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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고전 1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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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고전 10:10-13)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한 사람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게으를 뿐만 아니라 늘 불평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상살이가 어떠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부지런한 사람은 ‘힘들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서 자신은 단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살던 집은 너무 좁아서 불편했고,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돈을 마음껏 써 보지 못했고, 자식들은 효도하기는커녕 속을 썩이기만 했고, 남편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거처할 곳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운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땅은 세상에서 보지 못한 아름다운 신천지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역시 하늘나라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감탄하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선 일하기 시작했고, 그는 곧 아름다운 집과 정원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무슨 하늘나라가 이러냐’며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계속 투덜댔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잘 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집은 곧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차고, 집안 구석구석에 벌레들이 들끓게 되었고,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벽은 금이 가고, 집이 말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불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차라리 세상이 더 좋았다며 한탄만 거듭했습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너희 두 사람에게 똑같은 조건을 주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조건으로 천국을 건설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조건을 갖고서도 지옥을 만들었구나.” 그러자 불만 가득한 사람이 하나님께 따져 들었습니다. ‘천국은 즐기며 노는 곳이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곳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천국을 오해하지 말거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땅의 법칙이 아니고 애초 천국의 법칙이었다. 천국의 법칙과 방법으로 살면 그 사람은 지옥에서도 천국을 건설하며 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국을 거저 주어도 지옥으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여러분, 천국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분명한 것은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찬 곳에는 천국이 건설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자주 불평과 원망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불평’은 환경이나 여건이 내가 바라고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불평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원망’이 생겨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원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광야생활하던 중에 저질렀던 여러 가지 죄된 모습을 지적하는 말씀 가운데 일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중에 저지른 죄악이 크게 네 가지가 있는데, 우상숭배와 음행과 하나님을 시험한 것과 원망입니다. 

이 네 가지 죄악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많이 저지른 죄악이 원망입니다. 그 말은 곧 우리 역시 원망의 죄를 저지를 가능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비단 그들만의 특수한 모습이 아닙니다. 광야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광야와 같은 오늘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나 아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지난 날 광야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거울 삼아서 우리는 그들이 저지른 그런 잘못된 모습을 반복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들이 저지른 죄와 잘못을 동일하게 반복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가장 먼저 저지른 죄가 원망이었고, 또 광야생활 내가 가장 많이 저지른 죄 역시 원망입니다. 그들은 애굽을 빠져나오기 전부터 원망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다다랐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을 허락한 바로 왕은 자신의 판단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는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병거 600대와 마병을 비롯한 많은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쫓아 가는데, 이스라엘은 마침 홍해 앞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애굽의 군사들이 자신들을 뒤쫓아 오는 모습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모세를 향해 이렇게 원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출애굽기 14:11)
  
이 말은 지금 당한 상황이 모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기 때문에 이런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도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길을 홍해로 인도하였습니다.(출애굽기 14:2) 그런데 지금 애굽의 군사들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애굽의 군사들이 밀어닥치면 자신들은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그 막강한 애굽의 군사와 싸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홍해를 건널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지금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예견되는 상황은 애굽 군사들의 칼날에 다 죽는 것 뿐입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을 이곳으로 인도한 모세, 그리고 그 모세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탈출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끔찍하게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지 못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건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기 위해서 하신 일들은 어마어마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권능을 행하셔서 그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바로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재앙이 게속되는데도 강퍅한 바로의 마음에 변함이 없자 마지막에는 애굽의 모든 장자를 다 죽이셨습니다. 짐승의 첫 새끼까지도 죽이셨습니다. 왕궁에 있는 바로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로의 몸에서 태어난 첫 아들도 죽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결국 하나님께 손을 들고 말았고, 이스라엘은 지긋지긋한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놓여 해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광야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21-22) 이미 홍해 앞에 도달하지 전 애굽의 사막을 가로질러 올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준비시켜 그들을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뜨거운 사막의 태양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추운 사막의 밤의 혹한으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신으로 추앙받던 애굽의 바로 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셨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미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무서운 기세로 뒤쫓아 오는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불안했고, 이런 상황을 맞게 된 것에 원망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계시해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많이 묵상했습니다. 또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들 동안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은혜 베풀어주시고 도우심의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수없이 경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오늘 우리의 삶에 어려움을 만나면 지난 날 나를 도우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 지난날에 대한 망각이 우리로 하여금 내 삶에 대해 불평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마음을 품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난 날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힘들 때 나를 도우신 하나님을 기억할 때, 오늘의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떠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내 손을 꼭 붙잡고 계시고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날 자신들을 도우신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 취한 특별한 행동이 있습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것 역시 홍해를 건넌 것만큼이나 그들에게 감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요단강 물이 최고조에 이렀을 때이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건넘과 같이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요단을 건넌 후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 바닥에서 주운 돌 12개를 가져오라고 해서 길갈에다가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그것은 요단강을 건넌 이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후손들이 이 돌무더기다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 주시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광야생활 40년을 마친 후에 이 요단강을 건너 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셔서 홍해를 건널 때와 같이 우리 조상들을 건너게 하셨다. 너희는 우리 조상들에게 기적을 베푸신 그 하나님을 떠나서도 안 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만일 돌무더기가 없다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을 행하신 그 역사적인 현장을 지나면서도 아무 의미 없이 지나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돌무더기를 쌓아놓으면 지난날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능력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해 내며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들어줍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에벤에셀’(사무엘상 7:12)이라는 돌 기념비를 세운 이유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우리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큰 사건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경험한 10가지 재앙, 특별히 유월절에 죽음의 천사가 온 애굽 전역을 돌며 장자를 죽일 때 집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만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갔던 그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입니다. 그런데도 홍해 앞에서는 그것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역사를 행하셨던 하나님, 그 능력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지금 자신들을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내몬 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홍해를 건넌 지 불과 사흘 만에 그들은 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출애굽기 15:24) 그리고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는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또 원망했습니다.(출애굽기 16:2) 
  
기적과 같이 홍해를 건넌 지 불과 3일 만에,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군사를 다 홍해에 빠뜨려 죽게 만드신 그 엄청난 경험을 한 지 불과 3일 만에 그들은 또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 그 능력의 하나님을 기억했더라면 그들은 원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실 물이 없다고 부르짖어 기도는 할 수 있을지라도, 원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르짖어 기도하기보다는 먼저 원망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마시게 하신 하나님께서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굶어죽게 하려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다면 이미 그전에 그들을 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굶어 죽게 하시지도 않을뿐더러,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려움을 만나면 그곳이 자신들의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원망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리고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2절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불평의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을거야. 나에게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을거야.’ 그렇게 장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지금은 믿음이 확고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믿음이 언제 사그라질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되뇌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망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 날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런 은혜를 동일하게 베풀어주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망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거기가 무덤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홍해 앞에서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어 이제는 목이 말라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다 떨어지자 그 광야에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하겠느냐고 이제는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뒤쫓아 올 그 때, 홍해에 빠져 죽거나 애굽 군사의 칼날에 죽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습니까?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을 것만 같았을 때, 정말로 목이 말라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을 것만 같았을 때, 정말로 굶어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나도 없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어도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는 사람 하나도 없었고, 굶어 죽는 사람 하나도 없었습니다. 뜨거운 사막의 태양 때문에 견디지 못해 쓰러져 죽는 사람도 없었고, 살을 에우는 듯한 사막의 저녁 찬바람에 얼어 죽은 사람 역시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곳이 결코 우리의 무덤이 되진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당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한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어려움 당했다고 낙심하거나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한다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데, 우리 스스로 나는 힘이 없다고 생각해버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나 어려움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또 그런 시험이나 어려움을 당했다면 반드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반드시 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또 다른 방법은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큰 시험이나 어려움이라면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홍해를 가를 수 있는 능력도 없고, 홍해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이나 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뒤쫓아 오는 애굽의 군대와 싸울 힘 역시 없었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거기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피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피할 길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때론 정말로 내 힘이나 지혜로 풀어갈 수 없는 큰 문제나 어려움이 내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망은 하지 마십시다. 정말로 내가 풀어갈 수 없는 문제나 어려움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가르시고 우리로 건너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들을 겪은 후에는 우리를 더욱 큰 축복의 세계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앞에 당한 어려움, 시험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한 오늘의 고난은 이유 없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을 담은 보따리입니다. 우리가 당한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욱 큰 세상으로 가기 위한 관문입니다. 
  
그러기에 고난이 닥친다면, 풀기 힘든 문제나 어려움이 내 앞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원망할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베푸실 축복을 기대하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어려움 끝에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선물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어려움을 끝냈을 때 그들 앞에는 약속의 땅이라는 축복의 선물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괜히 고생의 길로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경험했던 수없이 많은 은혜들도 축복이요, 그들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역시 축복의 선물입니다.

여러분, 2012년 우리가 살아갈 올 1년의 삶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고난의 강을 건너야 할 때도 있고,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가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문제로 인해 낙심될 때도 있고,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해 불안한 마음에 가슴 답답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그 모든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의 무덤이 아닙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그러기에 원망하지 마십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선물로 예비해 놓으셨음을 기억하고, 그 선물을 소망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실 은혜, 내 삶에 베푸실 기적을 기대하며 소망 가운데 사십시다. 원망은 우리의 삶을 패망하게 만들지만, 어려움 중에 갖는 믿음의 소망은 우리를 승리하게 만들어줍니다. 고난 중에 갖는 소망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을 얻게 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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