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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 리스트 (빌 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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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리스트 (빌 1:12-30) 


1985년 4월 2일,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고등과학연구소는 코넬대학 철학과 2학년 학생 서른 두 명을 대상으로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소 측은 학생들에게 백지 한 장씩을 나누어 준 후, “종이 위에 여러분의 이름과 나이를 적으시고 그 아래에 여러분이 살아갈 동안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적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에 학생들은 “지금 우리 나이가 몇인데 꿈을 적으라는 겁니까?” 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한 연구원이 “꿈을 적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이루겠다는 구체적인 목표 리스트, 즉 버킷리스트를 적으라는 겁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그 종이에 자신들의 구체적인 목표 리스트를 작성해서 제출했는데, 그 중 4명은 백지 그대로 냈고, 2명은 시를 적어냈으며, 2명은 특이하게도 여자 얼굴을 그려냈고, 3명은 횡설수설 제 마음대로 적어냈으며, 마음에 품고 있는 삶의 목표를 적어낸 학생은 20명이었습니다. 그 20명 중에서도 진지하게 삶의 소망을 적어낸 학생은 17명이었습니다. 

그 소망 중에는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탄생지를 둘러보고 두 사람의 사상이 발전한 과정을 되짚어본다.” “장학재단을 세워 가난하지만 명석한 학생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싶다.” “서른 살에 안나푸르나 제1봉을, 서른다섯 살엔 에베레스트를 꼭 정복할 것이다.” 등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00년 4월 2일, 프린스턴 대학교 고등과학연구소는 15년 전에 작성된 코넬대학 철학과 2학년 생들의 버킷리스트를 꺼내서 조사팀을 구성하여 당시 학생들의 현재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에 걸친 조사 끝에, 서른 두 명의 소재가 모두 파악되었습니다. 3명은 사망했고, 전업주부 3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들의 직업은 사업가 5명, 공무원 정치인 학교 법관 군인이 7명, 문화 예술인이 4명, 그리고 경제 산업계 종사자가 5명이었습니다. 그 29명 가운데서 18명이 사회 지도층이 되어 있었는데, 그 중 16명은 15년 전 성실하게 자신의 소망을 적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버킷리스트에 여자 얼굴을 그려낸 사람 중 한 사람은 자살을 했고, 버킷리스트를 적어내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가정적인 실패, 사업 실패, 그리고 전과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조사를 마친 프린스턴대학교 고등과학연구소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던 학생들이 더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망의 내용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꿈꾸는 삶의 자세에 있었다. 목표와 희망이 없이 사는 것은 물과 나침반 없이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이 실험과 그 결론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구체적인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버킷리스트를 적어보라”, 즉 여러분의 남은 생애 동안 꼭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적어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적으시겠습니까? 

제가 오늘 이런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에도 이 버킷리스트, 즉 소망 리스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는 한 사람이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바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소망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성도의 소망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1.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소망입니다.

흔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꿈을 꿀 수 없고 소망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2년에 걸쳐 1700명을 대상으로 “가슴 떨리는 당신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입니까?”, 즉 자신의 “생애에 꼭 하고 싶은 일”을 물은 결과를 토대로 만들어진 <버킷 리스트 THE BUCKET LIST>라는 책을 보면,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암말기 환자의 소망은 “죽기 전에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사과 한쪽을 먹고 싶다. 블랙커피를 마시고 싶다. …” 등이었습니다. 간암말기 환자의 마지막 소망은 “그동안 고생만 한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고 싶다. 3분만이라도 속시원하게 웃고 싶다.”였습니다. 즉 사람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지라도 소망을 가진다는 말이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바울 사도가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상황은 어떠 했을까요? 현재 바울의 상황은 “매임”입니다(13,14,17). 즉 그는 현재 죄수로서 수감 생활 중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끝낸 후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엄청난 핍박을 당했으며, 그 후 악의에 찬 거짓 고소와 모욕과 협박을 당했고, 심문을 받은 후 죄수가 되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2년 정도 감옥 생활을 했고, 그 후에는 로마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와서도 2년 이상을 결박된 몸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한 그때까지 최소한 4년 이상을 계속 묶인 몸으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4년을 보내는 동안 바울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처지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18절,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에게 있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망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의 진전이었습니다. 즉 엄청난 시련 가운데 있던 바울이 그 가운데서 기뻐했던 이유는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이 도리어 주님의 복음이 더 많이, 더 널리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먼저 그 일은 바울 자신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전도를 했는데 놀랍게도 그들 가운데서 결신자들이 나왔습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그것 때문에 고난당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아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연로한 바울 사도께서 저렇게 복음을 위하여 애쓰시는데 우리가 가만 있으면 안되지’하는 선한 뜻으로 주님의 말씀을 더욱 열심히 전했던 것이죠.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바울보다 더 나은 사역자임을 보이고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바울 사도는 비록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넓은 지역으로 전해지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것이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그의 소망은 富나 名譽나 편안한 삶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처지, 여러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 자신도 바울처럼 암담한 현실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새해가 되었지만 뭐 그렇고 그래요!’ ‘이 나이에 무슨?’ ‘돈도 없고 직업도 없는데 …’ ‘지금도 죽겠어요.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지만 않아도 좋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노 사도 바울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통해서건 다른 사람을 통해서건 어떤 經路로서건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삶의 목표, 소망으로 삼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자 즐거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소망보다 주님의 복음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리고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으로 널리 퍼지는 것을 소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 소망만큼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도 없을 것이며, 여러분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2.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바울을 웃게 만들었던 그의 두 번째 소망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의 소망을 통해 성도는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의 소망과는 차별화된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차별화된 소망이 오늘 본문 20절 이하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尊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20).”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일”, 바로 이 목표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갇힌 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지만, 그것을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즉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그 일로 인하여 복음의 진전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존귀케 하는 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듯 합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죽도록 애쓰고 또 애쓸지라도, 그리하여 내 진액이 다 떨어지고, 내 피가 다 마르고, 내 몸이 걸레처럼 헝클어질지라도, 그래도 부족합니다. 나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간절히 주님이 존귀하게 되기를 바랐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디모데전서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忠誠되이 여겨 내게 職分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1:12~14).”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로서 복음과 교회에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에 불과했던 자신을, 그리고 폐기할 쓰레기 같은 존재로 여겨도 충분한 자신을 忠誠되이 여겨 복음 전하는 그릇으로 사용해 주신 바로 그 주님을 존귀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첫 번째 목적 역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알고 계십니까? 

2006년 미스코리아 진에 오른 ‘이하늬’는“제 꿈이 선교 사업이기 때문에 제가 가진 모든 재력과 힘과 파워로 사람들을 돕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자신의 소망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 이하늬 때문에 미스코리아에 나선 또 다른 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작년도 미스코리아 진에 오른 이성혜 양입니다. 이성혜는 세계적인 명문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才媛인데요. 그는 “내가 외국에서 살았던 시기,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제일 높았던 순간이 이하늬가 나왔던 때였다. 

매력적인 분이고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하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성혜 역시 울산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장로님의 딸입니다. 이 아버지 장로님이 지난 주간 박사과정 수업 중 강사이신 이동원 목사님에게 계속 메일과 문자를 보내시더라고요.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고픈 그 아버지와 딸의 소망을 표하면서 말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바울 사도는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일이라면 자신이 죽어도 좋다는 아주 강력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나는 계속 살 것이고, 죽음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죽을 수도 있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고생하다가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 죽음이 주님을 더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된다면, 자신은 그것을 더 좋아하고 더 바라고 더 간절히 사모한다고 말하면서, 老軀의 몸으로 칙칙한 지하 감옥에서 지내면서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소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것보다, 여러분이 더 편해지는 것보다, 여러분으로 인하여 주님이 더 존귀하게 되기를, 사사 죽으나 오직 주님만 존귀하게 만드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바울처럼 삶의 어려움과 시련 가운데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3.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소망입니다.

자, 이제 바울의 세 번째 소망을 확인할 시간입니다. 그의 세 번째 소망은 무엇일까요?

본문 24절부터 28절,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여러분,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울의 세 번째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 성도들이 “풍성하게” 되는 것,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 그들이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27). 바울의 마지막 소망은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성도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옷과 관계되는 말입니다. 노인이 젊은 세대의 옷을 입을 수 없고, 군인이 양복을 입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성도만 입어야하는 독특한 옷이 따로 있다는 뜻, 즉 성도다운 삶, 복음의 사람다운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우리가 믿는 진리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 우리가 주장하고 전하는 복음과 일치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생활하라”는 말은 난하주에 “시민노릇”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행동하라.” “천국시민으로서 너희의 의무를 다하라” 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적인 특성과 관계된 표현입니다.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아주 특별한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退役 軍人 등 국가 공로자들에게 주어진 이 빌립보는 비록 로마에서 1200Km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로마 시민권과 면세권 및 자유권 등 특별한 대우를 받는 도시였지요.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여러분이 빌립보에 살지만 로마의 시민이듯이 여러분이 이 땅에 살지만 천국시민이니 천국시민답게 사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천국시민 다운 삶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계십니까?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어느 날 성경을 읽고 있는데 한 청년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청년은 마크 트웨인이 성경 읽는 모습에 의아하다는 듯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성경을 읽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선생님은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이해하시나요?” 그러자 마크 트웨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제가 가슴 아픈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 때문이 아니라 알고 있는 말씀조차 삶에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복음을 아는 것은 쉽지만,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소망으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본문 27절 이하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성도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27). 아름다운 연합과 일치가 복음에 합당한 삶이지요!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삶은 수고나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28).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삶은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교회 때문에 받는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29). 바울은 이런 삶을 “성숙”이라고 말합니다. 

즉 복음에 합당한 삶은 성도의 성숙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마지막 소망은 자신의 성숙이요, 성도들의 성숙이었던 것이죠. 바울은 자신이나 성도들이 좀 더 천국백성다워지기를, 좀 더 복음과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살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 가장 예수님 닮은 영성과 인격과 삶을 갖추는 것이 바울의 마지막 소망이었던 것이죠.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지막 소망도 이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성숙, 예수님 닮음! 이 소망이 여러분의 소망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절망적인 현실 가운데서도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소망은 주님의 구원의 복음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널리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망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소망은 모든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소망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더니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은 꽃을 피웠습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미국의 어느 병원 중환자 병동에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던 십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음으로 그 병원에 자원봉사를 나온 대학생 한 명이 자원봉사자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중환자 병동에 들어와서는 그 소년의 기록을 보고 나이를 확인한 다음, 중학교 2학년 과정에 해당되는 영어 문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 순진한 대학생 자원봉사자는 며칠 동안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의사들이 회복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판정을 내렸던 그 소년의 상태가 좋아져 기적같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주, 두 주가 지나면서 고비를 넘기고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에 모두가 놀랐고, 다들 이 소년의 회복 원인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얼굴의 붕대가 풀리던 날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원인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소년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는데요. 

한 대학생 형이 와서 다음 학기 영어 시간에 배울 동사 변화를 가르쳐 주기 시작해서 무척 놀랐습니다. 그 형은 ‘네가 나아서 학교에 돌아가면 이것들을 알아 둬야 공부에 뒤떨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확신했죠. ‘아, 의사 선생님들이 내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나에게 다음 학기 동사 변화를 가르쳐 줄 리가 없지.’ 그때부터 마음이 기쁘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소망은 현실을 이기게 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즐겁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정하고 그것을 굳게 붙잡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 소망을 적어봅시다. 

여러분의 소망이 바울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라면 좋겠지요. 주님을 존귀하게 만들고자 하는 소망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을 소망한다면 더더욱 좋겠지요. 그러나 굳이 그런 것이 아니라도, 아주 평범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 본문 옆이나 주보에 적어보십시오. 그러면 그로 인해 여러분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프린스턴대학교 고등과학연구소의 결론처럼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주 안에서 “무엇인가를 꿈꾸는 삶의 자세 … 목표와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여러분에게 즐겁게 만들 것이고, 그 소망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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