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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를 위하여 힘쓰는 것 (골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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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위하여 힘쓰는 것 (골 2:1-7)


목사치고 자기 교회의 교인들을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 목사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교회 교인들도 그만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 모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목사님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다 예수 안에서 같은 천국가족이며 한 우주적 교회를 이루고 있는 택자인 줄은 잘 알지만 목사도 역시 사람인지라 자기가 구체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대상을 그처럼 크게 확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 예외라 할 만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한 교회만 담임하여 섬긴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때로는 몇 년간 한 교회만을 위하여 집중적으로 사역한 기간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특정 교회의 교인만을 아끼고 사랑한 목회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그가 자기와 직접적인 교분은 없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하고 있는 모든 초대교회들과 교우들을 향하여 그 얼마나 깊고 진한 사랑을 골고루 쏟고 있었는지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골로새교회 교인 역시 사도 바울의 그와 같은 사랑의 레이더 안에 포착되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본문 1절에 기록하기를 "1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골로새시가 라오디게아시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이란 바로 골로새교회 교인들과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을 함께 언급하는 말로서, 사도 바울이 이들을 직접 대면해서 만날 기회가 없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이제 로마로 끌려와서 연금 상태에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한 번 만날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놀라운 간증을 하고 있는데, 그처럼 직접 만나 보지도 못한 골로새교회의 교인들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무척이나 '힘을 쓰고 있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너희들을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나로서는 그 얼마나 애쓰며 노력하고 있었는지를 너희들도 알아주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힘쓰고 있었던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시 교역자들이 남모르게 뜨거운 눈물과 수고의 땀을 쏟아 부으면서 그 돌보는 성도들에게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주의 종들은 교인들이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믿음'을 가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본문 2절과 3절에 "2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힘쓰는 것'의 초점은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가 자나깨나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하여 멀리서나마 기도하고 또한 서신을 보내어 바로 가르치는 등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 기울였던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이 한 가지, 바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하는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위안을 받는" 것과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것들은 다 그 최종 목적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먼저 '위안을 받는 것'은 곧 '위로나 권면을 듣고서 심령이 평안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가 어떤 낙심이나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 '말씀'을 통해 격려를 받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것'은 성도가 서로를 돕고 섬김으로써 나누게 되는 교제를 뜻합니다.
실로 '성도의 교제'는 서로를 일으켜 줄 뿐 아니라 함께 교회의 지체가 되는 연합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한 위로'나 '성도 간의 사랑의 교제' 그 자체가 신앙의 최종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그냥 인생이 어려울 때 설교를 통해 조금 위안을 받거나 혹은 교인들끼리 만나서 그저 사교적인 교제를 나누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말씀생활'과 '교회생활'을 통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게" 되는 마지막 단계는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믿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교인들이 반드시 도달해야 할 신앙의 핵심이며 따라서 모든 교역자들이 교인들을 위하여 힘쓰는 사역의 목적인 것입니다.

여기에만 이르면 그 어떤 성도라 할지라도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교역자는 교인으로 하여금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만 확실히 가지게 해 주면 그때부터 그 교인은 그 주님께로부터 직접 무궁무진한 축복의 보배들을 자동적으로 공급받게 됩니다. 
반면에 이 마지막 고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이전의 과정들만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게 되면 항상 교역자들이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신경을 쓰고 돌봐 주어야 하는, 어리고 약한 교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선 교역자 스스로가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할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인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교역자의 대표적인 직무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어떤 교인이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길이 없는 큰 시험이나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큰 안위를 얻게 해 주는 것은 오직 교역자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사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존재 의의를 여기서 멈추어 버린다면 그 교역자는 '영혼을 돌보는 청지기'가 아니라 그냥 '카운슬러' 정도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역자에게는 모든 교인들을 교회 중심으로 서로 교통하고 한 마음으로 연합시켜야 할 직무도 있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불신 이웃이나 친구들보다 교회의 성도들과 더 자주 만나게 하고 서로 섬기게 만들고 함께 신앙공동체를 세우게 만드는 것 역시 교역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인들끼리 서로 잘 사귀고 친하게 지내게 만드는 것만으로 자기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교역자가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교회의 사환'이 아니라 그냥 '사람의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역자라는 직분은 그처럼 '사람을 기쁘게 해 주려는 심부름'이나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목자장 되신 주님께서 당신의 '잃은 양'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찾기 위하여 세우신 '구령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예수님 믿는 신자'로 만들지 못하면 그 교역자는 변명의 여지없는 실패자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은 잘하고 '대인관계'는 좋다 하더라도 불신자를 전도하여 예수 신앙을 고백하도록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 목사나 전도사는 어디까지나 '게으르고 불충한 종'일 뿐인 것입니다.

교인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교역자가 베푸는 '사랑'과 '도움'에만 얹혀서 사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아니 교역자들로부터 그런 '서비스'를 받는 것이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 쯤 되는 것으로 여기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평생토록 그야말로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약골 신자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교역자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교인이 되고 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초신자 시절에는 '교역자의 위로'를 통해 힘을 얻고 '성도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는 단계가 있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 안에서 모든 보화를 누리는' 영적 자급자족의 수준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종들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사랑과 정성과 눈물과 힘을 다 쏟아서 위로하고 돕고 섬기고 있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 모두를 한 명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는 신앙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 간절한 소원 때문인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의 종들은 교인들이 계속하여 '규모 있는 성도로 자라는 성화의 진보'를 보여 주기를 기다립니다.

4절과 5절에 기록하기를 "4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저 멀리 골로새교회를 생각할 때 한 가지 크게 염려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공교한 말로 속이려" 하는 이단이었습니다.
골로새서 전체를 살펴보면 당시 골로새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의 무리들이 몇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바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놓으신 대속 사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 예를 들면 '음식이나 절기에 관한 규례'들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이단이었습니다.
또한 '영지주의'로 알려진 이단도 있었는데, 그들은 교인들 가운데 특별한 몇 사람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어떤 신비한 영적 비밀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네들이 바로 그와 같은 영적 엘리트라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금욕주의자'들이라든지 '천사 숭배론자' 등 여러 종류의 이단들이 그들의 '공교한 말'로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교인들이 그따위 이단 사설에 간단히 속아 넘어가는 약골이 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그들로부터 "육신으로는 떠나" 있었지만 "심령으로는 함께" 있으면서 그 골로새교회 교인들이 그런 '공교한 말'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확실히 믿게 만들기 위하여 온갖 노력과 방법을 다 동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결과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규모"와 "굳은 것"을 보게 되는 기쁜 결실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부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규모와 굳게 선 것"이라고 어순을 바꾸어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서 '규모 있고도 굳세게' 나타났던 것이었습니다.
이 '규모'(orderness)라는 단어와 '굳게 섬'(firmness)이라는 단어는 둘 다 군사 용어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어떤 전투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승리할 수 있는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평소에 그 군기가 정연하고 그 사기가 든든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 역시 평소부터 그처럼 영적 기강이 바로잡히고 신앙생활의 바탕이 탄탄해야만 이단과 같은 마귀의 공격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향하여서도 늘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시험 앞에서도 질서와 화평을 지켜낼 수 있는 교회를 만들고 싶은 것은 오늘날의 목회자들 역시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공통의 소원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교회의 현실은 그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나 '영지주의' 혹은 '금욕주의'와 '신비주의' 등의 이단들은 형태만 다르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오히려 초대 교회 시절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수많은 종류의 이단들이 바로 같은 동네 안에만 해도 손가락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세워져 있습니다.
  
게다가 '철저히 자기 위주의 신앙생활'을 지향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교회생활'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현대 교인들의 사조는 더욱 교회의 기본 조직과 구조 자체를 취약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 결과 어렵게 전도해서 간신히 모아 놓은 교인들을 '가만히 들어와 있던 몇 사람들의 공교한 말' 때문에 한꺼번에 수십 명, 수백 명씩 이단에게 빼앗기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말씀으로 가르치고 기도로 키워서 이제 좀 믿음직한 교회의 일꾼으로 자기 몫을 해 주어야 할 교인들이 오히려 목사의 목회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압력단체'를 형성하면서 교회를 안에서부터 뒤흔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교역자는 평소부터 교인들을 영적으로 '규모 있게' 훈련시켜야만 합니다. 
신앙고백을 했다고 해서 '자기 양심'이 진리인 줄로 착각하고 '자기 열심'만 의로운 줄 아는 교인이 되지 않도록, 개혁주의 신앙 진리의 더 깊은 것들까지 하나하나 다 철저하게 '성경중심'으로 가르치고 배워야만 합니다.
진정한 기독신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후에 자기 혼자서 각개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두세 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게 되어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신앙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유지시키기 위한 '질서'가 정연하고 '기반'이 탄탄해야 하는 것을 철두철미한 '교회중심'의 생활로써 익혀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의 사명은 교인으로 하여금 '예수 신앙'을 고백하게 했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 신자로 하여금 도중에 실족하거나 파선하지 않고 계속하여 '성화의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야 합니다.
이런 교역자들의 교훈과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신행일치의 삶이 날이 갈수록 더욱 '규모 있고 굳게 서게 되는' 모습을 '기쁘게 보여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의 종들은 교인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감사생활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본문 6절과 7절에 기록하기를 "6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절들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전체적으로는 바로 앞 절에서 말했던 두 가지를 반복 강조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고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은 바로 첫째 요지에 해당됩니다.
뭐니 뭐니 해도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깨닫고' 그 후에 그 안에서 "행하는 것" 즉 그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이요 제1단계인 것입니다.
  
그 후에는 어떤 시험에도 끄떡없도록 '규모 있고 확고부동한' 신앙의 장부가 되는 과정, 즉 성화의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 교훈대로" 즉 말씀을 통해 교육받은 대로 "그 안에 뿌리를 박는 것(rooted)"이나 "세움을 입는 것(built up)"이나 "믿음에 더욱 굳게 서는 것(firmly established)"들이 다 바로 그 두 번째 단계를 표현만 달리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새롭게 첨부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일 끝에 나오는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사실 앞에 나오는 말들을 전체적으로 수식하는 말에 해당됩니다.
즉 다시 번역하자면 "너희들은 감사가 넘치는 가운데서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고 믿음에 더욱 굳게 
서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생활이야말로 성도가 일단 영접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하고 어떤 시험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강건한 신자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필요한 촉매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꾸어 말하자면, 항상 감사가 넘치고 있는 성도에 대해서는 교역자가 그의 신앙의 진실성을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고 그의 성화 성장 역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감사가 나타나지 않는 교인은 그야말로 아주 '취약성 많은' 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언제 쉬 사라질지 모르는 것이고, 그 교회생활이라는 것도 약간의 시험만 닥쳐도 금세 넘어지기 십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향한 소망을 말하면서 이 '감사생활'을 마지막으로 강조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마음으로 그리고 물질로 감사드릴 줄 아는 것은 이미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를 통과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장 건전하고 아주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잘 깨닫고 믿고 있는지' 목사가 그 마음속에까지 들어가서 살펴 볼 수는 없습니다.
교구의 교인들이 앞으로 혹 닥치게 될지 모르는 시험 가운데서도 유연하게 잘 대처하고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규모 있는 신자로 자라고 있는지'를 전도사가 매일 뒤를 쫓아다니면서 체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교인이 평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과 정성이 어떠한지를 보면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상을 당한 교인의 가정에 위로예배를 드리려고 갔을 때 그 유가족이 인간적인 슬픔 중에도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위로와 천당 소망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면 심방을 갔던 교역자가 오히려 은혜를 받고 오게 됩니다.
처음에 만났을 때에는 주일헌금조차 인색하기만 하던 교인이 이제는 십일조는 물론이요 수시로 감사헌금을 구체적인 감사 제목과 함께 기쁨으로 바치는 것을 보게 되면, 그 교인의 신앙생활 모두가 다 형통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교인들을 보게 될 때 목사나 전도사는 그야말로 용기백배, 사기충천하게 됩니다.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희열과 보람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리는 것'이야말로 교역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요 칭찬이요 격려요 상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교역자에게 감사의 인사치레를 차리는 것이나 무슨 선물을 주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역자의 희생과 눈물이 여러분의 올바른 신앙의 정립과 착실한 성화의 진보를 통하여 열매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명백하고 확실하게 증거해 주는 '넘치는 감사생활'을 꼭 나타냄으로써 주의 종들의 마음을 정말 '시원케' 해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 교인을 향하여 그와 같은 간절한 세 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깨닫는 믿음, 규모 있고도 확고부동한 성화의 진보,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증거해 주는 감사생활 – 그는 '육신으로는 떠나 있지만 심령으로는 늘 함께 있던'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서 이것들이 꼭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나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가르칠 때나 항상 최선을 다해 '힘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를 위시하여 우리 경향교회의 모든 교역자들이 여러분을 위하여 '힘쓰는 것' 역시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교역자들은 여러분의 육신적 어려움을 돕기 위하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역자를 사회사업가처럼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역자들은 여러분의 심심풀이 대상도 아니며 화풀이나 할 상대는 더욱 아닙니다.
여러분은 '주의 종'으로서 섬기는 교역자를 그처럼 '자기 종'처럼 여기는 죄를 무심코라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목사와 강도사와 전도사들은 오로지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중매하기 위하여 주야로 노심초사하고 자기 인생 전체를 '한 알의 썩는 밀알'처럼 바쳐 섬기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 교역자들은 여러분들이 늘 교역자를 통해서 위로만 받고 성도를 통해서 사랑만 받는 '만년 새 신자'로 끝나지 않고, 여러분 각자가 꼭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깨닫고 믿어서 그 분께로부터 직접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얻을 줄 아는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주일예배 출석마저 빼먹기를 예사로 하고 약간의 시험에도 아예 믿음에 파선해 버리는 '초보'에서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고, 이제는 좀 규모 있는 경향인, 좀 믿음직한 동역자로 성장하는 '성화'의 진보를 나타내기를 기다리면서 오늘도 여러분을 위해 가르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인 등록은 되어 있지만 도대체 정말 신앙이 있기는 있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 '이름뿐인 교인'이 아니라, 감사의 찬송과 감사의 기도와 감사의 간증과 감사의 헌금을 통하여 진정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거워할 줄 아는 '신전인격자'인 것을 보여 줄 때에 저와 우리 모든 경향의 교역자들은 더더욱 '죽도록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달아 아는 신앙생활, 규모 있는 교회중심의 성화생활, 기쁨과 정성이 넘치는 감사생활을 통하여, 이 '주의 종'들의 사역에 많은 격려와 힘을 더해 주며 자신의 영혼 또한 이들이 섬기는 경향초장을 통하여 더욱 만족과 풍성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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