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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종류의 신앙 형태 (마 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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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신앙 형태 (마 3:5-10)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께로 나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형태에 관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 예배하러 모이는 사람들 중에서 크게 두 가지 신앙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메시야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러 먼저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요단 강에서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요한이 사역하고 있는 곳을 향해 몰려든 무리들 중에는 두 종류의 신앙 형태가 보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변화된 신앙이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바뀌지 않는 신앙의 소유자들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세례 받았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으로, 또는 요한을 살피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비단 요단 강가 뿐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온 무리들 중에도 변화된 신앙의 사람들과 바뀌지 않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두 종류의 신앙 형태를 살펴보고 우리 각자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순수한 동기와 불순한 동기

사방에서 요한을 찾아 나온 사람들은 요한의 메시지를 받고 자원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을 찾아 나선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구경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들의 발을 옮기게 한 것은 불순한 동기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 중에 그 동기가 순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순한 동기의 사람도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먼저 사방에서 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5-6절).

그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모여온 사람들입니다. 여기 ‘요단 강 사방’ 이란 요단 강을 중심으로 한 부근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동으로는 이두매와 북쪽으로는 갈릴리까지 포함한 모든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는 세례 요한의 선포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와 그 외의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의 복음 전도자들에게 많은 용기와 교훈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어 성경은 이들 지역을 주어로 하여 ‘그 지역들이 나아왔다’ 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역을 의인화(擬人化) 시킨 표현으로서 실로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아왔음을 보여주는 과장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유대’ 와 ‘요단 강 사방’ 앞에는 ‘모든(all)' 을 의미하는 ’파사(pasa)' 가 각각 붙어 있는데, ‘예루살렘’ 앞에는 이 단어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경우 유대와 요단 강 유역의 거주민들과는 달리 모든 주민이 아닌 일부만이 나아왔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 중에는 당시 세례요한에 대해서 회의적인 종교지도자들이 다수 있었음을 우회적(迂廻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 유대와 요단강 주변의 지역 거민들은 모두 요한에게로 나아올 정도로 요한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를 받았습니다. 

여기‘자복하고(엑소몰로게오)’는 죄나 허물을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지칭합니다.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중간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자발적으로 고백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순순한 동기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나 무리 중에는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나온 사람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7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을 향하여 신랄하게 꼬집어 말했습니다. 여기 ‘보고(이돈)’는 ‘주목하다’ ‘관찰하다’ 란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을 뿐 아니라 그들 마음속에 내재된 영적인 문제까지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구별된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행동으로도 거들먹거림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한 가운데는 자신들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영적 교만이 꿈틀거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에게서 불순한 동기를 발견하고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맹독성을 가진 뱀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악한 존재요(마 12:34)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마 23:33). 본문에서 요한은 세례 받으러 왔으나 세례 받을 마음의 자세와 자격이 없는 그들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세 종파가 있었는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에세네파가 그것입니다. 그중 바리새인(파리사이온)은 ‘분리된 사람’ 이라는 문자적 뜻을 지닙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성결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세오경의 율법 뿐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구전(口傳)을 신앙과 생활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문자적 의미에 고착되어 율법의 본질적 정신보다는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기준에만 얽매여 위선적인 신앙으로 흘렀습니다. 

한편 사두개인(삿두카이온)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삼하 15:24)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사독의 후손들과 그 추종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사두개파 사람들은 귀족 태생으로서 재산이 많았으며 산헤드린 공회의 다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들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로서 서민들과 유리된 생활을 하였고, 바리새인들을 적대시 하였으며, 전통과 구전의 권위를 거부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권위도 윤리와 관련된 문제에서만 인정하였고,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였으며(막 12:18, 행 23:8), 영혼의 불멸성과 천사·영들의 존재도 모두 부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정치·사상·사회적으로 모든 면에 일치된 점이 없었고 서로 대립의 관계에 있었던 집단이었으나, 한 가지 면에서는 같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이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들 안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요한은 자신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을 회개치 않는 그들을 세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로 규정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여러분의 숨은 동기는 어떻게 비취고 있을까요? 현대 교회는 예배에 대한 기대감, 감격이나 감동도 없이 언제나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서점가의 베스트 셀러 중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는 책이 있겠습니까?

우리 중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불순한 동기로 오신 분이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를 향한 경고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2. 진정한 회개와 형식적 회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에게 몰려온 무리 중에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진실된 회개 없이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으려는 무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요단 강 사방에서 나온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외치는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자원하여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와 그 외의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그의 선포는 광야에서 시작되었으나 순식간에 전이스라엘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선포는 성경이 예언한 대로 오실 메시야를 위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말씀을 받고 진정한 회개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교만한 마음이 깎여져 낮아졌습니다.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의 골짜기들이 말씀의 위로와 소망으로 채워졌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 때문에 꼬이고 구부러진 마음의 길들이 곧은 대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고 세례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요한의 사역이 예언대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요한의 주위에 이처럼 진정한 회개의 징표들만 있은 것은 아닙니다. 몰려든 무리 가운데는 진정성 없이 세례 받는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이들을 향하여 신랄하게 책망을 퍼부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절).

요한이 이들을 책망한 것은 단순히 구경하러 왔다는 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회개’ 가 없고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회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난 주일에도 생각했지만,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에 끝나지 않고 나아가 의지적으로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돌아서는 것입니다. 

요한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3장을 보면, 요한의 불같은 메시지를 듣고난 다음에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요한의 유명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11절). 평범한 대답입니다.

이 말을 듣던 세리들이 세례를 받고 싶어 와서 묻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이 대답합니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군인들도 와서 물었고, 이어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14절). 참 회개는 이처럼 일상 생활속에서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는 행동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감정적인 후회를 넘어 의지적인 행동을 포함합니다. 세례요한 앞에 구경하는 자세로 나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죄 지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이 우리나라에 와서 강연할 때 ‘한국 교회에는 미숙한 크리스천이 참 많은 것 같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많은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조차도 지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슨 거창한 종교 이론이나 신비 체험을 찾기 전에 먼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본적인 원칙부터 지킵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3. “아브라함 이름 아래 숨어 있지 말라” 

세 번째 대지는 결론적으로 불순한 동기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무리 중에는 순수한 동기로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세례 받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진실된 회개도 없이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요한에게서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책망 받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들었을까요? 9절에 보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가 바로 이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지도 않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이 결국 그들의 마음을 굳게 만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이방의 압제 속에서도 이 사실 하나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모든 고난을 이겨왔고, 그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은 도를 더하여 자기들만이 율법을 올바로 준수하는 백성이라고 하여 스스로를 동족으로부터 구별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 오늘날 예루살렘에는 극정통파(ultra-orthodox) 사람들이 메아쉐아림이란 동네를 이루고 살며 안식일이면 외국인의 접근을 불허합니다. 

이들의 음식 예법과 절기 규례는 철저하여, 예컨대 쇠고기와 햄이 들어간 피자는 절대 팔 수 없으며 장막절을 장식하는 종려나무는 돋보기로 나뭇잎을 세밀히 조사하여 약간의 흠만 있어도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정류장에서도 외국인이 앉았던 자리는 불결하다고 하여 앉지 않거나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앉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철저한 선민의식속에 살아가는 그들에게 '믿는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려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도 차츰 이러한 잘못된 선민의식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서 죄가 무엇인지도 알고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죄에서 자신을 돌이키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모태신앙’은 ‘못해 신앙’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신앙 생활 덕분에 이런 것도 알고 저런 것도 알면 주위 사람들에게 더욱 모범된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매사에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 그건 더더욱 못해’ 하는 ‘못해 신앙‘ 으로 전락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러분,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 큰 은혜를 받았을 때는 예배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눈물이 났고, 기도하려 하면 가슴이 북바쳐 올라오곤 했는데, 세월이 갈수록 신앙의 감격과 눈물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놀랍게도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 제 속에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일 예배 한 번, 십일조 한 번 빠트려보지 않았고 남의 것을 토색한 일 없고 고의로 불의한 일을 한 기억이 없는데, 이런 것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감격하는 눈물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너무나도 습관화 된 신앙생활이 신앙의 눈물을 메마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회개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상적부터 섬겨왔던 하나님, 습관처럼 계명을 지켜왔기에 더 이상 회개하려는 마음도 없었을뿐더러 회개할 것이 도무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중에는 교회 나오신지 얼마 안 되는 분들도 계시고, 신앙생활 꽤 오래 하신 분도 계십니다. 오래 신앙생활 하셨다고 생각하신 분들께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신앙생활 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흘렸던 그런 눈물이 지금도 있습니까? 그때 가졌던 감격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주님의 은혜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르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 것 같습니까?

아브라함 이름 아래 숨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화석화 되어가는 신앙의 줄기세포에 생명 DNA를 심어야 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앞에서 신앙에 두 종류의 형태가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세례요한에게 몰려온 무리 가운데 순수한 동기로 진정한 회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불순한 동기로 회개 없이 세례에 참여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세례 받고 감격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나가는 체인지업(change-up) 신앙의 소유자가 있는가 하면, 회개도 없고 눈물도 없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전혀 바뀌지 않는 이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있습니다.

두 종류의 신앙 형태 가운데 여러분은 어느쪽입니까? 체인지업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0절은 바뀌지 않는 신앙의 소유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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