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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만큼 사랑하심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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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사랑하심 (요 3:16)
   
지난주에 많은 분들이 ‘남극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셨을 것 같습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운을 받아 보았습니다. 황제 펭귄은 남극의 가장 추운 곳에 모여 번식을 위해 짝짓기를 합니다. 짝짓기를 한 후에 암컷은 50일 후에 알을 낳습니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알을 자신의 발등 위에 올려놓고 몸으로 감싸 영하 6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알을 부화시킵니다. 수컷이 알을 품기 시작하면 암컷은 먹이를 찾아 먼 바다로 떠납니다. 암컷이 떠난 후에 수컷은 그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새끼를 부화시키고 새끼 몸에 털이 날 때까지 키웁니다. 그 과정이 눈물겹도록 감동적입니다. 

수컷은 알을 부화시키고 새끼를 키우는 4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며 서서 영하 50-60도의 혹독한 추위와 싸웁니다. 먹는 것이라고는 유일하게 간신히 허리를 굽혀 쌓인 눈을 먹음으로써 수분을 섭취할 뿐입니다.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면 수컷은 자신의 위에 남겨 둔 황제 밀크라고 불리는 음식을 토해 새끼에게 먹이기 시작합니다. 

수컷은 4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지칠 때로 지치고 약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위에 남겨둔 먹이를 토해 새끼에게 줍니다. 수컷이 실수라도 해서 알을 제대로 품지 못해 강추위에 1-2분 정도 알이 노출되면 순식간에 얼어버립니다. 수컷은 얼어버린 알을 안타까워하며 그래도 품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알에서 부화한 새끼가 잘못돼 얼어 죽으면 죽은 새끼를 발등위에 올려놓고 품습니다. 새끼를 잃은 펭귄은 안타까워하며 알 만한 크기의 눈덩이를 알로 착각해 품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황제 펭귄이 새끼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정말 눈물겹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한 주 동안 묵상한 말씀이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한 구절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성경 전체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말씀으로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황제 펭귄이 새끼에서 보여주는 사랑이 서로 연결되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한 구절 안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세상’ ‘사랑’ ‘독생자’ ‘믿음’ ‘멸망’ ‘영생’ 

천지를 창조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하나님을 버리고 악을 행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향해 놀라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할 때 쉽게 ‘이처럼’이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이라고 강조하며 읽어야 합니다. ‘이처럼’이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황제 펭귄이 새끼에게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면서 이 말씀의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을 강조하면서 읽어야 할 이유는 세상은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 온 정성을 다해서 지으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시면서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스스로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특히 사람을 지으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노래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에덴을 만들어 주셨고, 그들을 위해 모든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거역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온갖 악을 행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져갔습니다. 세상, 즉 사람들이 그렇게 악한 짓을 하며 하나님께 아픔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는 세상의 모습이 오늘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히틀러에 의해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일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여는 사건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현장에서 불과 십 미터 거리에 독일군 장군들이 춤을 추며 밥을 먹었던 식당이 있습니다.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며 비명 소리가 들리는데 바로 그 곁에서 춤을 추며 파티를 했습니다. 철학의 대가들과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성인들이 가득 차 있었던 독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 그리고 양심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입니다. 

저는 요즘 언론에서 크게 보도하고 있고 그것을 보면서 온 국민이 가슴 아파 하는 청소년 왕따 사건을 보면서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저렇게 악한 생각과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과 악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악함은 나이를 불문하고, 문화를 불문하고, 시대를 불문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비추어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당했던 것처럼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그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을 헌신하는 길입니다. 16절 중반에 있는 ‘독생자를 주셨으니’입니다.  

여기 16절 중반에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주셨다’ 라는 표현을 한글 성경이 너무나 단순하게 번역을 해 주고받는다 할 때의 그런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셨다’는 표현 안에는 ‘쏟아 붓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립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사랑을 주셨는데 그 사랑이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신을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을 담아서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이처럼’이란 도대체 어떤 뜻을 담고 있습니까? ‘이만큼’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삼아 십자가에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실 만큼 ‘이처럼’ ‘이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이 십자가의 형벌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벌은 천인공노할 가장 흉악한 죄에 대한 분노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와 같은 죽음의 고통은 죄를 지은 우리들이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고통의 죽음을 우리를 대신해 당신의 아들 예수님에게그 짐을 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만큼 사랑하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이실 만큼 ‘이만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14년 동안 험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사랑의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14년간을 종과 같은 고된 생활을 하며 견디었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의 깊이와 크기는 그 사랑을 위한 헌신과 희생에 비례합니다. 헌신과 희생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가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즉 우리를 향한 사랑은 그 어떤 것도 지울 수 없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은 로마서 8장 3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바울은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실 만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외칩니다. 그 만큼 하나님이 사랑이 크고 폭우와 같이 쏟아 내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헌신하시고 희생하신 것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헌신하시고 희생하신 아픔의 표현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둥과 번개가 치고 땅이 갈라지는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아들의 고통스런 죽음을 지켜보는 하나님의 눈물이고 신음이며 고통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처럼’ ‘이만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넓게 벌리시고 내가 너를 ‘이 - 만 - 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 사랑을 맘껏 먹고 누리며 나누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이만큼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시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에 ‘세상’이라는 단어에 내 이름을 넣어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000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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