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려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창 12:10-20)

첨부 1


어려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창 12:10-20)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든지 꿈쟁이들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꿈쟁이들을 그 시대에 세우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대신하게 하십니다.  캄캄할수록 한 줌의 작은 빛이 소중하듯이 지금 우리의 세월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꿈과 비전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만 드리지 마시고 꿈을 꾸십시오.  그래서 이 전에 올 때의 꿈과 갈 때의 꿈이 달라져야 합니다.  올 때의 환상과 갈 때의 환상이 달라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정말로 소란한 시대에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어둡고 거친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 삶이 어떻게 변해 갈지, 내 앞 길이 어떻게 변해 갈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희망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내 삶에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찾는 것은 어딘가에 내 삶에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이고 지극히 이기적 풍토로 마음의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21세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두운 밤에 험한 파도와 싸워야 하는 선원들의 심정과 같습니다.  캄캄한 밤에 그 사나운 푹풍 속에서도 선원들은 저 멀리 번쩍이는 등대를 찾습니다.  그들은 갑판 위에 올라가서 저 멀리 등대를 찾습니다.  등대를 찾으면 몇 일 동안 지치고 시달려서 아무 힘도 쓸 수 없던 사람들에게 기적 같은 무서운 힘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세상 속에서 등대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세상 속에서 힘을 다 잃어버렸다고 할지라도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신으로 권능의 채움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가는 것과 같은 새 힘을 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캄캄할 때는, 정말 어디가 방향인지 모를 때는 전망대에 올라갑니다.  거기서 내려다보면 방향이 보입니다.  교회가 바로 인생의 전망대입니다.  여기에 오면 아무쪼록 여러분의 방향이 보이게 될 줄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속도보다도 바른 방향이 중요합니다.  속도를 내는 일 보다도 바른 방향을 잡는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의 바른 방향을 잡으러 이곳에 왔습니다.  오늘은 하나님 앞에 숨겨진 흥분된 미래를 언제든지 기대할 기회가 있습니다.  내 생애에는 아직도 숨겨진 흥분된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 산지를 내게 주시옵소서."  갈렙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면서 400년 동안 조상의 전설처럼 내려오던 그 산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그가, 아무 능력도 없는 그가, 아무 미래도 없는 그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산지를 내게 주시옵소서."  비전을 향한 그의 기도는 그대로 응답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꿈의 사이즈는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꿈의 사이즈를 갖고 있습니까?  조그마한 꿈의 사이즈를 가지고는 인생의 험난한 고비를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험난한 언덕길에서 낡고 조그마한 차는 겔겔겔하면서 힘들게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험난한 인생 길에서는 우리 꿈의 사이즈가 적으면 물러서고 맙니다.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의 꿈이 일년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꿈이 3년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꿈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꿈이 10년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꿈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꿈이 일평생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것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끝없이 볼 수 있는 기술, 그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오늘 이 시간 아무쪼록 믿음의 부자가 되십시오.  믿음으로 환상의 날개를 다시 펴십시오.  쉽게 이야기하면 꿈을 꾸십시오.  종교 행위를 하지 마시고, 앉았다가 그냥 가시지 마시고, 중언부언하지 마시고 꿈을 꾸십시오.  다시 그 상황에서 꿈을 꾸십시오.  꿈이 없으면 사람이 방자해 집니다.  꿈이 없으면 사람이 무너지고 맙니다.  꿈이 없으면 사람은 멸망합니다.  꿈이 없으면 사람이 난폭해집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후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다."  다른 성경 번역에서는 "능력 있는 분이 나를 위해 큰 일을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리아를 위해 큰 일을 행하셨던 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도 큰 일을 행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신다."

"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꼭 붙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도 실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신앙과 삶이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당황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에는 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수 백 번도 더 고백을 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내 인생이 거대한 여리고성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원망하고 절망합니다.  더구나 경제적인 문제 앞에 서게 되면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어느 날 경험했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본문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그래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농경 시대에 기근이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타격입니다.  그것은 경제 생활의 마비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경제적인 충격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외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치고 경제적 타격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삶에 이런 경제적인 충격이 다가올 때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맞이하느냐?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경제적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역으로 그가 해야만 했었던 일들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아브라함의 인생의 교훈을 우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경제적 시련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다가올 때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은, 그는 그의 삶의 자리를 쉽게 옮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삶의 자리를 쉽게 옮기지 말았어야만 했습니다.  본문 10절을 다같이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사실 그 자체를 지나치게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내려간 사연과 배경은 좀 다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매우 일관성 있는 신앙의 어떤 행진을 뒤집어 버린 사건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서 12장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올 때에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서 왔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나안에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오자마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땅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금 어려움이 생겼다고, 기근이 생겼다고 쉽게 포기하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도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도피는 아브라함만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당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 앞에 부딪치면 하나님의 뜻을 묻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 보다 너무나 쉽게 삶의 현장에서 도피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신앙의 자리에서 불신앙의 자리에로 도피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도피할 때 거기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이 땅에 살기를 원하신다면 왜 이런 어려움이 찾아오는가?"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의 뜻은 저 아래 애굽 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면 인생의 길은 만사형통해야 한다.  이것을 기독교인들의 신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살아갈 때에 환난이 있을 수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왜 환난을 주시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환난 때문에 우리가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계속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소간의 장애물을 삶의 현장에 지속적으로 허용하시는지도 모릅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을 떠나 페르시아라는 나라에서 출세하여 장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조국 이스라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넉 달 동안을 기도하고 아닥사스다 왕을 찾아가서 고국으로 돌아가 성을 쌓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허락을 받아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느헤미야서에 보면 여호와의 선한 손이 나를 축복하셔서 왕이 나를 허락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기쁨과 감격으로 조국으로 가서 예루살렘에 성을 쌓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만사형통 했습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을 시작하자마자 수많은 어려움이 생깁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시작하자마자 느헤미야는 장애물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장애물 때문에 느헤미야는 더 엎드려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과업을 완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현장에 불어닥친 풍랑, 경제적인 시련, 그 밖의 어떤 시련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도피하십니까?  아니면 너무나도 쉽게 불신앙의 자리에로 옮겨가십니까?

우리는 주님의 뜻을 찾기 보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 보다 단순히 어렵고 불편하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나 쉽게 삶의 자리를 옮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실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이 배웠어야만 했었던 교훈은 무엇입니까?  삶의 자리를 너무 쉽게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여기 서서 이 장애물과 대결해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삶의 자리를 너무 쉽게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어려워도 신앙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배워야 할 두 번째 교훈은,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았어야만 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실패하기 시작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고와 판단이 마비됩니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됩니다.  인생의 방향이 흔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매사에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란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마는 1930년에 미국과 세계가 경제 대공황을 겪었습니다.  그 당시에 수많은 미국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그들의 미래를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대공황 중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서 실의에 빠져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그 장애물에 다시 대결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었던 유명한 연설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  이 두려움을 빼고서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만큼 두려움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동을 마비시키고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바로 그 경우에 빠진 것입니다.  그가 비틀거리면서 "어렵다. 애굽으로 가면 좀 나을까?" 이런 생각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자 마자 더 커다란 함정 속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아내가 이뻤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이쁜 아내를 탐낸 나머지 자기 목숨까지 노리지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내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여보, 사람들이 당신에게 나하고의 관계를 묻거든 내 누이라고 그래."  그리고 13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표준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소위 그래도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이 치졸한 모습을 보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믿음의 조상이 말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니까 바로가 사래를 취한 후에 아브라함을 잘 대접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양 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남녀 종과 낙타까지 얻었다고 했습니다.  저 살자고 아내를 팔아먹는 이 남자를 바라보는 사래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의 변명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아내의 관계는 배 다른 이복누이 관계입니다.  창세기 20장 12절에 보면 "저는 나의 이복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계모의 딸이 바로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는 누구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까?  누이하고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과거야 어쨌던 현재는 아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아내에게 자기와의 관계를 감추고 누이라고 말하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아브라함과 같은 실수가 나에게는 없다고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미국에 '찰스 스윈돌'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이 한 번은 주일날 설교를 하다가 "우리 크리스천들은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교통신호도 정확하게 지키십시오."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이 목사님이 차를 몰고 집으로 가면서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빨간 불에 지나갔습니다.  "내가 빨간 불을 지나갔구나" 생각하면서 지나가는 순간, 감이 이상해서 옆에 보니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아, 우리 교인들이로구나. 내가 설교를 해놓고 내가 어기고…"  그래서 그냥 쳐다보지 않고 엑셀레이터를 밟고 얼른 집으로 와 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얼마 전에 차를 몰고 어디를 지나가셨죠?  내일 한 번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목사님 그냥 점심이나 같이 하시지요?"
"교인들이 아마도 따지자고 나를 만나자는 모양이다.  내가 설교한 것을 실천하지 않았다고 단단히 따질 모양이다."  한참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다가 "그러자고 만나자고" 그래서 이튿날 점심 시간에 약속된 자리로 갔습니다.  이 목사님이 굉장히 유머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약속 장소에 목사님이 나타났는데 목에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팻말을 걸고 나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교인들이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환영을 하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더니 목사님이 갑자기 뒤를 돌아섰습니다.  뒤에도 무얼 걸고 있었는데 보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나를 치라."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처하게 되면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잠언 29장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려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런 실수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잠언에, 아니 잠언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강조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두려워할 수 있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상황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 루터와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권과의 싸움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그 이상의 싸움이었습니다.  유럽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카톨릭과 단신의 루터가 어떻게 그 대결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보름스의 재판정에 소환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가면 너는 죽음이다.  네 파문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네 책은 이단의 책으로 이미 다 불살라졌고 너는 끝이다 가지 마라."

그날 밤, 루터는 깊이 기도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봤을 때 그 이튿날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보름스로 가겠다."  친구들이 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그러나 그는 "저 보름스에서 저 보름스의 재판정의 기왓장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악마들이 나를 기다린다 해도 나는 기어이 가겠다."
그러면서 갔습니다.  그리고 재판정에 서서 이단의 교리를 시인하라고 말하는 재판정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여 있나이다.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는 달리 말할 수가 없나이다. 오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두려워했던 베드로는 계집종이 두려워서 예수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그는 대제사장과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배워야 할 세 번째 교훈은 아브라함은 제단 쌓기를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제적 시련이 올 때, 인생의 어려움이 올 때 우리는 무엇보다 제단 쌓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가 애굽 땅에 밀려났을 때 기도한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를 바로가 데려가려고 합니다.  기도했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그가 제단을 쌓았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정말로 기도가 필요했던 순간에 아브라함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기르는 새 가운데 '비서 새' 라고 불리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아주 이상한 새입니다.  평소에는 아주 잘 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공격하고 있다고 위험을 느끼기 시작하면 날지 못하고 땅을 깁니다.  정작 날아야 할 때에 날지 못하는 새.  내 삶의 현장에서 정말로 간절히 기도가 필요할 때에 기도하지 못하는 나.  그 새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지 않습니까?  그 꼴이 내 꼴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기도가 필요한 시간에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찬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배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다시 제단을 쌓게 되는 줄 아십니까?  창세기 13장 1절에 보면,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아브라함이 애굽을 떠나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그 다음에 3절 보면,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리고 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전에 제단을 쌓았던 벧엘, 가나안 땅 벧엘에 와서 거기서 비로소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애굽 땅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제단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절실하게 제단이 필요했던 그 시간, 기도가 필요했던 그 시간, 찬양이 필요했던 그 시점에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아브라함 가족을 보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사실이 왔습니다.  아내가 예쁘니까 애굽 왕 바로가 그의 아내를 궁중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여인이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을 바로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신 것입니다.  왜 보호하셨을까?  이 지경의 아브라함, 이런 모습의 아브라함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호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본문 17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께서 누구 때문에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고 했습니까?  사래 때문에….  아브라함이 형편없이 흔들리고 실수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니까 그 부인 사래가 안 되었더라는 겁니다.  사래를 보시고 사래 때문에 하나님이 그녀를 보호하시고 오히려 그 환경 속에서 지켜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보면 기도하는 아내의 덕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자 분들은 자기들이 잘 해서 집안이 무사한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잘 살아준 아내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저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부족함,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이 가문을, 아브라함을, 사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보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창피를 당합니다.  이 기막힌 광경을 보십시오.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오늘 식으로 바꾸어서 말하면 바로는 Non Christian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넌크리스찬인 바로가 크리스천인 아브라함을 불러놓고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거짓말을 하고 나를 이런 궁지에 빠뜨렸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럴 수가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세상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당신이 어떻게 거짓말을 합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세상을 향해서 외쳐야 할 사람이 오히려 거꾸로 책망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세상 앞에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의 모습….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럴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자리에 설 수가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기도했었더라면, 하나님을 붙들었었더라면, 그리고 주님의 인도를 구할 수가 있었더라면 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 창피를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시련이 닥쳐오고 경제적인 충격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그럴 때일수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찬양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예배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봉사도 더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후퇴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오면 잠시 신앙을 접어두려고 합니다.  잠시 헌신과 사역을 접어두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그래서 영원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그때 마귀가 와서 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을 합니다.  그 분은 그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그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서 견디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떡이 부족한 순간에 떡 때문에 비굴하고 떡 때문에 죄 짓지 아니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수가 있다는 것, 이것은 더 높은 가치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이런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망해도 거짓말하지 않겠다.  망해도 내가 예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망해도 나는 하나님을 붙든다.  이런 자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다보면 생활이 어려워지고 시련을 당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제단을 허물지 마십시오.  더 기도하십시오.  찬송을 부십시오.  더 열심히 주께 봉사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승리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마지막 승리를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정황이 어렵고 힘들고 아플지라도 저와 여러분이 함께 주님을 붙들고 제단을 쌓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봉사자의 모습으로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