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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불일듯 하게 하라(3) (딤후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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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일듯 하게 하라(3) (딤후 1:13-14)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디모데후서 1 : 13 - 14)

하나님의 은혜로 심령을 다시 불일듯 하게 하여, 세상을 뜨겁게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함께 아파하던 마음에 두려워하는 먼지가 쌓였을 수 있습니다. 거짓 없는 순수한 믿음에 부끄러워하는 먼지가 쌓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타오르던 불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잦아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먼지를 날려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 부터 오는 은혜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의지함으로 승리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여전히 생명 있음으로 감당하여야 할 사명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보호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확신은 불길을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게입니다. 확신이 없이는 불길은 다시 타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그저, 확신하겠다고 마음에 결심하면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까?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믿음 또한 좋은 것입니까? 우리가 노력하면 얼마든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확신을 가지기 위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불일듯 하게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확신으로 가득 찬 신앙인으로 세상에 서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I. 지켜야  

우리의 확신이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그가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에서 ‘지킨다[e[cw/에코]’는 말은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다는 것입니다. ‘지키다’는 기본적으로 ‘붙잡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산을 지킨다는 말은 재산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쌓아둔 지식이라도 잊히지 않도록 반복학습을 통하여 붙잡아 두어야 지켜지는 것입니다.

1.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원인을 파악해야 합니다. 원인이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적 확신도 인간적으로는 일종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바른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제대로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붙들고 있으면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엇을 붙들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우리는 신앙의 확신을 위하여 무엇을 붙잡고 있어야 합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본받아 지키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본받아[uJpotuvpwsi"/휘포튀포시스]’라는 말은 그림을 그릴 때에 따라서 그릴 수 있도록 하는 ‘밑그림’입니다. 흉내 내기를 할 수 있는 ‘본보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본받아 지키라’는 말은 (목적격으로) ‘본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2. 본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글인 한글을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저는,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위 칸에 쓰인 ‘가, 나, 다, 라’를 아래 칸에 연필로 꾹꾹 눌러서 그대로 보고 베꼈습니다. 점선으로 된 글씨 위에 그대로 따라서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본을 따라서 글씨를 그린 것입니다. 붓글씨를 배울 때도 처음에는 본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글씨본을 따라서 글씨를 쓰다 보니 글자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때, 본을 그대로 따라서 해야 합니다. 본을 따라서 ‘가’를 쓰는데 덜 쓰면 ‘기’가 되고, 더 쓰면 ‘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본을 지켜야 정확한 글자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지켜야 할 본이 있습니다. 그대로 따라서 해야 할 밑그림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그에게 가르쳐 준 본을 잊지 말고 지키라고 합니다.

신앙에는 우리가 생명을 다하여 붙들어야 할 모범이 있습니다.우리가 붙들어야 할 신앙의 모범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본을 붙들고 놓지 말고 지키라고 합니까?

오늘 말씀은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라고 하였습니다. 붙잡고 놓치지 말고 지켜야 할 본은 바른 말입니다. 처음에 잘못 배우면 차라리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잘못 배운 것을 고치는 것은 처음부터 새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처음에 틀리게 배우면 계속하여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량 본으로 찍어내는 제품은 모두 불량제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이 불량이면 제대로 된 본으로 빨리 바꾸어야 합니다. 처음에 제대로 배웠는데 중간에 잘못되었다면 다시 처음의 제대로 된 본으로 되돌아야 합니다.

3. 바른 말의 본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른 말’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는 입 바른 말입니까? 아니면 ‘정직하고 바르게 살라’는 말입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쓴 편지에서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딤전 6:3)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른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붙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한 구원의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한 가지, 바른 말의 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그른 말, 잘못된 본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르지 말아야 할 잘못 된 본도 있습니다.

엄마 게가 아기 게에게 “너는 어째서 비뚤어진 걸음걸이로 걷느냐. 똑바로 걸어라.”고 했다지요. 그러자 아기 게가 “엄마, 제게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엄마가 곧장 걷는 걸 보면 저 역시 그대로 걸어 보겠어요.”라고 했다지요. 

물론, 이것은 인간을 위한 비유입니다. 게는 옆으로 걷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바른 모범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지적하기에 충분합니다. 본이 틀렸는데 그 본 대로 하면 다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신앙의 본을 따르면 잘못된 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신앙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잔칫집에 갔습니다. 그 집에 일하는 사람이 다가와서 어린 아이에게 “우유를 마시겠니? 아니면 술을 마시겠니? 네가 원하는 대로 갖다 주마.”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아버지가 마시는 것으로 하겠어요.”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술을 마시고 싶었으나 어린 아들을 생각해서 술을 달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좋은 신앙의 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을 움켜잡고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바른 말의 본을 붙잡고 놓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까? 어떤 말씀과 교훈을 지키라고 하였습니까?

그것은 ‘내게 들은 바’입니다. 디모데에게는 이미 바울이 들려 준 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너에게 해 준 바로 그 말이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바로 그 말을 바른 말의 본으로 삼으라고 간곡하게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4. 들은 말의 본을 지켜야 합니다.

디모데는 영적 아버지인 바울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소중하지만 특별히 바울의 눈물과 땀을 통하여 전하여 준 말씀은 더욱 생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귀로 듣는 말씀이 아니라 눈으로 듣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에서 삶의 간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부딪혀지고, 그 말씀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하여 살아있는 말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간증을 통하여 간접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난 하나님을 믿습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이 만나주신 엘리야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에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말씀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 화석리 방추 488번지. 방주교회”

“재수 10년 만에 신학대학 들어가다.”

지난 주, 우리는 세계로금란교회 주성민목사님을 통하여 그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주목사님이 만난 하나님은 특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주목사님의 간증은 그 분의 경험이 담긴 특별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 간증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오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간증을 통하여 신앙의 본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려고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나주신 다른 사람들의 간증을 들음으로 신앙의 바른 본을 배우고 지켜야 합니다.   

자신에게 생생하게 전달된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을 본으로 삼아 그 위에 자신을 그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불일듯 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하여야 할 또 다른 일은 무엇입니까?
  

II. 지켜야  

우리가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확신이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또 지켜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14절입니다.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다시, 13절에서 이어서 ‘지키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말은 앞 절에 나온 ‘지키다’는 말과 헬라어로는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지키다’[fulavssw/휠랏소]는 본래 ‘고립’의 뜻입니다 잃어버리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어떤 것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지키는 것입니다.

1. 지켜야 합니다.

건강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심장이 뛰는 것입니다. 심장이 뛰어야 온 몸에 피가 돌아 산소와 영양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체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심장이 뛰는 것이 멈추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건강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영적 심장입니다. 그런데 지금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심장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이 사랑이 식지 않도록 보온을 잘 해야 합니다.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어도 체온을 빼앗기게 되면 목숨을 잃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그것을 삶 속에서 계속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 주와 이번 주에 제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내의를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에 홍성준성도님 장례식 하관예식이 산에서 있었기에 추운 날씨를 대비하여 아침에 내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입고 있습니다.

속내의를 입으면 좀 갑갑하기는 하지만 따스하고 참 좋습니다. 에너지를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입어야 합니다. 성도님들! 교회 와서 예배당이 춥다고 하지 마시고 옷맵시가 나지 않더라도 내의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의를 입으면 따스한 것이 내의가 만들어내는 열입니까 아니면 본래 몸에 있는 열입니까?

내의가 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지요. 심장이 뛰면서 만들어 낸 열을 내의를 입어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내의를 입어 몸에 있는 열이 빠져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아주면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몸에서 열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이 몸에서 달아나지 않게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붙잡은 것도 중요하지만 붙잡은 것을 계속 지키는 것도 또한 대단히 중요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를 계속 잘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잘 지켜서 수호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그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키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서 부탁받은 것을 지켜야 했습니다.


2. 부탁받은 것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은 처음부터 바울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겼습니다. 바울이 예수님께 부탁받은 것을 다시 디모데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말씀, 복음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위탁된 말씀을, 사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공중의 새가 쪼아 먹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마태복음 13:3-8 [공동])

이 비유에서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은 씨앗이나, 좋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은 씨앗이나 똑같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같은 씨앗이라도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면 열매는 고사하고 싹도 움틀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부탁받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추운 겨울에 몸의 열을 보호하기 위하여 내의를 입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목도리를 하고 장갑을 끼고 겉옷을 두툼하게 입는 것처럼 차가운 세상에 복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수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받은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그 은혜를 어떻게 지킬 수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지킬 수 있습니다.


3.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켜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라는 말은 성령님이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 안에 머물러 계심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임재해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하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감리회를 시작한 존 웨슬리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며 일생동안 변함없이 감리교 운동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조지 휫필드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뛰어난 영성을 지닌 열정적 설교가였습니다. 그의 설교가 너무 유명하였기에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 와서 그의 설교를 듣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미국의 영적각성운동의 거장 새뮤얼 데이비스와 길버트 테넌트가 있습니다. 이들은 휫필드의 설교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빈약했고 결함이 있었다. 정말 형편없는 설교였다. 하지만 그 설교에 수반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너무도 놀라워서 은혜로운 감화를 받기 위해 대서양의 무서운 파선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고 원해야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계셔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계셔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계셔야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계셔야 확신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을 따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신의 마음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십시오.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확신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기대한다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깨어있음 없이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는 예배자들이 되십시오. 제발! 제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서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를 확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1년여 동안 세계에 흩어져 있는 부흥의 현장을 탐방하고 ‘부흥의 현장을 가다’(생명의 말씀사)라는 책을 쓴 박용규목사는 저자 후기에서 이렇게 아쉬움을 적고 있습니다.

“이 일을 진행하면서 성령의 역사가 과거의 역사가 되어버린 현장을 목도했을 때는 가슴이 아팠다. 특히 웨슬리 감리교 부흥과 웨일즈 부흥의 신화를 자랑하는 영국에서 오늘날 교회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토록 화려했던 감리교 부흥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때로는 거대한 교회가 술집으로 변한 것도, 이슬람이 창궐해지면서 교회를 접수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도 여러 곳 목도 되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완전히 불씨가 사그라진 것만을 보았을까요?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부흥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과거의 부흥이 강하게 일어난 아일랜드 얼스터 지역의 교회들은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 성령의 역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다. 미국, 중국, 인도, 한국,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거룩한 부흥이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불씨를 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미 주신 아름다운 말씀을 지켜 은혜의 감격을 누려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님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통로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본을 따라, 아름다운 복음과 받은 은혜를 지키어 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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