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 삶을 바꾸는 ‘훈련’ (요 3:1-10)

첨부 1


우리 삶을 바꾸는 ‘훈련’ (요 3:1-10)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람 셋과 개 한 마리가 달리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은 개보다 빨리, 한 사람은 개와 나란히, 나머지 한 사람은 개보다 늦게 골인 지점을 통과했습니다.
사회자가 시상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개만도 못한 분. 
개 같은 분.
개보다 더한 분."
이 이야기는 기준에 대한 문제를 우리에게 시시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의 기준에 의해서 살아갑니까?

삶의 틀을 바꿔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 니고데모를 보면, 수없이 많은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본문 1절에 니고데모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라. 바리새인이라는 말 속에 그가 착실한 종교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예배자였을 것이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지도자의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본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에 채워지지 않는 문제 때문에 뭔가를 배우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게 됩니다. 
2절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삶이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뀌고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정도의 말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니고데모가 가진 삶의 틀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일이 오늘 일어나게 됩니다. 
이후에 나타나는 니고데모의 행적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예수님을 변호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담대함도 생깁니다. 비록 그가 예수님을 처음 찾아왔을 때는 “밤”이었고, 그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예수님을 찾아가 배운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그의 발걸음이 그의 삶을 영생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남과 훈련, 그리고 변화는 문제의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에게 있어 정말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표적이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놀라운 표적을 행하시는 그분이라면 답이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이죠.
우리의 삶에서 문제의식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때가 잦습니다. 성경에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문제의식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페이스북에서 채연희라는 분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문제가 없다고 부정하면 ‘정신병’ 
문제를 회피하면 ‘신경증 노이로제’ 
문제를 수용하면 ‘보통사람’ 
나 자신이, 내 삶 자체가 바로 문제라면 ‘성숙한 사람’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긴다면 ‘믿는 사람’

이 땅에는 삶의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삶을 바꾸기 위해서 끊임없는 훈련의 과정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니,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틀을 바꿔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은 삶의 틀을 바꿔놓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육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영원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무지했던 사람
2011년 11월 1일 조선일보 위클리 비즈에 [최철규의 소통 리더십]이라는 섹션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상황 1.
후반 10분을 남기고 스코어는 1대 0. 별 탈 없이 이대로만 시간이 흘러준다면 포항 스틸러스의 승리가 확실하다. 상대 팀이 선수 교체에 들어간다. 교체돼 나가는 선수가 어슬렁어슬렁 운동장 밖으로 걸어가자 포항의 선수들이 소리친다.
"빨리빨리 나가!"
상대 선수는 황당하다.
‘아니, 시간을 까먹을수록 자기들이 유리한데, 나보고 빨리 나가라니.’

포항 선수들의 ‘이상한 조급증’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기고 있든 비기고 있든 지고 있든, 그라운드에 쓰러진 선수는 용수철처럼 다시 튕겨 일어난다. 후배 선수가 심판 판정에 항의하려 하면 고참 선수들이 달려와 막는다. 코너킥, 프리킥 상황에서도 공만 놓이면 바로 킥에 들어간다. 백 패스? 후방으로 공 돌리기? 상상도 할 수 없다. 
프로축구 포항 스틸러스 선수들의 플레이가 이처럼 ‘빛의 속도’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스틸러스 웨이’라는 독특한 선수 평가 기준에 있다. 

지난 2008년 부임한 김태만 스틸러스 사장은 ‘어떻게 하면 K리그가 재미있을까?’를 화두로 잡고 고민했다. 그가 내린 답은 90분 경기 중 축구공이 정지해 있는 ‘dead time'을 줄이는 것.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데드 타임이 평균 32분이지만, K리그는 43분(2008년 기준)이었다. 그만큼 K리그는 불필요한 시간 끌기가 많았고, 이는 게임의 박진감이 떨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선수들을 불러 ‘빨리빨리 플레이하라.’라고 훈시하지 않았다. 대신 제도를 살짝 바꿨다. 게임에 이겼을 때 보너스로 지급되던 ‘승리 수당’을 없앴다. 대신 빠르고 매너 있는 경기를 하면 ‘출전 수당’을 지급했다. 빠르고 매너 있는 경기에 대한 평가는 코치 스카우터 경기지원 팀장으로 구성된 ‘평가위원단’이 맡았다. 평가위원단은 경기마다 데드 타임과 반칙 수 등을 분석했다. 속도감 있는 플레이 덕분인지 포항은 2009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왕좌에 올랐다.

상황 2.

"총장님! 학생들에게 아무리 알아듣게 얘기해도 도통 말을 듣지 않습니다. 더 이상은 말로 안 됩니다. 징계가 필요합니다." 
미국 컬럼비아대의 교무처장이 총장에게 목소리를 높인다. 문제의 발단은 잔디밭, 
학생들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놓인 잔디밭 위를 가로질러 도서관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지 않으면 2배에 가까운 거리를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교무처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총장이 한마디를 건넸다.
“길을 만들어 주세요. 잔디밭 한가운데를 관통하도록”
학생들이 규칙을 어기지 않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게임의 룰’을 바꾼 이 총장은 몇 년 후 대통령이 된다. 미국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인생의 틀을 살짝 바꿔주셨습니다. 육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던 것을, 영적인 눈으로 보도록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관심이 아니라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 호기심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가 무지한 것이 문제입니다. 영적 관심은 두게 되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사람이 니고데모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안 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해 봐도 인간은 절망 가운데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니고데모는 영적인 관심을 두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찾아왔던 이유는 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3절에 나오는데 별로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자!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의 아주 본질적인 면을 또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한 문제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오는 동기는 표적을 보고 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오기 전, 요한복음 2장에서 이미 기적을 행하셨는데,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영적 권위를 가지고 채찍을 휘두르시며 장사하는 자들이 더럽혀 놓은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도대체 저런 능력과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 호기심이 니고데모로 하여금 예수님을 찾아오게 했고, 그의 삶에서 해결되지 못한 영적 갈급함에 대한 답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의 방법과 기대를 넘어서는, 아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거듭나야 한다! BORN AGAIN"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보고 찾아왔는데, 그분은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의 경우처럼, 우리는 아주 영적으로 고차원적인 질문을 가지고 찾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문제가 지극히 육신적인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보게 됩니다.
기적을 보고 우리가 구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는 능력이 그분에게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본질적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죠.
네가 거듭나보면, 네가 구하는 것이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네 육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게 되리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그렇게 절실하게 구하는 기도의 제목들을 보면 “영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손을 대면 쓰러지는 것을 “영적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영적 체험은 우리의 내적인 자아가 변하는 것이지, 병이 낫고, 쓰러지고, 방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거듭나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적은 너무나 피상적입니다.
어쩌면 표적과 종교 중독증 환자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렇게 표적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시고,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것 때문에 따라오는 자들을 피해 다니셨습니다. 아니,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도록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세요.
기사와 표적, 병 고침 때문에 모였던 무리가 얼마나 오래갔는가? 그들은 기적이 사라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 기적을 바라고 따라다녔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오늘 “거듭남”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던 니고데모는 십자가의 현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중의 하나가 어떤 집회에 가서 손을 대면 쓰러진다고 하는데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머리에 손을 대고 쓰러뜨리는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것이 당신이 영생을 얻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당신의 병이, 암 덩어리가 기도하고 나았다는 것이, 영생을 얻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신앙의 표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구하는 것이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45절 말씀을 보세요.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To do" or "To be"?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착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삶의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어제 결혼식 주례를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한 교인이 오픈한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물건을 팔던 직원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물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시나요?”
그런데 대답을 쉽게 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교회학교 교사도 하고 열심히 다녔는데, 신앙에 회의가 들어서 이제는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새벽예배를 갔다 오던 길에 이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그렇게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이모를 사고로 죽게 만들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죽는 것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원한 존재를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꼭 살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존재가 죽음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지요.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장경동 목사님이 방송에 나와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To do"와 "To be"의 차이인데, 우리는 자꾸 무엇을 해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실상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가 더욱 중요한데 말입니다.
우리는 병이 나으면 문제가 해결되고, 돈이 있으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근원적인 우리의 모습이 변하지 않고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둑놈이 변해야지 도둑질이 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결국은 “존재”의 문제이지 “소유”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 충분합니다. 자신이 이루어 놓은 지위가 괜찮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행복감과 만족이 없지요. 
많은 것을 채우려고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찾아온 이유도 사실은 "To do"의 문제이지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그런데 예수님은 "To be"의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너의 존재가 거듭나야 한다."라는 것 말입니다.

이제 당연한 질문이 이어지겠지요.
거듭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상식적으로 다 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태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적으로 대답하십니다. 

6절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이 뜻하시는 것은 육적인 거듭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끝나지만, 이제 성령으로 거듭나면 “영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8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니고데모는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지식의 한계입니다. 영적인 세계는 육적인 지식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답답하셔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본문 10절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이 모른다고 그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는 지식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객관적 사실이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무지개가 일곱 색깔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민족이 훨씬 많다는 것이지요. 요즘 아이들은 딸기가 봄철에 나는 과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도네시아 아리안 자야 선교사로 사역을 하던 김연수 선교사님의 책 [삶을 변화시킨 끄웨르바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아이가 5개월이면 태어난답니다. 그 부족들에게 아이들이 몇 개월에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대부분은 5개월에 개중에 6개월에 나온다고 생각을 한답니다. 
그래서 애는 본래 9개월이 되어야 한다고 했더니, 한국 사람들이나 외국 사람들은 임신을 더 오랫동안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답니다. 
그들은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는 데서 임신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병원에 가면 사람들이 더 빨리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병원에 간 사람들 대부분이 죽어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유를 보면, 이 사람들은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해서 자신들이 할 방법을 다 해보고, 참고 참다 안 되면 다 죽을 때가 되어 병원에 가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들의 믿음이 얼마나 우매하다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참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요.

오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아주 중요합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드립니다. 로마서 10장 10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어떻게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것이냐, 그리고 그곳에서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영적이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세계가 피상적인 만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멀리서 보았던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의가인격적 관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죠.

나무공동체가 주는 유익!
니고데모에게는 문제를 안고 찾아갈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나는 요한복음 14장에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한, 영적 지체들을 통해서 영적 만남이 가능합니다.

잠언 27장 17절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나무공동체를 통해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두 가지의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속감’이고, 또 하나는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해 여러분이 훈련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언에서는 부대끼므로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무뎌진 쇠를 갈 때 무엇을 사용하나요? ‘쇠’를 사용합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다른 나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일입니다. 쇠를 가는 부대낌이 때로는 버겁고 아프기도 합니다. 불꽃이 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쇠를 날카롭게 만들고 쓰임새 있게 만드는 것은 때로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딱딱한 철을 만났을 때가 아닌가요?

영적인 세계는 놀랄만한 전염성이 있습니다. 숯이 불에 닿으면 달궈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영적 운동의 진원지에서 역사가 번져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지체들을 통해 우리가 도전을 받습니다. 그들을 통해 받은 도전이 때로 우리를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세계 가운데 갈급함이 생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 중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무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늘 좋은 일이 일어나고, 늘 위로함을 받고, 늘 사랑을 받고. 
그것은 삶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언젠가 제가 진정한 공동체란, “우리가 정말로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공동체란 삶이 숨 쉬는 곳입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세요. 요즘 우리나라는 20-30대 나라와 40대 이후 나라로 극명하게 갈라져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해가 잘되지 않는 세대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문제는 다르다는 것 때문에, 용납하지 못하고, 무례하기 때문입니다.

만나 교회 훈련이 새가족 교육부터 시작하는 것은 같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기 위한 것입니다. 종종 만나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전의 삶의 스타일, 신앙 방식을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수용할 수도 있어야겠지요.
제가 군에 있을 때, 여러 명의 병사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군에 왔는데 군인정신을 가지지 않고 ‘제정신’ 가지고 하려니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군대에서는 군인정신이 필요한 것이죠.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했을 겁니다. 다른 환경에 가면 내 주장을 하기보다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방식을 익히는 것이 올바른 것이겠죠.

여러분이 만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꼭 해야 하는 훈련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영적인 면에서,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BTD와 변화산 기도회는 만나 교인들의 영성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고, 동일한 영적 교통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영성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존 비비어의 ‘은혜’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섬기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BTD 영성훈련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한 번쯤 진지하게 영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해주고, 그분을 만나 삶의 turning-point를 경험하게 합니다. 물론 이 영성 훈련으로 한 번에 우리의 신앙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훈련을 통해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게 되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 목회 사역에서 가장 우선순위를 꼽으라면 영성훈련과 변화산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스케줄에서 늘 제일 먼저 채워놓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담임목사와 함께 3일을 보내며 영적인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제가 교인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영성 훈련을 통해 맺어진 관계들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또한, 변화산은 영적 체험과 훈련의 산실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만나 교회 목회를 처음 시작하면서 “영적 리더십”을 위해 기도했고, 처음 3년 동안 금식하며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때 교인들이 저를 위해 많이 기도해 줬고,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깨닫게 하신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금식기도 중 환우들을 위해 기도할 때, 저에게는 무척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기대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래서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이 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제가 종종 그런 말을 하죠. 
"BTD와 변화산을 참석하지 않고 만나 교인이라고 말하지 마라!"

다른 하나는 훈련의 측면에서 중요한데,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는 영이신 예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그다음에 그 방식을 따라가기 위해 기술적인 면이 필요한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practice'가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에서 결단하고, 결정하고,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언젠가 장로님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느낀 건데, 장로가 돼도 제일 힘든 게 매일 일상에서 부딪치는 일들이라는 것이죠. 운전하면서, 주차하면서 말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운전하면서 “예수님처럼 해보자!”라고 했는데 번번이 좌절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 운전을 하셨더라면 성경에 “운전하는 법” 이렇게 나와 있을 텐데 말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주차문제로 화가 날 때면 “예수님이라면 이런 때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는 데 답이 없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매너 없이 남의 집에 주차를 하고, 그렇게 친절하게 전화를 해서 차를 좀 빼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 사람들 말입니다. 성경공부를 하다가, “예수님이라면”
이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1. 예수님이라면 아예 건물을 짓지 않으셨을 것,
2. 예수님이라면 아무리 화가 나도 차를 그냥 대도록 하셨을 것,
3. 예수님이라면 그 못된 차를 "없어져라!"라고 명령하셨을 것.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말씀의 훈련은 우리에게 정답을 만들어 내는 공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고민하게 하는 성품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고명진 목사가 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20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떤 검객이 칼을 집에 놓고 나왔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칼을 든 강도가 있는 것 다 내놓으라고 협박을 합니다. 
검객은 “네 이놈! 내가 누군 줄 아느냐?”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러나 강도는 웃으면서 “잘 모르지만, 나에게 귀중품을 바칠 사람인 것은 안다.”라고 조롱합니다. 
검객은 “우리 집에 칼이 있다!”라고 말하자, 강도가 또 조롱합니다. “칼도 없는 검객이 살았구나!” 하면서 검객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죠. 집에 아무리 칼이 있어도 몸에 지니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것을 깨닫게 되시나요?
말씀이 나의 삶에서, 내 마음속에서, 내 머릿속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죠. 
우리 교회에서 요즘 하는 운동 중의 하나가 QT 훈련입니다. 그리고 그 훈련을 통해 “나무생각”으로 매일 우리의 삶에서 적용하게 하죠.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 우리의 심령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다는 것.”
말씀을 삶에 잘 적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QT 훈련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볼 수 있도록 가르치는 학교가 있습니다. 
또한, 주일에 들은 말씀을 일주일 동안 매일 적용할 수 있도록 [나무생각]이라는 QT 책을 통해 여러분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하 사람, 또는 신앙의 기본을 다루기 원하는 사람을 위해 1:1 제자 양육과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문제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위기와 중요한 순간을 지날 때마다 말씀을 적용하는 공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움직여 나갈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여러분의 삶을 바꿔보고 싶은 욕망이 없으신가요?
삶을 바꾸는 훈련을 한번 시작해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