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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제의 회복과 열정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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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의 회복과 열정 (행 2:42-47)


우리가 어릴 때 누가 겁을 주면 얼른 엄마나 아빠 뒤로 숨지 않았습니까? 폭풍이 불어와 빗소리가 망치소리처럼 지붕을 때리고, 하늘에 번갯불이 번쩍 거리고, 천둥이 지축을 울려도 우리는 엄마 아빠가 함께 있는 집에서 편안히 보호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올 한해도 정말 만만치 않은 한해를 우리가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패자로, 또는 낙오자로 살아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다윗은 시91:2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고 자신이 살아갈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승리의 비결은 바로 전능자가 만들어 주신 피난처에 있으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다윗이 말하는 전능자가 마련해 주신 피난처 아래 있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이거나 교회 생활을 무척이나 열심히 하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홀로 기도하기를 힘쓰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이 한해 주의 주시는 축복으로 하는 일마다 형통한 삶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권위에 정말 복종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자기 진단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보십시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행 2:44-46절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당시에는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서로 필요에 따라 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줍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저 사람이 채워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기심이 완전히 사라지고, 욕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가치관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 도대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괄시를 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 가지지 못한 아픔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해도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실패자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고 또 자신들이 그토록 의지하던 예수님 마져도 십자가에 달려 허무하게 죽는 이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삶의 기대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기도 속에서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누리기 시작 합니다. 무엇보다 한동안 주님의 말씀을 잊고 살았던 자신들을 발견합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이렇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요 13: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성도끼리 대충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탁이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자신을 팔아 버리고자 한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품에 안아주신 일입니다. 그가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음에도 그에게 여전히 만찬의 식탁에서 그에게 사랑의 잔을 건네어 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느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자기 목숨을 내주실 만큼 사랑하셨잖아요? 이 사랑을 비로서 성령이 기도하는 그들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가진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미련없이 나누는 사랑의 교제의 삶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쭉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살펴보면 예수님은 대단히 솔직하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믿으면 너희들도 핍박받을 것이다.' 하는 말을 듣고 예수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너희들이 생명을 내 놓고 죽을 각오를 하지 아니하면 나를 좇아 올 수 없다. 너희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 와야 된다. 

이 길은 좁은 길이다. 이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런 말을 듣고서도 예수 믿고 주님 따라 갈 사람이 있겠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도 예수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를 져라. 나의 가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자기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를 수 없느니라.' 대놓고 주님께서는 예수를 믿으면 핍박당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얼마나 솔직하신지 모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물러갈까 싶어 겁이 나서 하나님의 진리를 적당하게 포장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15:19,20절에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 세상이 너희를 절대 핍박하지 않는다. 

제 새끼 미워하는 부모가 없듯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지만'.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 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주님은 숨기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것, 그 소중한 소유를 아낌없이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는 교제를 실천을 한 것입니다. 

오늘 이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이 흔드는 그 어떤 세력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때 묻지 않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 믿음, 첫 사랑을 가지고 성령 충만해서 시작한 교회요, 몇 천 명이나 되는 성도들의 공동체였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아름다운 신앙의 교제를 하고 있는 공동체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만나면 행복해서 못 견디고, 헤어지면 서로 보고 싶어서 하루를 못 넘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들끼리 너무나도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든, 집에서든,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항상 주변에 믿음 좋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여기 42절을 보세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여기 교제란 말을 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onia)'라고 하는데,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너무너무 중요한 단어입니다. 고후13:13절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예배를 마칠 때, 마지막으로 드리는 축복기도가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 ‘성령의 교통’이란 말씀에서 ‘교통’이란 원어로 ‘코이노니아(Koinonia)'를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공동체는 소통하는 공동체입니다.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가장 큰 화두 중의 하나가 ‘소통(疏通)’입니다. 소통의 사전적인 의미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혹은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입니다. 교회는 많은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이, 성, 출신지역, 학력, 직업, 경력, 취미, 가족상황, 소유정도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말씀 앞에 자신들을 겸손히 복종 시켜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나를 부르신 그 거룩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삶의 초점을 맞추어 나가기를 시작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사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소유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옳은 데로, 바른 데로 쓸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근사한 사람 아닙니까? 무엇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고 아름답게 시행되었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한 공동체가 얼만큼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어떤 유형의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느냐와 매우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꿈이 없는 공동체, 비전이 없는 공동체는 결국 후퇴하고 점점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현대인들은 교회 생활을 해도 소속감이 없이 주일 예배 중심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제일 당황하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고난이 찾아 올 때입니다. 어쩔 줄을 모릅니다. 가족 중 초상이나 질병 사고를 만날 때 비로소 공동체를 떠난 그 소외와 고독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고난에서 당당하고 여유있게 승리하는 이웃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대부분 교회 공동체에 깊이 헌신하여 나눔의 지체로 살아가시는 성도들입니다. 

지난 번 에베레스트 산을 원정하다 죽은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산에 올랐던 산악인 엄홍길씨를 알 것입니다. 그는 고생 끝에 1년 동안 설온에 묻혀있는 시신을 발견했지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유품만 챙기고 하산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치루었던 희생 역시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원정대의 후원자였던 한 회사 회장이 현장에서 고산병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리만큼 어리석어 보이지 않습니까? 단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그렇게 포기한다는 게 우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해서라도 가야했던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 의식'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과 비난을 면치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가치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포기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구속의 은총으로 용서받고 구원을 얻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지, 그러고 있는데 나처럼 그렇게 구원 받은 사람이 또 있는 거예요. 성씨만 같아도 그렇게 할 얘기가 많고, 대학 후배를 만나도 가슴이 찡하는데, 그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끼리 만났으니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합니까?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이 자동으로 실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의 본질입니다. 이 성도의 사랑의 교제는 교회의 증표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마땅히 나타나야 할 현상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 13: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거꾸로 돌려서 말하면, 즉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랑의 성도의 교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교회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성도를 보고도 사랑의 감정이 찡하고 통하지 않는다면, 서로간에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공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성도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권리를 주님께 이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소유에다 목숨을 건 곳 아닙니까? 겉으로는 다른 말로 멋있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종착역에 도달해 보면 돈입니다. 돈 문제가 걸려 있으면 부모도 필요 없고, 형제도 필요 없고, 친구도 필요 없습니다. 사생결단하고 달려드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해로 찾아오는 영혼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가치관이 바뀌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치관이 전혀 바뀌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겉모습으로는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깊숙이 파고 들어가 보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욕심이 꽉 차 있습니다. 말로는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아직 내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모을까에 집착합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힘으로 돈을 모으는 것이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돈을 모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진정 구원받고 성령 충만한 자는 이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는 법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며 자족(自足)합니다. 언젠가는 다 두고 떠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게 되면 이전에 보아지 않던 가난한 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도움이 필요로 한 자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내가 애써 모아 놓았던 지금 통장을 과감하게 엽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라고,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기 이런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하는 초대 교회를 보십시요!! 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가 폭발적인 부흥을 하게 됩니다. 이 은혜 앞에 선 예루살렘 교인들은 아름다운 코이노니아를 통해 당당히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히려 행5:42절에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는” 삶으로 한 시대를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갇혀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제 선장 되신 예수를 모시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가지고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한사람, 한 사람을 볼 때 부족한게 있을찌라도 우리는 한 지체입니다. 진정한 교제는 희생과 사랑이 없이는 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북 캘리포니아주에 가면 레드우드(Redwood)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나무들 중에 가장 큰 나무일 것입니다. 어떤 것은 나무 둘레가 수십 미터나 되고 키도 수백 미터나 되는 것도 있습니다. 수명도 2,500년이나 된 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나무들을 보면 뿌리도 크고 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나무의 뿌리는 그렇게 크지도 깊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무들은 비바람이 불고 폭풍이 몰려와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데 그 비결은 나무의 뿌리들이 옆에 있는 다른 나무의 뿌리와 서로 잘 얽혀져 있어서 서로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레드우드처럼 세우셨습니다. 이 험한 세상, 환난과 핍박, 유혹이 많은 이 세상을 나 혼자 살게 하지 않으시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의지하고 붙들어 주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룬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롬12:5절에 보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해야 합니다. 

김창옥 씨가 쓴 책 ‘소통형 인간’에서 “통(通)하지 않으면 통(痛)한다”고 역설합니다. 소통하지 못하면 우리는 고통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정의 비극도, 교회의 갈등도, 사회의 방황도 결국은 소통의 문제인 것입니다. 나는 우리 동성교회가 정말 살맛나는 아름다운 교회, 서로를 이해하고 머리되신 주님만을 높이는 복 된 교회, 그래서 우리의 섬김이, 우리의 교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드러나서 온 땅에 생명의 향기를 발산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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