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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2) (눅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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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2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눅 11:3)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이어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이 본문을 설교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양식이라는 단어가 히브리 사람들이 주식으로 삼는 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가기 위해서 필요한 영혼과 육체와 정신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어지는 날들의 필요한 양식이며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의 사건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이 기도 속에서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II. ‘우리에게’-공동체의 기도 

A. 공동체적 기도의 지평 

오늘은 ‘우리에게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라는 말이 갖는 공동체의 기도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공동체적 기도의 지평을 보여줍니다. 

1. 일차적 지평: 그리스도의 지체 

이 기도 속에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우리가 몸담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굶주리는 사람이 없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가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 실제로 우리의 소유를 그들에게 나눠줌으로써 그들도 일용할 양식을 공급 받으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믿는 지체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이고 나아가서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보편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돌아보되 교회에 속한 지체들, 나아가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 교회에 속한 굶주리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 기도를 드리며 함께 돌아보아야 합니다. 

2. 궁극적 지평: 이 세상의 이웃들 

궁극적인 지평에 있어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이웃들이 이 기도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해 주신 양자적 아버지 되심과 함께 자기의 형상을 닮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돌보고 기르시는 창조주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들, 심지어는 이교도들까지도 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고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유지해 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함께 이웃들을 생각하며 이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B.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접하면서 이미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풍족하게 주시는데도 사람들은 탐욕과 방탕으로 이런 식량의 공급들을 굳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땅의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자각함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넘치도록 주셔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모든 조건들을 해결 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을 즐기는 것이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사용하여 야 할 사물과 누려야 할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용하여야 할 사물은 우리 인간이 사람다운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연필은 글을 쓰는 목적에 기여하고 책은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목적에 이바지 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누리고 사랑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누려야 할 사물은 하나님 한 분 뿐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그 일에 합당하게 쓰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사물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그것에 탐닉하고 최종적으로 누리며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용할 양식을 두고 두 가지 극단을 경험하며 교회 역사를 지내왔습니다. 하나는 극단적 금욕주의이고, 또 하나는 극단적 방탕주의입니다. 

4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극도의 금욕과 절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복음의 정신이 아닌 그리스 철학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물질은 열등하고 정신과 영혼은 고등하기 때문에 육체를 천하게 취급함으로 영혼은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고양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그 속에서 맛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호리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음식에서 맛을 느끼는 것 자체를 죄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비성경적입니다. 

또 하나의 비성경적인 음식에 대한 태도는 그 맛이 호리는 감각에 취하여 무작정 자기 마음을 풀어버리고 방탕과 탐욕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몸을 위해 사용하여야 할 음식을 먹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분을 망각하고 음식 자체가 주는 맛에 취하여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자와 함께한 잠자리는 한 번에 결단하고 끊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음식은 그렇게 결단하고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몸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을 먹어야 하고 적당히 맛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과 또 한편으로는 식생활의 방탕에 흐르지 않으려면 이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양립하는데 이 경계가 애매하고 모호합니다. 그리고 나는 차라리 이 경계가 애매한 것이 즐거워 식욕의 노예가 되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극단적인 식생활의 방탕, 그 사이에서 어디엔가 우리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 복음적인 경건일진대 그것이 어느 지점일까요? 칼빈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다가 맛을 느끼게 되면 그러한 맛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리고 그 분께 감사하자. 그러니까 어떤 음식에서 맛을 느끼는 것을 죄악시 했던 금욕주의를 버리고 어떤 음식에 맛난 맛이 나면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정말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이렇게 맛난 음식을 주신 하나님, 그런 맛을 이 세상의 물질들 속에 주셔서 그것을 요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 뜻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지나치지는 말자. 지나치지는 말자. 그래서 그 음식에 입맛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 놓으신 그 거룩한 뜻과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극단적인 금욕과 극단적인 방탕 사이에서 이 음식은 우리의 몸을 위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하시는 이 질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노동을 통한 응답 

두 번째 우리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기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이 기도가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간절하게 울려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언제나 주시지만 우리의 떡으로 주실 때도 있고, 남의 떡으로 주실 때도 있다고 그렇게 주석하였습니다. 남의 떡으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로 자기의 힘으로 자립해서 양식을 얻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굶주림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누어 주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 결단을 요구하는 특별한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결핍한 세상 한복판을 흘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원들을 나누어 줌으로 그들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 궁핍한 세상에 두신 존재의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충분히 노동의 여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일용할 양식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진심으로 노동하고 양식을 받고 그 양식 중 남은 일부를 이웃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그 사람이 훨씬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 남는 양식들은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넘쳐 교회로, 교회 안에서 쓸데가 없어서 넘쳐 다른 보편 교회로, 다른 보편 교회에서도 쓸데가 없이 더 넘쳐서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난한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와 다른 대륙의 사람들에게로 그렇게 전달되어 가야 합니다. 


C.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일용할 양식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 부르심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대적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육신의 필요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인격적인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며 그 영적인 평화 안에서 그 분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III. 결론 

지난 한 해에 우리는 염려와 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태웠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때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우리의 마음을 더럽혀 신앙생활하기 힘들었습니다. 금년에는 하나님을 정말 잘 믿고, 그 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때에는 주신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무엇인가 모자라고 부족할 때에는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의지해서 하나님과 보다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용할 모든 양식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 생활 해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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