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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행하시는 하나님 (사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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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시는 하나님 (사 43:1-7)

사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땅에 속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땅에 목적을 두는 사람과 하늘에 목적을 두는 사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 물질에 속한 사람과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믿음의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 1900~1980)은 1977년에 『소유냐 존재냐』라는 저서를 통해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시작으로 참다운 자아실현을 위한 두 가지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인류의 불행과 고통은 지나치게 소유에 목적을 두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항상 고립되어 불안하고, 긴장하고, 갈등하고, 대립하며 평안과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존재에 목적을 두는 삶은 항상 내 안의 속사람을 생각하며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가정을 귀히 여기고, 부모님을 귀히 여기며, 어려움 속에서도 형제간에 우애하며 살아갑니다.

요양원이나 양로원에 있는 노인들의 70%가 자식이 있는 분들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자식들이 잘살아도 부모를 모시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소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모시면 불편하고 손해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으면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 낳고, 결혼하면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맞지 않고 손해가 되면 같이 살지 않습니다. 가족과 이웃의 소중한 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한국인의 힘이고 에너지인데 소유에만 집착하고, 물질을 우선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소유에 집중하면 여유가 없습니다

소유는 끝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고 할 때는 화장도 지나치게 하고, 향수도 몇 번씩 뿌리고, 친절을 베풀며 최선을 다하지만, 자기 소유가 되고 나면 전혀 치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유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더 이상 잘 보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소유에 목표를 두는 사람은 끝없이 더 가지려고만 하고, 더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올라간 다음에도 만족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만족이 없고, 결혼을 해도 만족이 없고, 정치에도 만족이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온 국민이 땅의 것, 물질, 소유, 이기심 쪽으로 급속하게 방향전환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소유하기에 바쁘면 부모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본질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본질에 목표를 두면 형편이 어려워도 부모와 형제에게 잘할 수 있습니다.

설령 세상을 다 가졌다 해도 보이는 것은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왔다가 다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높은 지위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여 영원히 가지려는 욕심으로 철조망을 둘러쳐도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다 가지려는 생각은 욕심일 뿐입니다. 다 가질 수 없으며, 다 가져도 불안합니다. 가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벌써 평안이 없습니다. 경쟁 속으로 들어가 조금만 안되면, 보이는 것이 떠나가면 낙심하고 좌절하여 그만 자살해 버립니다.

소유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나의 위치와 영적인 존재를 우선하고 소유하면 부작용이 없습니다. 부모도 무시하고, 양심도 팔아먹고, 신앙도 팔아먹고, 하나님 없이 오래 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43장 1-2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길은 광야의 길과 같습니다.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는 험한 세상길입니다. 쉽게 살 수 없습니다. 물질만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권력으로도 안 됩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교인에게는 여유가 있습니다. 물질이 없어도 마음에 부유함이 있습니다. 소유에 집중하는 사람은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남에게 베풀 여유가 없습니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로 배려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MBC 창사 50주년 특집으로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 1부 ‘얼음대륙의 황제’ 편이 방송되었습니다. 황제펭귄은 1년에 한 번밖에 알을 낳지 않습니다. 알을 낳은 암컷은 곧장 수컷에게 알을 건네주고 먼 바다로 영양을 보충하러 떠납니다. 수컷은 두 발등 위에 알을 올려놓고 품습니다.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살인추위에 알이 발등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1분 만에 금세 얼어버리기 때문에 뱃가죽으로 덮고 눈만 먹으며 알을 품습니다. 마침내 부화하면 위 속에 저장되어 있던 펭귄밀크를 먹이며 암컷이 돌아오기까지 넉 달 동안 배고픔과 추위를 견딥니다.

눈폭풍이 불어와 추위를 견딜 수 없을 때는 ‘허들링(Huddling)’을 하면서 추위와 맞섭니다. ‘허들링’이란 펭귄들이 무리를 지어 몸을 밀착시키고 옆으로 조금씩 움직여서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인데, 안쪽의 온도가 10도나 더 높다고 합니다. 이때 바깥쪽과 안쪽의 펭귄들이 최소한의 체온을 유지하며 알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허들링’을 합니다. 미물인 펭귄들이 어쩌면 이렇게 서로를 배려하는지, 한 장면 한 장면이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질에 충실하면 동물도 제 길을 잃지 않고 아름답게,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본질에 목적을 두고 살면 사회가 절대로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초등학생들도 서로 폭행하고 죽이는 세상이니 이 무슨 난리입니까? 모두들 자기 이익, 자기 성공, 자기 기쁨, 자기만족만을 앞세우기 때문에 사회가 뿌리까지 깊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본질에 충실하면 절대로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부모님 모시고 어렵게 산다고 해서 아이들이 탈선 하지 않습니다. 본질에 충실한 가정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영적인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 급격하게 잘못되어 가는 이 사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의 도움은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힘이 나고, 여유가 생기고, 담대해지고, 능력이 생깁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제각각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유전자가 다르고, 음성도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맞는 특별한 아름다움과 능력과 보화를 감춰 두셨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자식이 부모를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서양교육과 동양교육의 차이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양교육은 가르쳐서 선생님을 따라오게 만들지만 서양교육은 선생님이 제자들을 따라갑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을 계발하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찾게 만들어서 큰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요즘은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대부분 의대나 법대로 보냅니다. 지금은 의대나 법대보다는 우주공학에 눈을 돌리고, 과학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 우주과학의 시대에 자연과학과 물리학 쪽을 등한시하는 대한민국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쏠림현상이 너무 많습니다. 보신탕집이 잘되면 너도나도 보신탕집을 내고, 순두부집이 잘되면 모두 순두부집을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지혜를, 내 안에 있는 보화를 찾아야 합니다. 내 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능력, 누구도 갖지 못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새사람이 되고 은혜를 받은 성도의 삶은 이전의 각박한 삶이 아닙니다. 이제는 너 죽고 나 죽고의 삶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은혜가 많고, 기쁨이 많고, 여유가 많은 삶을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이 살았지만 오늘보다 더 기쁘게 살았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소유에 목적을 둔 사람은 늘 불안하며,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늘도 기쁘고, 앞으로도 계속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항상 여유가 있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평안을 누립니다.

오늘 이 본질의 문제는 바로 존재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고 상처도 받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낙심하지 않고 세상에서 승리할 줄로 믿
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여러분의 가정에 큰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의 날, 모든 성도들이 아버지 앞에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심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이심을 믿고 경외할 때에 우리의 길을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금년 1년,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피곤치 않도록 발걸음마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시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함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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