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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산할 때가 있음을 아십니까? (고전 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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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할 때가 있음을 아십니까? (고전 3:10-15)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아주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가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과 가르침들이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의 소유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거저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관리하도록 맡긴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겼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마태복음 25:19) 달란트를 나눠받은 종들은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하자고 할 때까지 자신들에게 맡겨준 것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주인을 위해서 말입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할 때에 잘 관리했던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따르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땅에 감추어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때에는 책망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결산의 목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동안 맡겨준 것을 잘 관리한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급을 주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책임을 물어 심판을 내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도 같은 교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주인이 청지기에게 결산하자고 통보를 합니다. 그 때까지는 주인의 것을 낭비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썼던 청지기는 주인이 결산하자고 통보하자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허랑방탕하며 사용했던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낭비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그게 결산할 때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급을 위한 심판이 있습니다. 어느 심판이든지 간에 우리 인생은 반드시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누구나를 막론하고 반드시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내가 행한 대로,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심판을 준비하며 사는 우리의 인생을 ‘건축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이고, 오늘 신앙의 삶을 산다고 말하는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10-11절에서 ‘건축자가 집을 지어야 하는 터가 있는데, 그 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는 건축자들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동일합니다. 
  
문제는 그 터 위에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집을 짓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함으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믿음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먼저 건축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터를 견고하게 닦아 놓았습니다. 이 터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터 위에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신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0절 마지막에 기록된 ‘조심하라’는 단어는 아주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결산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터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건축하는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두 종류의 재료를 가지고 건축합니다. 하나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나 풀이나 짚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런 재료를 사용해서 짓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금으로 집을 지으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인도나 태국 등에 ‘황금사원’이라고 불리는 사원이 있다고 합니다. 금으로 지은 것입니다. 도금을 했든지 순금으로 지었든지 간에 그런 집을 짓는 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황금사원은 한 나라에 한두 개 정도 있는 것이지, 보통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지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정말로 우리에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으라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런 집을 짓지 못한다고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으라고 말씀한 것은 실제로 그런 재료를 사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들로 정성을 모아 인생의 집을 지으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금으로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 집을 짓는 사람이 대충대충 짓진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싼 재료를 사용해서 집을 짓는데 얼렁뚱땅 대충 지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누구든지 자신의 집을 짓는 데 대충 짓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만, 정말 귀한 재료로 집을 짓는다면 더더욱 대충 지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숭례문 화재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인 숭례문(남대문)에 지난 2008년 2월 11일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복원공사가 왜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돈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재료를 구입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을 대충 복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원에 쓰이는 나무가 소나무입니다. 그런데 일반 소나무가 아니라 금강송이라고 불리는 소나무만을 사용해서 복원을 합니다. 금강송은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어 함부로 채벌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런 나무로 숭례문을 복원하는데, 복원작업을 할 때에도 전동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기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쉽고 빠르게 복원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힘들게 복원을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건물은 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요되는 비용도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시간도 많이 필요합니다. 또 노력도 그만큼 많이 해야 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이 그렇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짓기가 쉽습니다. 대충 기둥만 세워놓고 나뭇잎이나 풀 등으로 지붕을 덮기만 하면 금새 집 한 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손쉽게 지은 집은 가치가 없습니다. 또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때에 불로 그 공적을 밝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3절의 말씀입니다. 불로 공적을 밝히게 될 때 그 불에 타 없어져버리면 그가 쌓은 모든 것을 다 사라지고 맙니다. 불에 타 사라져버린다면 그것은 아무런 공적도 남지 않습니다. 헛수고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쉬운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쉬운 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쉬운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쉽고 편한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요 모욕과 핍박을 당하는 길입니다. 
  
신앙생활을 쉽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쉽고 편안한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진 후에 주어지는 생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쾌락을 즐기고 사는 것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하늘의 기쁨이 아닙니다. 땅의 기쁨입니다. 그 땅의 기쁨은 하늘을 소유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물을 많이 얻을 수 있다면 고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생은 하늘의 상급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출세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온갖 고생 끝에 출세하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타 없어지지 않는 공적으로 우리에게 남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며 사는 삶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비록 그 삶이 좁은 길처럼 힘들고 고난이 따르는 삶일지라도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성공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는 아니라는 사실은 잊지 마십시오. 남들보다 더 멋진 삶을 사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세상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부유하게 사십시오. 그러나 그 부유함이 영원히 내 것이라고는 착각하지 마십시오.
  
1923년 시카고 에드워드 비치호텔에 미국의 거부 7명이 모인 모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임이 세간이 관심거리가 된 것은 그 7명의 재산을 다 합치면 당시 미국 정부의 재산보다 더 많다고 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갑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모임 이후 25년이 지나서 한 기자가 그들의 말년을 추적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 강철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슈억은 거지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 밀농사의 거부였던 알써 카튼은 사업이 파산되고, 고독하게 임종을 맞고 있었습니다.
- 뉴욕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감옥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 재무장관이었던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나와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웰스프리트의 회장이었던 J. C. 리버모아는 자살로 인생을 끝내고 말았고, 
- 국제은행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자기의 삶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 부동산업 거부였던 이반 쿠루컬은 자살미수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한 때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들이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에는 그 누구보다도 비참한 생애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가치는 결국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부유하려 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려 노력합니다. 심지어 신앙을 가진 우리들조차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인생의 집을 건축하는 사람들인 우리들이 세상의 가치에 따라서 집을 지으려 합니다. 세상의 화려함을 닮아가고 싶어 안달하고, 세상에서의 칭찬과 박수를 받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는 분’이라고 소개했습니다.(마태복음 3:12) 타작마당에서 손에 키를 들고 키질을 하는데,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십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우리의 삶 가운데 쭉정이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키질을 하신다면 우리의 모습들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바람에 날아가버릴 쭉정이가 분명 있습니다. 겉은 그럴 듯합니다. 어쩌면 알곡보다 더 화려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키질을 할 그 때에는 무엇이 알곡이고 무엇이 쭉정이인지 분명하게 가려질 것입니다. 알곡은 창고에 쌓이게 될 것이지만, 쭉정이는 불에 태워지고 맙니다. 
  
여러분, 쭉정이를 끌어안고 살지 마십시다. 마지막 주님께서 우리에게 결산하자 하실 때에 바람에 날려 불구덩이에 들어가 다 태워져버릴 쭉정이처럼 살지 마십시다.

우리가 왜 쭉정이와 같은 모습을 끌어안고 사는지 아십니까? 불에 타 사라져버릴 것을 끌어안고 사는 이유는 주님께서 키질 하실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이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주님께서 언젠가 결산하자고 말씀하실 때가 반드시 올 텐데,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 때를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일부러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잊으려 해도 ‘결산할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그 때가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갈 그 때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부유함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런 것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다 이 땅에 내려놓고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도 그 때에는 어깨에 힘 다 빼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중간정산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에만 결산의 때가 아닙니다. 때때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에도 결산하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준비할 여유도 주지 않으시고 결산하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결산하자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쉬운 길로 가고 싶어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에 따라 살라고 하는 세상의 압박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죄 가운데로 끌고 가려 하는 옛사람의 성품을 벗어야 합니다. 

독일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4세기 초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 황제의 비서실장이었던 한 공작이 있었습니다. 황제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총리로 발탁했습니다. 총리가 된 후 그는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방탕하고 포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신들과 함께 사냥을 갔다가 숲속에 있는 한 작은 교회를 발견하게 되었고, 교회에 들러 잠깐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드는 순간 강대상 뒤편 십자가 위에 밝은 빛과 함께 ‘3’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그는 이 ‘3’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내게 남겨진 날이 3일 밖에 없다는 뜻이구나.’ 3일 후면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처럼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남겨진 3일 동안 천사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고 겸손하게 황제와 국민들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포악했던 행동을 돌이켜 주변 신하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다가 3일이 지났습니다. 이제 죽음의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친절한 삶, 성실한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개월이 지나고 3년이 지났습니다. 3개월이 되었을 때에는 그 숫자 ‘3’이 3개월을 뜻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아무 일 없이 3개월이 지나자 그 숫자 ‘3’이 3년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부르심을 받아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으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치 천국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산 지 3년이 되었을 때, 황제가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후계자가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황제는 이 총리를 다음 황제로 세워달라고 유언을 하게 되었고, 온 백성들과 신하들은 황제의 그 유언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1314년 프랑크푸르트의 다섯 제후들은 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루드비히 4세입니다.

여러분, 결산의 때를 잊고 살 때에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게 됩니다. 내 욕심껏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산할 때가 있음을 아는 순간 우리는 우리 인생을 헛되이 살 수 없습니다. 곧 결산의 때가 다가오는데 어찌 헛되이 살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도 곧 결산할 때가 임박했음을 알고는 사치하며 낭비하던 삶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결산한 이후 자신이 살아갈 삶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대비해야 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며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던 불의한 청지기도 결산할 때가 임박했음을 알자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결산하자고 하실 때가 곧 임박해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때가 오지 않을 것처럼, 그 때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산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우리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말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로 비유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삶을 헛된 것을 위해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이것이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선언한 ‘인생사명선언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고한 터를 닦아 주었습니다. 그 위에 아름답고 멋진 신앙의 집을 짓도록 터련 마련해 준 건축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다 마쳤을 때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 4:7-8) 

그는 복음 증거 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그런 믿음을 변치 않고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책망이 아니라 칭찬과 함께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삶을 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돌아오지 않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과녁을 향해서 쏜 화살이고, 둘째는 급하게 해버린 말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기회입니다. 기회는 지난 후에 아무리 아쉬워한다 하더라도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기회는 언제입니까?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좋은 기회가 오면 하겠다고 내일로 미루고 오늘의 시간을 허비하면 그 허비한 시간 속에 기회도 함께 지나가버립니다.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젠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때 성공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로또복권을 사놓고 로또복권 당첨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언젠가 오겠지 하고 기다릴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오늘 벌이가 시원치 않을지라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돈벌이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하게 기억하십시다. 성공하는 것도 좋고,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다 불에 타 없어져버릴 것을 위해서는 살지 않아야 합니다. 서공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돈을 벌어 어디에 어떻게 값있게 쓸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는 건축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와 같은 터 위에 집을 지으면서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어서야 되겠습니까? 터에 걸맞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야 어울리는 집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무엇으로 집을 지을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여 지은 모든 것이 다 불에 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산의 때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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