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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을 향한 순례 (마 1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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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향한 순례 (마 18:10-14)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우승열패 세상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도 애 많이 쓰셨지요? 날이 갈수록 삶이 녹녹치 않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하늘을 향한 순례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삶이 늘 기껍지만은 않습니다. 기쁘고 행복할 때도 있지만, 힘들고 암담할 때도 있습니다. 시편 39편 시인은 덧없는 인생을 돌아보며 “걸어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평생이 실로 한오라기 그림자일 뿐”(6)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을 “나 또한 나의 모든 조상처럼 떠돌면서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손과 나그네”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길손과 나그네는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가뿐하게 살면 좋으련만 우리는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남보다 더 가지고, 더 높아지려니 경쟁과 스트레스가 심해집니다.

저는 악다구니가 끊이지 않는 세상으로 인해 멀미 증세를 느낄 때마다 디모데후서에 나오는 말세의 어려운 때에 대한 말씀을 읽곤 합니다. 듬성듬성 인용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감사할 줄 모르며…무정하며…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딤후3:1-5) 요즘 가장 실감나는 것은 ‘난폭함’입니다. 학원 폭력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신성한 교육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사태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청소년 범죄가 매년 11%씩 증가하고 있고, 청소년 자살률은 OECD 국가 가운데 최고라고 합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 공부’ 하며 닦달하고 몰아세우는 세상에서 멀미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귀뚜라미 같은 미물도 좁은 공간에 갇혀 스트레스를 받으면 점프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옆 동료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쥐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서로 물어뜯고 심지어는 집단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오세영 시인은 <그릇>이라는 시에서 “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날이 된다”고 노래했습니다.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세상 도처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깨진 그릇이 많을수록 세상은 위험한 곳이 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유난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생명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것인지 자각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 생명을 함부로 다루겠습니까?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생명이 얼마나 장엄한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처럼 거칠고 사나운 짐승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잃은 탓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누군가의 동료가 되는 데 있습니다. 

• 업신여기지 마라

사람들이 참 외롭습니다.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집에서 스마트폰을 붙들고 누군가와 접속을 시도하거나, 텔레비전 드라마나 오락을 보는 이들을 봅니다. 어느 분은 이 시대를 연결 과잉의 시대라 했습니다. 하지만 스산한 마음은 여전합니다. 진정한 관계맺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가수 임재범의 ‘사랑 그놈’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늘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하고/늘 혼자 추억하고 혼자 무너지고”, 
“늘 혼자 외면하고 혼자 후회하고/늘 휘청거리면서 아닌 척을 하고” 
“사랑이란 놈 그놈 앞에서 난 늘 빈털털이일 뿐”

가사를 듬성듬성 인용했습니다. 시크한 척 하지만 그 엄부렁한 속내가 보이는 듯합니다. 지금 우리 삶이 가난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우리가 잃은 양의 비유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비유의 도입부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10a)

여기서 말하는 ‘작은 사람들’은 큰 맥락에서 보자면 사회적 약자를 이르면 말이겠지만, 마태 공동체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교회 안에 있는 미천한 교우들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남을 낮추어보거나 멸시하는 것입니다.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피가 흐릅니다. ‘업신여기다’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없이 여기다’는 말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가슴에는 존중받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업신여김을 받는 순간 우리 몸의 진액이 마르게 마련입니다. 없는 사람으로 혹은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받을 때 우리는 생명을 박탈당한 것 같은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에 대해 가르치면서 가장 약한 지체가 가장 소중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b)

이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늘 뵙고 있는 천사들이 가난한 이들의 처지에 누구보다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잠언은 같은 뜻을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14:31)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아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뒤를 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공동체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가장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 끝에 들려주신 것이 본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목자는 어떻게 할까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아흔아홉 마리가 흩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일이 더 복잡해질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염려는 이 비유를 비유로 보지 않고 현실로 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비유의 초점은 한 마리 양이 길을 잃었을 때 그 공동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합당한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외경인 도마복음서는 99 vs. 1이라는 이 극단적인 대조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조금 다른 접근을 합니다. 길 잃은 양이 무리 가운데 가장 큰 양 곧 가장 가치 있는 양이었다는 것입니다. 도마복음서에서 목자는 양을 찾은 후 “나는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이렇게 대조적으로 설명합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마리의 양은 그 틀을 깨치고 나가 방황도 하고 아픔도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집을 나갔던 탕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비유를 영적인 성숙이라는 측면에서 읽는다면 이런 독법이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공동체 안에서 혹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변변한 일자리조차 얻지 못해 떠도는 사람들, 변두리로 밀리고 또 밀리다가 마침내 거리에 나선 사람들…. 그들은 화려한 문명의 이면을 폭로하는 사람들입니다. 휘황한 소비의 낙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업신여김이 우리 마음에 파고드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참 목자는 그 양을 쓸모없다 하여 버리지 않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가시에 찔려 피가 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양은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참 부모는 자기 자식이 못났다고 하여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그를 돌보아줍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를 돌보는 동안 이전에는 맛볼 수 없었던 생의 기쁨을 맛본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를 참 좋아합니다. 1963년 아들이 태어나면서 그의 인생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아들인 히카리는 태어나자마자 두개골 뒤쪽에 달린 머리만큼이나 큰 적색 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이 낯선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오에는 고통에 흠뻑 빠져들고자 히로시마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인생 가운데 가장 처절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째 되는 날, 그는 그 깊은 우울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열쇠를 찾았습니다. 원폭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그곳 사람들이 보여주는 용기와 사고와 심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나는 그곳의 여자들과 남자들의 고통에다 내 고통을 심은 채, 그들처럼 견디고 그들처럼 싸우기로 마음먹었어요. 나는 나의 생각들을 돌이켜보았고, 존재에 대한 도덕적 의미를 받아들였어요. 그날 이후, 나는 히로시마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어요.”(사비 아옌/킴 만레사, <16인의 반란자들>, 39쪽)

히로시마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자 그의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 눈으로 보면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이 낯설고 추하고 불쾌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존재야말로 우리를 사람다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돌쩌귀인지도 모릅니다. 

• 사랑의 상호성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좋은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의 자리, 특히 소외된 삶을 사는 이들의 자리에 다가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에 대해 말하면서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라’(롬12:16)라고 말합니다. 그 앞에서는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어느 순간 제 마음에 들어온 깨달음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가장 귀한 행복을 지금 고통받는 이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그들 곁에 다가서고, 그들의 손을 잡고, 그들과 함께 울고, 그들의 짐을 나눠지려 할 때 그 행복은 슬며시 우리를 찾아옵니다. 

뇌과학이나 신경심리학은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인간이 행복을 느낀다는 과학적 근거를 내놓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거울 신경세포(mirror neurons)가 가진 공감 능력입니다. 과학자들은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거울 신경세포가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 그리고 감정을 마치 자기의 것처럼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고통, 행복감, 수치심과 같은 사회적 정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공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포옹은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표시입니다. 포옹은 내가 다른 사람을 안는 행동인 동시에 내가 타인에게 안기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길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부둥켜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통해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고통을 얼싸안는 마음, 그 사랑의 마음 하나 얻으라고 주님은 우리를 산 자의 땅에 머물게 해주십니다. 

무정한 세상, 난폭한 세상에서 사랑의 순례자로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의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고,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사랑을 쏟아 부어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치고 낙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는 어떤 행동도 무의미한 것, 무가치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씨를 뿌릴 뿐입니다.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눈을 흘기지 마십시오. 비난의 돌팔매질을 하지도 마십시오.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돌보아주십시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14)

이 마음이 없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약하다 하여 몰아내고, 무능하다 하여 배제하고, 힘없다 하여 외면하는 것은 주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만연한 불의에 대해 분노하고, 입 없는 이들의 입이 되어 주는 일이야말로 기독교인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응답하며 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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