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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을 헐라 (요 2: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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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헐라 (요 2:13-25)


‘얼굴’이란 우리말의 의미는..
얼 : ‘영혼’이라는 뜻이고...    굴 : ‘통로’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멍한 사람들을 보면 '얼빠졌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과 산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기분이 좋은 사람의 얼굴과 아주 기분이 나쁜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사람의 얼굴은 우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나왔다 들어왔다 하는 것처럼 바뀝니다.
그러기에 변화무쌍한 것이 얼굴입니다.
얼굴은 정직합니다.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6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첫인상이 결정하는 요소는 외모, 표정, 제스처가 89%, 목소리 톤, 말하는 방법 13%, 그리고 나머지 7%가 인격이라고 합니다.

표정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표정과 감정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근육 80개로 되어 있는데 그 80개의 근육으로 7,000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신체의 근육 가운데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가장 오묘한 것이 바로 얼굴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상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이처럼 시시때때로 변화되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겠지요 또한 변화 될 수 있는 것도 우리들의 모습이겠지요.

서로 잘 통하는 얼굴 
영혼이 잘 통하는 얼굴
생명이 잘 통하는 얼굴
기쁨이 잘 통하는 얼굴
감사가 잘 통하는 얼굴
희망이 잘 통하는 얼굴
항상 이런 모습으로 하루하루 새롭게 열어가시길 바랍니다

군대에서 밤에 보초를 서는데 그날의 암구호가 ‘고구마’였답니다. 모음 ‘ㅏ’ 발음을 못하는 군인이 마침 보초를 서고 있는데 상관이 암구호를 묻자 ‘고구미’라고 했습니다. 상관이 틀렸다고 하자 그 보초가 ‘김진기’라고 해서 흠신 얻어맞았답니다. 
보초가 하려던 말은 ‘감잔가?’였습니다.

흠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도 되고 장애가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불편합니다. 또한 그 흠 때문에 엄청난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도 문제로만 보면 어려움이지만 극복할 수 있는 도전이라고 생각하면 발전적 자극이 됩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손해가 있는 곳에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이익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톤의 말처럼 모든 시련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교육시키며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J. C. 페니는 미국의 위대한 백화점 왕입니다. 그는 가난으로부터 놀라운 성공을 일궈 낸 사람입니다. 그의 삶이 평탄하기만 한 줄 알았던 한 친구가 그에게 성공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페니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마디라네, 역경과 그리스도가 비결이라네. 역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구원자요 안내자였다네.”
그의 설명을 듣고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습니다. 페니는 90세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경건의 훈련으로 하늘나라의 기쁨과 능력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본 사람입니다. 
역경은 가장 좋은 경건의 훈련 재료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역경을 통하여 귀한 훈련을 시키시며 이로써 경건의 훈련을 쌓게 하십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역경의 훈련을 받으십시오.
“주님, 저로 역경을 만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경건의 재료로 활용하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손해가 있지만 손해가 있는 곳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성전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울 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모든 성년 남성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삼대 절기가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특히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하나님께서 과거 그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날을 기억하여 지키는 절기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감사하는 가장 큰 절기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보니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흠이 있는 것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가까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국 팔도강산에서 다 몰려오는데 심지어는 타국에서 살던 유대인들까지도 이 날에 예루살렘을 찾는데 거기서부터 제물을 이끌고 오다보면 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나름대로는 백성들을 위해서 편한 제도를 하나 만듭니다. 
그것은 제물을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돈으로 가져와서 성전 앞에서 흠 없는 제물을 사서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전 뜰에 헌금함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헌금함에 많이 넣은 부자와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보시면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부자는 많은 것 중의 일부를 드렸지만 이 과부는 자기의 전 재산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관점은 얼마나 많이 드렸느냐 보다 어떤 마음으로 드렸느냐 즉 정성을 보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성전세를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십일조와 별도로 성전, 성소의 건축, 수리, 유지 등에 필요한 비용은 빈부의 구별 없이 같은 금액으로 거두는 생명의 속전과 각자 자원하여 바치는 예물로 충당하였습니다. 이 생명의 속전을 가리켜서 성전세라 부르는데 빈부귀천 없이 모두가 반 세겔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더러운 세상 돈을 드릴 수 없다는 명분 아래 성전에서만 쓸 수 있는 성전용 세겔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전 세겔로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합니다. 문제는 첫째는 그들이 이렇게 사고팔고 돈을 바꾸어주는 장소가 성전 뜰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흠 없는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사꾼들과 대제사장이 결탁을 해서 흠 있는 소나 양들조차도 제물로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장사한다는 자체가 아닙니다. 우선 장사하는 장소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힘써야 하는데 이들은 예배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세상 이익으로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사고파는 것이라면 당연히 흠 없는 온전한 것을 팔아야 하는데 이들은 흠 있는 것까지도 순례객들에게 팔았고 또 그것이 흠 있는 것임을 알면서도 대제사장들은 눈을 감아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만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아닌 하나님까지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속습니까? 결국 그 제물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지 않는 제물이 되고 마는 것이니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장사꾼은 이익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진짜 장사꾼입니까?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용입니다. 소비자를 진심으로 위해주게 되면 그 진심은 통하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진짜 장사는 눈앞의 이익이 아닌 먼 앞길을 내다보며 투자하게 마련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송청이라는 유명한 약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약을 조제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의 약을 먹고 병이 나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송청은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외상으로 약을 지어주었습니다. 연말이면 외상장부가 수십 권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약값을 독촉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연말이면 외상장부를 모두 태워버리고 두 번 다시 약값을 묻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었고 어떤 사람은 ‘대범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송청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도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40년 동안 약장수를 하면서 수백 권의 외상장부를 태웠지만 크게 손해 본 적은 없다.약값을 떼어먹은 사람도 있으나 나중에 출세해 약값보다 훨씬 많은 보답을 하는 사람도 있다. 선을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장사만은 아니다.”
그렇습니다. 이 송청이야 말로 진짜 장사꾼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접근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 것이지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태도의 문제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의 목적은 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할 때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목적이요 복은 그에 따라오는 열매일 뿐입니다. 그건 화목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죄의 길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게 되고 하나님과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담이 다 사라지고 하나님과 온전히 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 화목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정말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믿음 밖에 없으며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서 소와 양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의 상을 다 엎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듯 진노하셨던 때가 있으셨던가요? 없었습니다. 예수님 하면 사랑의 예수님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전된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이익으로만 가득할 때 예수님은 정말 안타까워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종류의 밭을 이야기하면서 가시떨기 밭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우리 가운데 이생의 염려가 전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재물과 향락을 싫어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돈 싫은 사람 있습니까? 놀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말 그대로 재미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재미있게 사는 것이 싫을 사람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거기에만 사로잡혀 있다 보면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따라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건 건강도 마찬가지고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있기를 위해서 또한 간구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로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역사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주님 앞에 나아와서도 여전히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하며 판단하고 시비하는 이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내 생각 내 계산을 다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내 계산은 더하기라면 하나님의 계산은 곱하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온전한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고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오직 믿음으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성전을 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모두 성전을 정화시킨 사건으로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돈 바꾸는 자 그리고 비둘기나 양을 파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함으로 이 기사를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다루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신학적인 특성, 즉 영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도대체 이 성전을 헐라는 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는 주의 전을 사모함도 없이 감동도 감격도 없이 들락거리는 무리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사야 1:12에서도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그러한 껍데기 신앙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예배에 참다운 기쁨과 감격 그리고 삶의 새로운 결단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러한 예배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주의 전을 사모하는 심령으로 예배에 참석하십니까? 얼마나 형식적이 아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나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새 소망과 은총과 말씀을 흡족히 받고 돌아가십니까? 그리고 그 은혜 아래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성전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것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라고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샘솟는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히 넘쳐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배만 불리려고 했던 대제사장들과 장사꾼들처럼 오늘 우리 역시 우리의 어떤 이득만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칼만 안 들었지 강도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심지 않고서야 어찌 거둘 수가 있단 말입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저 복만 받고자 했지 심지도 않고 주의 전을 사모하지도 않는다면 어찌 거기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힐 수가 있겠고 어찌 하나님이 건강과 평안과 풍족함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그런 연약함을 하나님께 아뢰며 힘써 주의 뜻을 따라 내게 주시는 직임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반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한 가지 더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로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마음을 다 헐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 사이가 또한 화목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그 모범적인 모습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종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쉬시지 않습니다. 

우리네 삶이 하나님이 팔짱 끼고 그저 바라만 보고 계신 그런 삶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팔을 걷어붙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라도 더 주시고 싶어서 애쓰시는 은혜로 넘치는 삶이 될 때 건강도 주시고 재물도 주시고 영화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항상 평안과 감사와 기쁨으로 넘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한 말씀처럼 우리네 삶에도 이런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음 받은 한 몸된 성전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주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한 몸을 이루는 한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이 모든 일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를 내려놓고 내 생각과 내 사정을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 은혜 아래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순종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뉴저지의 한 사업가는 지난 15년 동안 대학과 의료기관 및 그 밖의 여러 수익자들에게 익명으로 6억불 이상을 기부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법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 하게 되자 그가 베푼 관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한 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저는 다만 돈이 충분히 많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돈을 기부한 사람의 한 친구는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집도 자동차도 소유하지 않고, 비행기는 3등 칸을 타며 15불짜리 시계를 차고, 그리고 “돈에 눌리어 살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자산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종으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주기보다는 움켜잡는 것이 아주 당연하며 현명하게 보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까지도 “경건을 이익의 재료”라고 잘못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위험한 마음가짐을 바꾸어 놓기 위하여 바울사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족이란 경제적 수준보다는 영적 수준에 관한 것이며 이것은 또 가계부의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형편에 관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악착같이 움켜쥐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만족하며 주는 사람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증명될 것입니다.

돈은 여러분이 하기에 따라 지배자도 되고 하인도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욕심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심으로 성전된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철저하게 나를 죽이십시오. 나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럴 때 부활의 영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온전히 사로 잡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런 귀한 은혜의 삶을 누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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