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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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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 (마 5:1-3)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4장에서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 5장에서 바로 시작하신 일이 뭐냐 하면 제자들 산상수련회를 하셨습니다. 제자 모두를 데리고 산으로 가셔서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절대 필요한 진리를 설교하셨습니다. 금년에 우리가 제자화 목표로 해서 저도 똑같이 팔복 설교로 오늘 시작하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공통적 소원이 있다면 복 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복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의 문화 속에는 복복자(福字) 문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를 가 봐도 “福”자를 새겨서 복의 임재가 나와 우리 가정에 임하기를 바라는 소원을 글자로 나타낸 문화입니다. 동양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양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좋은 인사말이 “God Bless You.”입니다. 지금이 1월인데 1월의 인사는 누구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공통으로 사용합니다. “God Bless America”는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노래입니다. 

예수 안 믿고 살면서도 복 받기는 모두 다 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복을 더 좋아합니다. 집사도 좋아하고 목사도 좋아하고 어린 아이도 좋아하고 노인들도 좋아합니다. 복은 다 좋아합니다. 인간의 소원이 그렇게 복을 받기 좋아하는데 하나님은 어떠신가? 하나님은 복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사실 인간의 복에 대한 소원은 하나님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인간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인간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되” 거기서부터 인간의 삶이 시작됩니다. 사람을 만드시자마자 제일먼저 그렇게 약속하셔서 인간은 복 개념을 가지고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안식일로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날을 지킵니다. 이날에 대해서 성경은 처음부터 선언했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얻으리라.” 즉,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복이 요한계시록까지 연결됩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들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마태복음은 신약 중에 제일 첫 번째 성경인데 바로 5장이 예수님의 첫 설교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첫 설교의 주제가 바로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팔복 설교를 제자들에게 하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자 하시고 인간도 복을 받고자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합의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복 받기는 아주 쉬운 문제가 될 터인데 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오늘 말씀은 복 받을 사람과 받은 사람에 대한 기준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과 인간이 받고자 하는 복의 차이를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이 마태복음 5장인데 4장에서 예수님은 큰 시험을 만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당하신 그 시험의 내용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받고 싶어 하는 복의 내용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라고 했습니다. 무한대의 물질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지금 다 복 받았다고 하면 모두 부자된 것으로, 물질 능력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제일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몸이 상하지 않는 것은 기적 사건에 속하는데 이것은 너도 나도 다 좋아합니다. 

기적만 일으킨다면 인기라든가 교회 부흥이라든가 성공이라든가 하루아침에 일약 세계적 인물이 됩니다. 모두가 세상에서 다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내가 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천하만국 권세를 주겠다고 하였는데 천하만국은 고사하고 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 나라일지라도 왕이 된다면 인간들은 누구나 그런 복 받기를 다 소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조건들의 복을 다 물리치고 5장에 와서 이러한 복을 말씀하셨는가? 물질적인 복이나 권세적인 복들이 우리가 다 물리쳐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하는 것은 제자화 훈련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 필요한 제자의 삶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수련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리치신 복들은 메시야로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실 때 오히려 그런 것이 걸림돌이 되어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물리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도 이렇게 이것이 복인 줄 알고 사역을 하라.” 지금 이스라엘에 가시면 팔복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 예배당을 아주 예쁘게 지어놓은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자리가 오늘 말씀을 하신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기념해서 건축한 것입니다. 여기 예수께서는 앉아서 설교하시고 제자들은 서서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초기 역사에 한 때는 교인들은 서서 들었고 설교자는 앉아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볼 마음이 있으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냥 가난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돈이 없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거나 지식이 없이 무식한 자는 복이 있다거나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습니다. 인도의 민족 지도자 간디는 사실 예수를 믿고 살았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평생 자신의 갈 길에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은 마태복음 산상수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신의 삶의 좌표로 삼았던 것을 자신이 발표했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을 우리가 알 때 내가 복을 받은 자인가 없는 자인가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됨을 증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내 속에 내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심령” 마음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했고 그 하나님의 영과 나의 영의 교통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이 5장인데 6장으로 가면 예수님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설교를 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우리는 그것이 제일 필요합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이런 설교를 구체적으로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은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마실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요 무엇이 먼저인가를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영적인 것을 먼저 구해서 성령님과의 내 심령의 교통함을 이루는 이것이 제자로서의 최고의 복인 줄 알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간혹 우리 실제 삶의 과정에서도 신앙생활 앞세우다가 손해 보는 일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 가운데도 상업을 하시는 분이 많이 계실 텐데 사실 비즈니스는 일요일에 제일 매상이 높습니다. 일요일에 오픈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해놓으면 그날에 손님이 제일 많이 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문화 속에서 삽니다. 

그런데 문 닫아 버리고 교회 오니까 그만큼 손해가 납니다. 그런 경우를 얼마든지 여러분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청년들은 저에게 결혼 상담을 많이 합니다. “아주 훌륭하고 실력 있고 잘생기고 돈도 많고 능력 있는 결혼 상대자가 한명 생겼습니다.” “그러면 잘되었지 않느냐?” “신앙생활은 못하겠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럴 때 목사는 참 대답하기 힘듭니다. 혼삿길을 막아야 하나, 아니면 괜찮다고 하라고 해야 하나? 만약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허락한다면 “목사님도 세상적인 거 아닙니까?” 이럴 수도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미국의 주재원으로 와 있다가 굉장히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한국의 본국 회사에서 굉장히 큰 자리를 그에게 주어서 발령이 났습니다. 가족들도 좋아하고 저도 좋아하고 주변에 소식 들은 사람이 축하한다고 하고 신이 났습니다. 그 자리는 자기가 지금까지 입사해서 바라고 원했던 자리로 돈도 많이 생기고 일 년에 연봉이 상상도 못하게 높고 그렇게 되면 성공한 사회인 소리도 듣게 되고 내 소원이 다 이루어지게 되는 사람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고민 고민 하다가 사표를 내버렸습니다. “나 못하겠습니다.” 주변이 모두 깜짝 놀라고 저도 심방 가서 “어떻게 결정한 겁니까?” “제가 내 인생의 우선권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제가 미국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가장 큰 수확이 있다면 내가 병원에 입원해서 거의 죽어갈 때 처음으로 이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안수 기도를 해주심으로 살아나서 이렇게 건강해 졌는데, 그래서 이처럼 신앙의 깊이에 들어갔는데 내가 가야할 자리는 신앙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가면 거의 365일 내가 요정에 다니며 거래해야 됩니다. 돈은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내가 주재원으로 와서 생긴 이 신앙을 본국에 가서 그 자리에 와서 지킬 수 있을 것인가를 심적으로 깊이 생각해 봤을 때 아니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냈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렵게 살면서 신앙생활 잘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 경우를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복을 차버리는 결과인데 그런데 주님은 그게 복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가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못합니다. 여러분이 오늘도 십일조 헌금을 하시려고 가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 앞에 헌금한 액수를 한번 합쳐 보십시오.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어디에 지출을 가장 많이 했는가 보면 해마다 헌금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내 삶의 우선권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열두 제자를 산으로 데리고 산상 수련회를 하면서 “너희는 심령이 가난해야 돼.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차있는 그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내 제자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율법으로 주어진 규칙이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첫 번째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너희 밭에 먼저 익은 곡식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드리라. 처음 익은 열매는 여호와의 것이니라. 짐승의 첫 새끼는 여호와의 것이니라.” 이게 무슨 뜻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짐승의 첫 새끼는 갖다가 뭐하십니까? 하나님이 밭의 채소 먼저 익은 것을 가져 왔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것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율법으로 “이렇게 하라.” 목적은 하나뿐입니다. 

“창조자를 먼저 생각하라.” 가져와봤자 도로 우리가 가지고 와서 먹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하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심령의 가난이다. 나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이것을 제일 앞에 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내 제자가 되리라.” 제자 훈련입니다. 그 다음에 이 말씀에 헬라어 원어의 뜻이 있습니다. “프토코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비어있는 마음” “낮은 곳으로 임하는 마음” “겸비한 심령”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라고 했는데 바리새인은 그 당시에 그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율법적으로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세리는 그 사회에서 아주 천한 멸시를 받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공교롭게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러 갔다가 만났습니다. 바리새인은 이 세리와 차별화를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차별화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는데 저런 녀석이 내 곁에 와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합니다.” 차별화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절대적 차별화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는 반드시 드리나이다.” 그런데 세리는 그런 말을 한마디도 못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랬다고 이런 기도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 “아니, 왜 그런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리라.” 이렇게 해석을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가 한번 객관적으로 평가해 봅시다. 바리새인은 객관적 평가에 있어서 정말 훌륭합니다. 

그의 의를 보면 토색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한 번도 안했습니다. 여러분! 자신 있습니까? “물질적으로 그런 일 없습니다. 불의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일만 행한 사람입니다.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성도덕이 문란하지 않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신 있습니까? 말씀이 없는 것을 보니 자신이 없으신가 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바리새인과 같이 살기 힘듭니다. 현대 문화에서 그렇게 깨끗하게 사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지금 양심선언입니다. 

“하나님! 내가 물질적으로 양심을 가리는 일을 한 것을 보셨습니까? 내가 선하지 않은 일에 내 몸과 마음을 바치거나 성도덕이 문란하게 사는 것을 한번이라도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정확하게 금식하시는 교인 계십니까? 저도 안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는 정확히 드렸나이다. 무슨 돈이 생기든 무슨 수입이 있든 이것만은 내가 철저하게 십일조를 구분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객관성 있는 훌륭한 평가를 넉넉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도 자신감 있게 양심선언을 하면서 “하나님! 내가 잘못한 게 뭡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에게 의로운 점수를 주시지 않았는가? 그의 심령은 지금 가난하지 않습니다. 자기 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와서 보고하는 형식의 자랑 기도를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리는 우리가 한번 추측을 해볼 때 그의 일상생활 가운데 잘하는 것을 한 조건도 하나님 앞에 와서 이야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못했다는 것은 아마 그의 양심에 더러운 토색한 일이 세리니까 돈 취급하는 사람이니까 있었을 지도 모르고 불의와 간음죄도 있었을 지도 모르는 양심선언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바리새인은 그런 죄는 절대 없다고 하는데 비해서 세리는 없다고 떳떳하게 말도 안하고 그저 죄인이라고만 하는 간단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는 죄가 많은 죄인인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에게 후한 점수를 매기셨는가? 그의 심령은 아주 가난해 있습니다. 비워져 있습니다. 겸비하고 낮은 곳에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손가락 설교를 많이 합니다. 엄지손가락이 항상 쳐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일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손가락 표현은 다른 나라에 가서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나라마다 이것이 아주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좋다는 표현을 엄지와 검지를 붙여서 원을 만들어 표현합니다. “Good! Thank You!” 그렇게 말할 때 그런 손가락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브라질 가서 그렇게 손가락 표현을 했다가는 상대방이 총을 쏠지도 모릅니다. 최고의 나쁜 욕으로 싸움하자는 말이 됩니다. 우리나라 유명한 영화배우로 이름을 대면 여러분이 다 기억할 만한 사람이 LA에 와서 공연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손가락도 어떤 손가락을 내미느냐에 따라 뜻이 다 다른데 검지를 내밀면서 다른 사람을 지적하면 싸우자는 뜻이 되는데 중지손가락과 약지손가락을 내밀면 미국에서는 성적인 욕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배우가 하늘을 가리키다가 중지손가락을 내미니까 사람들이 자지러져서 그게 제일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계가 공통인 것은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것입니다.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것은 어느 나라든지 “당신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자랑, 칭찬의 뜻으로 쓰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자는 높이시리라.” 이 손가락 예화는 아주 좋은 이야기가 됩니다. 

세상 누구도 핑계할 수 없는 양심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끝없는 욕심을 가지고 삽니다. 이 많은 것을 조절하기 매우 힘든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게 어렵기 때문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택해 놓고 “이 문제를 너희가 마음 가운데 해결해야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부터 해결해라.”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나갈 때는 마음이 부자였습니다. 자신감 있었습니다. 아버지 간섭 없는 자유함의 세계에서 누릴 것이 확실해졌고 행복의 많은 조건들을 꿈꾸면서 적지 않은 재산도 들고 나갔습니다. 

마음의 욕심이 가득차서 돌아올 때는 심령이 가난해졌습니다. ‘아! 내가 누구인가? 죄인이구나.’ 아무 것도 없는 빈 마음에 죄인이라는 고백 하나를 가지고 부끄럽게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그를 얼싸안고 사랑으로 맞아주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실력이 좀 생기면 교만해지기 쉽고 심령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며 아버지가 계시므로 내가 있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전체가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것이라고 심령을 비울 때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로는 잃어버려도 억울해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지고 실패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두 손을 고요히 모으고 영혼의 기도를 드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 많은 산더미 같은 것을 내 마음 속에 소유했다 할지라도 이게 제일 큰 복이다.” “어리석은 자여!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뉘 것이 되겠느냐?” 

여기서 천국이 저희 것이라 했는데 천국은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인간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내세적 세계에서의 천국이고 하나는 현세적 천국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 “하나님의 나라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현세적 천국이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가정 식구들이 심령이 가난해지면 거기가 천국입니다. 교인들이 심령이 가난해지면 교회가 천국입니다. 내 마음에 심령의 가난을 이루면 나는 이미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게 제일 큰 복이다.” 여러분! 세상에서 그토록 많은 노력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행복의 추구 아닙니까? 행복이란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함입니다. 

심령 가난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어떤 것도 행복이 되지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들이 똑같이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가 제일 행복했느냐 하면 “백악관에 들어가는 날과 나오는 날이었다. 이틀 동안 제일 행복했다.”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도 갖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예배 참석은 가능한 적게 합니다. 공동 번역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천국은 네 손에 있느니라. 하늘나라는 당신 손에 있으며 당신 마음속에 있으며 당신이 거하는 그 장소가 천국이다. 이 세상에서 그 천국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영생의 천국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라. 내가 많은 것을 가졌으나 이것은 다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니까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심령 가난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복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미 마태복음 4장에서 너희들이 원하는 그 세 가지의 가장 좋은 복의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물리쳤다. 너희도 그렇게 물리치면서 심령 가난을 이루어 하나님의 역사에 도움되는 내 제자가 되어라.” 제자들을 산에 끌고 가셔서 제일 첫 번째 하신 신앙수련회입니다. 저는 지난 일주일 동안 새벽기도는 본 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낮과 밤은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하는 다른 교회 여러 곳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 선택을 하고 제일 먼저 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금년에 우리가 제자화를 목표로 정했는데 그래서 저도 예수님이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전한 말씀을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두 심령이 가난하여서 일 년 동안 주님이 주시는 영적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저희들이 잘 깨닫고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그렇게 세상을 이겨가는 믿음의 능력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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