓아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빌립을 추종하면서 자기도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그는 어리석기는 하지만 사악하지는 않습니다. 아직 온전한 신자라 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변화보다 표징에 더 마음이 끌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시몬은 오늘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보다 주님의 호의를 힘입어 원하는 바를 얻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초보적인 믿음의 자리에 서있습니다. 육신의 일에 매여 성령을 근심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이지만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8:6).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 성령 세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까지 전해지자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합니다. 사태를 파악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뜻이었을 겁니다. 일찍이 요한은 예수님 일행을 영접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하여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눅9:54)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어떤 적대감도 보이질 않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성령 체험이 그들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나와 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의인과 죄인을 가르던 분리의 담이 무너지자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의 한 부분임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형제자매들도 성령을 체험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간절하고 따뜻한 마음이 응했던 것일까요?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아쉽지만 누가는 그 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상상해 볼까요? 회개의 영이 임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광경이 떠오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이들도 보이고, 황홀경 속에 빠진 이들도 보입니다. 고질병에 시달리던 이들의 몸에서 병이 떠나자 놀라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오랫동안 적대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화해하는 모습도 떠오릅니다.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난 지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만, 그 사건은 평화를 향한 인류의 꿈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여전히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당시 뉴욕에 살고 있었던 한 신학자는 이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던 매스컴의 논조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슬픔, 분노,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당시의 뉴욕에서 그는 가장 성스러운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성공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던 사람들이 잠깐 멈추어 선 채 자신과 이웃을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임시 분향소 앞에서는 함께 눈물을 흘렸고, 눈이 마주치면 쓸쓸하게 같이 웃고, 눈빛으로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상처받은 뉴욕은 잠시 쳇바퀴처럼 돌아가던 경쟁이라는 컨베이어를 멈춘 것 같았다…같은 위기를 겪는 사람들이 느끼는 연대감과 공동체의식으로 도시 전체가 훈훈한 인간의 정이 돌기 시작했다. 다수의 죽음 앞에서 생겨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이해, 연민, 자비가 공기 중에 스며 있었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20쪽)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이처럼 이런 저런 이유로 외면하며 살던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만듭니다. 

• 돈으로 할 수 없는 일

시몬은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이 놀라운 사건을 목격하고는 넋이 나갔습니다. 그는 사도들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도 그런 능력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돈을 건네며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돈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 철부지를 향한 베드로의 질책은 자못 준엄합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그대가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소.”(20-21)

시몬의 영혼을 내리치는 베드로의 채찍질이 혹독합니다. 마치 얼음을 깨는 도끼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반응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릇된 정신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때로 강한 충격이 필요한 법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돈은 어느 시대에나 매력적입니다. 현실의 행복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지갑에 돈이 두둑하면 어딜 가나 당당합니다. 돈이 있으면 친구도 많아지고, 얼굴도 뜯어고쳐 팔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돈이 말하는 세상이니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이라는 사회학자는 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돈은 사물의 모든 다양성을 균등한 척도로 재고,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표현하며,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모든 가치의 공통분모임을 자처함으로써 아주 가공할 만한 평준화 기계가 된다. 돈은 이로써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 불가능성을 가차 없이 없애버린다.”(<짐멜의 문화론> 중에서)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왜 문제인지를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다양성을 특색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 무가치한 것은 없습니다.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 조화로운 세상을 이룹니다. 하지만 돈은 모든 사물을 균등한 척도로 잽니다. 질적인 차이를 양적인 차이로 환산함으로써 그 고유한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지워버립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폭력 세상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돈은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 불행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한 동안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대중들이 그 말을 입에 달고 산 까닭은 그것이 자기들의 욕망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세상을 열기 위해 고투하지 않는다면 우리 영혼은 무력해지고 말 것입니다. 

시몬이 베드로의 권고대로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함으로 용서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도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볼 때 그가 회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도 시몬처럼 돈으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주인을 바꾸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헌금은 돈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징표입니다. 바라건대 우리가 바치는 헌금이 하나님의 호의를 사기 위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올 한 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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