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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나의 기적 (요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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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기적 (요 2:1-12)


잠자리 한 마리가 가만히 풀 위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살금살금 다가와 있는 힘껏 잠자리채를 휘둘렀습니다. '윙'하고 바람 갈라지는 소리에 잠자리는 날개를 폈습니다.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잠자리가 아이를 향해 말했습니다. 
“나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어린 너한테 잡힐 뻔했구나.”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잠자리는 온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이에게 말을 하다가 그만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파르르 날개를 떨고 있는 잠자리를 보며, 거미가 말했습니다. 
“너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이렇게 거미줄에 걸리진 않았을 텐데. 아무리 움직여 봐야 소용없어, 움직일수록 더 조여들 뿐이니까.”

거미는 그렇게 말하고 재빠른 동작으로 잠자리에게 다가갔습니다. 그 순간, 산새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총알처럼 날아왔습니다. 산새는 표적처럼 박혀 있던 거미를 낚아채듯 물고 갔습니다. 그리고 신음하는 거미에게 산새가 말했습니다. 
“거미야, 미안해. 네가 몸을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너를 보지 못했을 거야.”
우리, 부족함 때문에 오히려 넉넉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부족함 때문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어떤 회사에서 사원 모집광고를 내자 7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시험장에는 한 사람씩만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그저 사방에 큰 거울이 하나씩 걸려있을 뿐이었습니다. 
지원자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각 거울 위에 적힌 질문에 맞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답안지에 적는 것이 시험이었습니다.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사람은 정직합니까?” 
두 번째는 “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셋째는 “이 사람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네 번째는 “만일 당신이라면 이 사람을 채용하겠습니까?”였습니다.
이것이 그 시험문제의 전부였습니다. 시험을 치른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있는 듯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얼마 후 드디어 합격자 발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70명 가운데 한사람만이 합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모든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회사는 정직한 사람, 즉 자기의 부족함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완전한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사람이요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런 정도 갖춘 사람이라면 아쉬울 것 하나도 없겠다고 말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그런데 보다 큰 문제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자기의 부족함을 안다고 해도 이를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자기의 흠이 될 이야기를 누군들 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나라는 동네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집니다. 예수님도 그 어머니와 함께 그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아 참여를 하고 제자들까지도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아 예수님과 상당히 가까운 사람의 결혼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의 혼인잔치는 거의 한 주간을 꼬박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잔치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축하를 합니다. 새롭게 맺어지게 될 신랑 신부를 축하할 뿐 아니라 이 잔치 자리야 말로 온 동네의 축제 한 마당입니다. 그렇게 며칠을 두고 온 동네가 새롭게 맺어지는 가정을 축복합니다. 마땅히 잔치집 주인은 누구든 와서 함께 즐기며 새 가정을 축복해주도록 모든 대접할 것을 준비하여 대접을 합니다. 음식도 정성스럽게 준비를 합니다. 당연히 포도주도 충분히 준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오는 손님들마다 함께 어울려 흥겹게 잔치를 합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잔치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손님을 계속해서 몰려드는데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모자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잔치 주인은 충분히 준비한다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손님이 많았던지 준비한 것이 모자라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인생입니다. 충분하리라 생각했지만 우리네 삶은 우리네 생각처럼 충분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리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이 우리 앞에 닥쳐오기도 합니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이렇게 난감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잔치에 제일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포도주가 모자라다니요? 이건 전혀 생각지 못했던 변수입니다. 보통은 한 주간 내내 계속되는 잔치인데 이제 겨우 사흘입니다. 그런데 벌써 포도주가 떨어진다면 이거 잔치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그런 모습들이 우리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어떤 행실의 문제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로 복된 인생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들고 지친 채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기는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우리네 삶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잔치집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여기 이 집에 예수님이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아주 곤란하게 됐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라를 건널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피곤하셨던지 배에 오르자마자 고물을 베고 잠이 드십니다. 한데 풍랑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한 평생을 살아온 제자들조차도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을 깨우지 않습니까?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났던 벳새다 광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시고는 자신은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이 어떻게 됩니까? 그만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으로 인해 밤새 고생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딴 길로 갔던 요나가 풍랑을 만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제자들에게 일어난 이 풍랑은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태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 때로는 예상하기는 했다고 해도 실망스러운 결과에 부딪치게 될 때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가장 쉽게는 원망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쳐오게 될 때 불평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인생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내게 있단 말인가 정말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에게는 전혀 관심도 없는 것이 아닌가?” 등등. 내가 몹쓸 짓을 했다면 모를까 주를 위해서 살아본다고 애쓰고 있는데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게 입이 댓자나 나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맹자의 ‘고자장구(告子章句)라는 글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심지를 괴롭게 하고, 뼈와 힘줄을 힘들게 하며,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여 그가 행하고자 하는 바와 어긋나게 한다. 마음을 격동시켜 성질을 참게 함으로써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그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아 갔지만 제자들도 그 가운데 함게 있었지만 여전히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저 잔치에 참여한 손님일 뿐입니다. 손님은 그저 잠시 머물다 떠나면 끝날 사람입니다. 손님이라고 하는 것은 초청받아 올 때 어떤 선물을 준비할 수는 있겠지만 그 집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손님은 그저 손님일 뿐입니다. 

그건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예수가 나의 구세주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는 한다고 하지만 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기보다는 내 마음에 옳게 생각되는 대로 내 마음이 가는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주님과 한 집안에 머물고 있다고 해도 아니 주님을 내 안에 초청하였다고 해도 그저 예수님은 손님일 뿐입니다. 

말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진짜 주인은 나일뿐입니다. 말만 주여 주여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 적도 없고 모시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그토록 강조 또 강조를 하여도 여전히 염려로 가득합니다. 불만이 가득하고 마음에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우리네 삶에서 완전히 찬밥 신세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포도주가 모자라는 것과 같은 너무도 엄청난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면 우리는 당황합니다. 어쩔 줄 몰라서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그러나가 그나마도 여의치 않으면 그 때부터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기에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치 앞인들 내다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앞길을 누군들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스스로 주인 행세 하던 것을 이제 그만 두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참된 주인으로 알아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모든 해결책은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잔치집에 닥쳐온 어려움을 보고 제일 먼저 손을 걷고 나선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의 어머니였습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에게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댜”고 알립니다. 예수님은 간곡하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 이릅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중보자의 역할입니다. 누군가 나를 붙들어줄 수 있는 사람, 누군가 내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 누군가 나와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사람, 누군가 나의 짐을 나누어질 수 있는 사람,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 나를 안아줄 수 있고 내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중보자가 되어주고 또 누군가가 나의 중보자가 되어줄 수 있다면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그분은 예수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아직은 내가 나서서 일할 때가 아니라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딪치는 현실 속에서 궁극적인 해결의 열쇠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간섭하시고 예수님이 내 문제를 위한 해결자요 조언자가 되어주실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 해결의 연쇠가 바로 주님에게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가 생각해도 이상한 명령을 하인들에게 전합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하인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그래 갖다 주었는데 그 물을 맛본 연회장이 깜짝 놀라서 신랑을 불러 말합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아마 신랑은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뒤늦게 그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은 이렇듯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에게 있어서 그까짓 물이 포도주가 되도록 하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아무 때나 물을 가져다 포도주가 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문제들은 그냥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거기에는 그에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예수님께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서 아뢰어야 합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드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들의 문제를 주님께로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나 혼자 가슴에 끌어안고 끙끙거릴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힘들어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고 그들을 위해 주님께 중보할 수 있는 중보자요 왕 같은 제사장이 진실로 필요한 때입니다.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곁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우리가 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저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했는데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보십시오. 여기 하인들은 영문은 모르지만 그래도 예수의 어머니가 하신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는 말씀을 따라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따릅니다. 왜 그런 일을 시키는지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할 때 아직도 오실 손님들이 많은가보다 그러니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아구까지 물을 채웁니다. 그랬더니 그 물을 다시금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어쩌면 그 때 마음에 갈등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도 다른 물이 아닌 정결예식을 하는데 사용되는 돌항아리에 채웠던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주라고 할 때는 영문을 몰라서 얼핏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순종합니다. 자기들의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물이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그들은 눈앞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몹시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만 입만 떡 벌렸을 것입니다. 그 광경을 여기 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아마 하인들도 그 포도주를 얼른 맛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듭 거듭 놀랐을 것입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자기들이 연회장에게 그 물을 떠다 드릴 때만 해도 물이 포도주로 변할 것이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말씀대로 순종할 때입니다. 그래서 대저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것이 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인 물이 포도주가 되는 귀한 역사는 바로 중보자인 예수의 어머니와 더불어 그 집 하인들이 믿고 순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처음 예수님이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설 때조차도 예수의 어머니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그리고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산 역사를 지켜본 하인들이 그 다음부터는 신이 나서 포도주를 손님들에게 전달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처음 연회장에게 물을 떠서 가져갈 때는 말 그대로 물이었지만 가져다 드리고 보니 물이 아니라 포도주입니다. 바로 그 물이 아닌 포도주를 그들이 나르고 있으니 얼마나 흥겨웠겠습니까?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종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믿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고서야 어찌 순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순종하지 아니하고서야 무슨 역사가 나타나길 기다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그 사랑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사랑을 만들어내는 신비의 물질이 두뇌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세라토닌’ ‘엔도르핀’ ‘도파민’ 같은 호르몬입니다. 그 중에서 ‘세라토닌’은 주로 햇빛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과 평안을 처음 알려주는 전령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마치 펌프질을 할 때 처음 붓는 마중물과 같은 것이죠.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빛부터 지으셨는지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의 마중물이 되는 ‘세라토닌’이 햇빛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 인생의 행복을 마음에 두고 온 세상을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행복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젠 타인을 향한 사랑의 펌프질을 계속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경험한 사람이 사랑과 선행을 게을리하면 결국 마중물까지도 말라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의 행복도 사라지고 공허함과 우울증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타인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나와 이웃을 행복하게 만드는 최선의 비결인 셈입니다. 

그리고 빛 되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말씀이 있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뿐 아니라 물이 포도주가 되듯 우리 인생이 복된 인생으로 바뀌게 되고 막장 인생이 역사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저와 우리 모두가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 밀레와 사상가 루소는 친한 친구였습니다. 밀레가 ‘만종’이나 ‘추수 후’등의 명화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그의 생활이 너무 가난하여 화실 난로에 땔감도 없어 그는 처자와 함께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을 정도 였습니다. 
그 무렵 사회적으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던 장쟈크 루소가 밀레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화실에 걸린 그림들을 보더니, ‘접목하는 사나이’라는 그림을 가리키며 세계적인 명화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친구로부터 부탁을 받았다면서 양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밀레는 쾌히 허락했고 루소는 얼마가 들었는지 친구가 전하는 것이라면서 돈봉투를 놓고 그림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루소가 돌아간 후 밀레는 봉투를 열어보았습니다. 당시 돈 5백 프랑의 거액이 들어있었습니다. 밀레의 집은 오랫만에 포근한 날을 맞았습니다. 
몇 해 후 밀레가 루소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거실에 ‘접목하는 사나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루소가 친구를 돕기 위하여 가공의 인물을 빙자한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친구가 있습니다. 이익을 위한 친구, 쾌락을 위한 친구, 건덕을 위한 친구, 그러나 루소와 같이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힘이 되는 친구는 생명의 친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친구일까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오직 말씀을 따라 충성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요 주의의 연약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중보하는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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