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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화가 아닌 예수 (행 9: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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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아닌 예수 (행 9:32-35)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일본 소니사의 추락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요즘 소니사는 전자회사가 아닌 금융회사에 가까워서 보험을 팔아서 번 돈으로 전자회사의 손실을 메우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격세지감을 느끼지요. 

한때 소니는 세계 최고의 전자회사였는데 이 기사에 의하면 소니가 워크맨을 만들어서 출시했을 때가 전성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소니사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소니의 워크맨 신화는 전설이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신화라는 단어가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소니 워크맨의 신화가 전설이 되었다는 이 구절. 이 말은 과거에는 잘 나갔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신화가 끝났다는 얘기입니다. 신화는 과거의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끝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신앙과 신화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사실이냐 신화냐 하는 것입니다. 신화라는 말은 우리에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마치 사실이 아닌데 사실인 것처럼. 스토리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조건 신화라는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진짜 칠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이십사 시간으로 이루어진 하루. 이것은 깊은 진리를 쉬운 방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또 선악과가 진짜 과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상징적인 언어로 영적인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라는 장르는 오히려 사람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면이 있습니다. 신화로 보지 않았다면 결코 거부했을 이야기를 신화로 보기 때문에 수긍할 수 있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면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화가 어디까지 해당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일부를 신화라고 보는 것까지는 이해하더라도 만일 아브라함을 신화로 여긴다든가 모세를 신화로 여긴다든가 다윗을 신화로 여긴다든가 아니면 심지어 예수님의 기적을 신화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 신앙의 근간은 무너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데 만일 그 대상이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해체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 믿는 최소한 믿음의 대상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것, 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 승천하셨다는 것, 다시 오시리라는 것, 또 성령, 교회, 죄사함, 영생, 여기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 가져야 되는 믿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 내용 중의 하나라도 사실이 아니고 신화라면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신학자들을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씨름합니다. 우리가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는 의사가 되기 전에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신약성경 전문가였습니다. 그가 연구하고자 애썼던 것은 소위 역사적인 예수를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예수라는 말이 어패가 있지만 슈바이처 박사는 성경에서 역사적인 예수를 발굴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말은 성경 기록을 역사적인 객관적인 사실로 믿지 못했다는 얘기이고 거기에 신화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역사적인 예수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 자체가 객관적인 역사를 담은 것이 아닌 초대기독교의 케리그마 메시지를 담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꿰뚫고 역사적인 예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신학 연구를 포기하고 의사가 돼서 아프리카로 간 것입니다. 

우리는 슈바이처를 위시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합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한 신학이 아닌 학문만을 위한 신학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로 신앙에 손상을 끼치고 교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똑똑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똑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심각하게 간과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신화라는 말은 과거에 완료된 스토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끝난 과거의 일을 후대사람들이 미화하는 것, 그것을 신화라고 합니다. 예컨대 알렉산더 대왕이 소년이었을 때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말을 길들였다는 이야기를 여러분 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게 정말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후대에 알렉산더를 미화하기 위하여 지어낸 이야기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건 과거의 일로 끝났다는 사실이에요.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하기만 하면 됩니다. 

알렉산더는 더 이상 말을 타고 있지 않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에 대해서도 신화가 많이 있습니다. 주로 백두산과 연계해서 과거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할 때 미숫가루 한 움큼으로 며칠을 견뎠다는 이런 식의 신화가 많이 만들어진 것은 그를 미화하기 위하여 이후의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도 이와 같은 신화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느냐.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아닌 이유 중의 하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간과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행전을 진지하게 읽었더라면 복음서가 미처 말하지 못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현재 진행형으로 경험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을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애니아를 낫게 하실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베드로가 ‘내가 너를 낫게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 Jesus Christ heals you’ 현재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셨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은 과거의 역사에 매여 있는 것뿐만이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 가운데 현재도 함께 계시고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낫게 하신다고 말했을 때 실제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역사를 베드로도 경험하고 애니아도 경험하고 온 동네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화적인 인물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묶여있을 뿐입니다. 현재 일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만일 그들이 현재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했다든가 알고 있었다면 그들의 신학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성경의 역사 이 글 속에 기록된 과거의 현상뿐이었지 그 예수님이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그들은 믿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그 빠른 기간에 그렇게 많은 나라와 많은 민족에 강력하게 전파될 수 있었느냐.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빠른 시간에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유대인들의 신앙이 어떻게 민족과 언어와 문화와 정치의 장벽을 넘어서 많은 나라와 민족에게 그렇게 빨리 퍼질 수 있었느냐. 이미 다른 민족, 그들이 섬기고 있는 신과 종교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이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많은 사람의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느냐. 그것을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 위대해서만은 아닌, 예수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현재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그들이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기독교인들의 최초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 Jesus Christ is Lord’ 현재적인 예수, 주님 되심을 말했어요. Jesus Christ was Lord 과거형이 아닌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후대 사람들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화작업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떠나가신 다음에 추종자들에 의하여 신격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지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런 사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떠나가셨지만 성령과 함께 교회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 예수님을 의지했고 그 예수님이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경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하는 것인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예배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신격화 작업이 아니고 이들의 자연스러운 믿음의 결과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하는 것을 승천하신 다음에,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다음에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음모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의를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무엇을 조직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작업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기독교 신앙은 자연스럽게 순리적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던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커질 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날 설교할 때 삼천 명이 회개할 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백부장 고넬료가 예수 믿게 될 줄, 에디오피아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될 줄, 이방인들 가운에 교회가 세워질 줄,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질 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계획하지도 않고 모의하지도 않았으나 순리적으로 자연스럽게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들이 모여서, 추종자들이 모여서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할까 모의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들과 장로들이 최초로 모인 것은 사도행전 11장과 15장인데 그것은 이미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다음이었습니다. 이미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진 후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올바른 복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의논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 이전에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까 어떻게 입을 맞출까 의논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무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단 한가지만을 염려하면 됩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의 고민이요 평신도들의 고민입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본문의 베드로처럼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느니라’라고 말할 때 실제로 성도들이 어떻게 낫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고민이 있고, 평신도의 입장에서는 예수 행하시는 일을 자기도 어떻게 하면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이런 좋은 선물을 구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설사 내가 직접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것을 경험했다면 우리 모두에게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은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애니아 한 사람이 나았는데 온 동네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기적의 대표성을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기적을 경험해야 되는 게 아니에요. 

한 사람이 경험했더라도 거기에 대표성이 있어서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똑같이 신뢰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적을 주시지 않느냐.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만한 증거가 된다면 주님은 그것으로 은혜가 족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하고 충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게는 세 가지 차원이 있는데 세 가지 시간적인 차원입니다. 첫째는 역사적인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지금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뿐만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이 세 가지 면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세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고 사람들이 마음에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것이고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께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훗날에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작업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 그것을 완성시키실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영광중에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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