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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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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데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조건 지금보다 문화적 역량이 떨어지면 초대교회의 조건을 갖추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분위기나 예배형태 자체를 단순화하고 원시화해야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지금보다는 덜 문화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삶의 방편이 지금보다는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활동영역이 한 지역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체적 생활이 용이(容易)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초대교회를 단순히 덜 문화적이고 덜 현대적인 것으로만 특징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먼저 초대교회의 특징적인 것은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된 교회였습니다. 하나된 교회는 교제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기도하는 일을 전무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사귀며 떡을 떼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서로서로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이들은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사람들의 필요대로 나누어 주는 생활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에 『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가룟 유다가 관리하는 공동기금으로 생활했습니다(요 12:6).
초대교회는 이러한 성경적 원리에 기초해서 경제활동과 분배법칙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소유를 바치는 일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초대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곤경에 처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섬김의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선교하는 공동체로서 사명에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설립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안디옥 교회를 위시하여 이방교회들도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러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자면 먼저, 

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對神관계). 

본문 2장 43절에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라고 했습니다. 
『 사람마다 』라는 말은 44절에 나오는 『 믿는 사람 』과 대조가 됩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부풀려서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라는 말을 직역하면 "모든 혼에게 두려움이 되고 있다"로 여기서는 무서운 공포(fear, afraid)가 아니라 존경심과 경외심(respect, veneration)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36편 1절에 『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죄얼 』(罪 )은 죄악에 대한 재앙을 뜻하나 여기서는 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17절에 『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죄인들에게는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요엘서 2장 11절에 『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0절에 『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 『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릴 때가 있습니다. 
느헤미야 1장 5절에 『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8절에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5장 36절에 『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 『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자녀삼아 주시고 내 죄를 없이 해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이 존경과 경외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다윗 앞에 엎드린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겠다고 했습니다.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 때 므비보셋은 사무엘하 9장 8절에 『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 보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Ⅱ. 물질(物質)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 다(對物관계).

본문 2장 44-45절에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라고 했습니다. 
공동체 형성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 의식과 함께 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적 결속이 물질문제로 충분히 와해 될 수 있기 때문에 대물질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옛말에 人情皆爲窘中疎(인정개위군중소)니라. 이 말은 "인정은 대개가 궁색한 데서 멀어지게 되기 쉬우니라."는 말입니다. 
이들의 공동체 생활에 근간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언약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예루살렘 공동체와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이방인의 공동체와는 구별됩니다. 이방인의 공동체는 유무상통이 아니라 사유재산을 인정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1-22절에 『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이는 시장하고 어떤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적 결집이 신앙 공동체 형성을 가능케 했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면 자원하는 분배가 불가능합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 1:21), 만물은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고전 3:23)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 3-5절에 『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고 했습니다.

여기 『 한 마음과 한 뜻 』은 전인격의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식적 전환이 신앙으로 승화되지 못하면 신앙공동체 운동은 불가능합니다. 
초대교회는 인간들의 삶 속에 복잡하고 민감한 물질문제를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분히 극복했습니다. 신앙은 이 세상의 명예나 부를 확실히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신앙은 장차 오는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에 있는 것입니다. 

Ⅲ. 교회(敎會)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對敎會관계). 

본문 2장 46절에 『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라고 했습니다.
슈퍼스타 K3에서 울랄라 세션이 일등을 했습니다. 결승전에 갈 때 심사위원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너희들 잘 한다. 그러나 여기는 자기의 것을 포기한 사람이 나오는 곳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오순절날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질문했습니다(행 1:6). 오순절날 모였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행 2:2-4).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관습에 따라 날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성전 바깥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1절에 『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찬양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성전에 찾아오는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성전에 서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임은 유대인들의 모임과는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에 따라서 율법의 의식에 맞추어 제사를 드렸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서 전도하기 위한 자발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는 모이는 역사입니다. 모일 때 역사는 일어납니다. 모일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5절에 『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면서 애찬을 나누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의 모임 속에는 기쁨이 충만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새로운 신자들을 주님 자신의 공동체에 더 하시는 것은 주님 자신의 주권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보내시는 자들을 기쁨으로 환영하고 영접하는 것은 그 모임에 속한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오늘날 교회 성도들의 모임은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마치 잔치집에 모여드는 사람처럼 모든 좋은 것을 눈으로 보고 모든 맛있는 것을 맛보고 아주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언제나 생산적인 모임이 되어야 하고 가치 있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충만한 말씀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는 그 소유주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원리 앞에 궁색한 변명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신앙공동체에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습니다. 
신앙공동체의 부흥은 곧 우리 자신의 부흥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 대한 평가는 교회적 삶에서 찾아야 합니다. 

Ⅳ. 사람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對人관계). 

본문 2장 47절에 『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표현은 누가가 신약성경에 7번씩이나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미는 자발적입니다. 
여기 『 온 백성 』(호 라오스, )이라는 말은 선민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 칭송을 받는다 』는 말은 당시 총독이었던 폴리니우스(Polinius)가 트라얀(Trajan)황제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독교 교인들이 박해로 인해 숨어서 모이는 장소를 은밀히 조사해 본 결과 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이렇게 초대 기독교 성도들은 그들의 윤리적 삶이 칭송을 받을만 했다는 것을 로마의 정치가들이 입증해 준 셈이 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법을 초월해서 살기 때문에 온 백성의 칭송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인화협동적인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7절에 『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윤리는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당위적 결과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고 했습니다. 믿음 따로 행함 따로가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행함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옛말에 칠십이 종심소욕 불유구호(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乎)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평할 때 그 사람 믿음은 좋은데 신앙인격이 나쁘다 라고 하는 말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평가는 그에게 나타나는 신앙인격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갈보리 신앙공동체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이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곧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입니다.

신명기 7장 6절에 『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 『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3절에 『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전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 했습니다.
칼빈은 천상교회와 지상교회의 거리를 멀리 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17세기에 영국을 떠나 지금의 미국의 보스턴을 건설했던 경건한 청교도 존 위스롭(John Winthrop) 총독은 외적번영을 진정한 복으로 오해한 자들을 책망했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구약이 현세적 복을 약속한 바가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신자들의 복을 말했지만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행복은 흔적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육체적 쾌락이나 부귀영화나 외적권력이나 자녀의 형통이나 일반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고는 정신 나간 것이요 위험스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오병세 신약해설 20p). 
복음은 분명 사람들의 마음을 현세에서 즐거움을 찾는 데에만 가두어 두지 않고…… 이 땅의 쾌락거리들에 매어두지 않고 하늘에 있는 소망을 선언함으로써 그들을 그리로 옮겨가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Vangenderen, Dogmatiek, 88p).

기독교는 철저히 현세적 복음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의 궁극적 실현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형통은 복음을 받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 추구하는 성도에게 주는 상급(이 모든 것)입니다(마 6:25-34).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계시(성경)의존적 삶이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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