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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1) (눅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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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를 사하소서(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 11:4)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의 네 번째 간청이 육체를 위한 간구인 양식이었다면, 다섯 번째 간청의 제목은 영혼을 위한 간구입니다. 용서와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와 악에서 구출해 달라는 세 가지의 필요한 요구사항이 등장합니다.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영혼은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영혼다운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A. 두 본문의 차이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이렇게 완료형으로 등장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있사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현재형으로 등장 합니다. 이것은 언어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마태복음의 예상되는 독자는 유대인들이고, 누가복음의 독자는 헬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원래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아람어를 희랍어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희랍어나 영어처럼 시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상관없이 말하는 시점에서 연상되는 동작이 완료된 것이면 완결, 완료되지 않은 것이며 미완결형을 사용합니다. 마태는 아람어를 희랍어로 옮기면서 완료형 시제를 사용했으며, 누가는 희랍어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희랍어의 양식을 따라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시제의 문제는 원래의 이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시선을 끄는 대목은 ‘죄지은’과 그 다음에 오는 ‘우리의 죄도’입니다. ‘오페이레마타’[ὀφείλημα] 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원래 ‘빚진’ 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오니 우리가 당신께 대해 빚진 것도 탕감하여 주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죄를 빚으로 생각하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죄를 빚으로 표현하는 어법에 더 큰 호소력을 느꼈습니다. 이에 비해 누가는 비유대인들을 향해 기록했기 때문에, 마태처럼 기록하면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 갚기만 하면 되는 경제적인 거래 관계로 생각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말티아스’[ἁμαρτία]라고 하는 죄라는 단어를 들여오고, 사람에 대하여 죄를 용서해 준다는 개념은 마태와 똑같이 ‘오페이론티’[ὀφείλω]라는 단어를 사용 합니다. 

이 모든 차이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이 두 기도문 사이에 신학적인 논쟁이 될 정도의 차이점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를 용서 받는 것은 이미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이냐 아니면 하고 있기 때문이냐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삶의 성향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과거든 현재이든 계속 용서해 주면서 살고 있사오니 우리가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오니 주님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B. 주기도문의 주체 

1. 용서받은 제자들 

그러면 이 주기도문을 주도록 예상한 일차적인 주체는 누구겠습니까? 이미 용서받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받아들여진 제자들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의 가르침이 나오기 전에 산상수훈이 꽤 길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그 나라의 백성인 제자들의 정체성, 이 어두운 세상에 살아가는 윤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주기도문을 받은 제자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까지 염두해 두고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한때는 살 수 있으나 항상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지 못하다는 것을 늘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가 매일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님 앞에 주님의 용서를 먼저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간청의 제목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준 것이 주된 간청의 제목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해달라는 기도가 주된 간청의 내용입니다. 용서 받았으나 지금도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허물 많은 제자들에게 주신 주기도문이었습니다. 

2. 유대인들과 다른 기도 

이러한 기도의 방식은 당시 유대인들이 드리던 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기도였습니다. 유대인의 기도의 개념은 신인보상 개념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이만큼 착한 일을 하면, 하나님은 내가 한 것만큼 갚아주셔야 할 의무를 가지신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던 유대인의 관습에서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수행하는 제자들의 의식과 방식은 충격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기도가 변질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언약신학에 대한 오해입니다. 구약에서 이 언약관계는 쌍방적인 관계를 염두 해 둡니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심에 넘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제하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복 주신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업적으로 해석을 해서 빚지고 빚을 갚는 것과 같은 관계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교의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외경에 보면 하나님께 선을 행한 것을 기초로 자기를 의롭게 여기면서 당당히 그 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 기도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예수를 따라 다니고 핍박을 받고 물질도 바칩니다. 그러나 모두 잊어버리고, 자기가 정말 천국 시민답지 못한 인간이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자기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인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것이 바로 복음적 영성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을 받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C. 죄는 무한한 빚임 

복음적 경건, 복음적 영성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셨지만 그리스도의 노예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셨지만 스스로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실감하기 위해서는 이 죄가 무한한 빚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나 자신이 스스로 일으켜서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이 딱 한 개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물 중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은 죄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리의 죄가 큰 죄이든, 작은 죄이든 상관없이 그 자체가 무한한 죄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 또한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고 하나님을 향한 대적입니다. 죄를 무한히 빚 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갚지 않으면 안됩니다. 

D.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 

1. 이미 받은 용서: 영원한 용서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영원한 용서와 경험적 용서를 구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인간과 만물을 보실 때 시간의 구애됨이 없이 한 번에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보심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은 과거의 죄 뿐만이 아니라 현재,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한번에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에 대한 감각이 변하기 때문에 은혜 많이 받은 사람도 죄를 또 짓습니다. 이미 용서하신 죄인데 시간 속에서 때가 되면 인간은 자기 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2. 반복되는 용서: 경험적 용서 

그래서 경험적 용서는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러한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용서를 통해 사랑, 의존 알게 함 

성경에는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또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탁월한 영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죄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안 사람입니다.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지만, 죄의 용서를 통해서 깨닫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III. 결론: 두 양식을 주심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고,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기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죄인을 향한 주님의 자비의 아름다움을 알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적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미천한 종교 생활을 보게 됩니다. 윤리적으로 많은 흠과 우리 안에 있는 탐욕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게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주신 것은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죄인이라도 십자가의 사랑만이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무한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은혜를 주십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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