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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파수꾼의 책임 (겔 3:12-21) -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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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의 책임 (겔 3:12-21)

공학을 전공했으면서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묻는 분들이 그동안 무척 많았습니다. 커리어를 바꾸게 된 무슨 특별한 사건이나 동기가 있었는지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암에 걸리신 것이 믿는 계기가 되었지만 목회의 길로 들어선 것은 무슨 특별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조금씩 부담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사인인지 몰랐습니다. 1989년은 마침 저희가 결혼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 인지라 저희 부부가 무엇인가 주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와 함께 일할 직장으로 학교를 갈 것인가 아니면 석유 회사를 갈 것인가 진로를 놓고 기도하는데 어느 때부터 인가 직장에 대한 관심은 점점 사라지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리더십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리더에게 당신의 뜻을 보여주실 때 double confirmation, 즉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나 사건을 통하여 이중 혹은 삼중으로 확신을 주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까지 여러 차례 confirmation을 받았습니다. 제가 Maryland 대학에서 post doctor 과정을 할 때였습니다.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아내와 아이들은 샌디에고에 있는 처갓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학교 일 때문에 며칠 동안 집에 혼자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의 여전도사님이 권사님들과 함께 한국에서 온 어떤 목사님의 부흥집회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왔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에스겔 3장을 자꾸 주라는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왜 자기에게 이 말씀을 전하라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이 본문을 가지고 한 번도 설교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은 지 22년 만에 처음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부르심은 구원의 은혜와 함께 사명의 부담을 포함합니다. 그러한 부르심은 말씀을 읽는 중에 기도하는 가운데, 설교를 듣는 가운데, 형제자매와 교제를 이어가는 중에 느끼게 됩니다. 어떤 이는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은 분들의 도움을 얻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연처럼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소명을 받는 과정에 적당한 갈등과 고민을 거치기도 합니다. 그 혼란의 요동 중에 확신의 강한 빛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분의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경건 생활 중에 다양한 모습으로 들려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사용하시고 교회를 세우는 자로 지금도 부르십니다. 말씀을 전하고 영적인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본질상 말씀의 전달자로, 파수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그 말씀을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파수꾼으로 분별력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할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에스겔을 담대하게 하십니다(3:1-11)  

선지자 에스겔의 이름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실 것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 출신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는 그의 나이 30세로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5년째 되던 주전 593년이었습니다. 

당시 남왕국 유다는 주전 605년에 바벨론의 1차 침략으로 다니엘과 많은 지도자들이 바벨론으로 붙잡혀 갔고, 2차 침략이 일어난 주전 597년에는 당시의 유다 왕 여호야긴과 에스겔 그리고 많은 백성이 끌려갔습니다. 이렇게 포로로 있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십니다.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해도 그들이 받기를 거절했지만 더 큰 심판을 앞둔 백성을 향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에스겔 앞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펼쳐집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을 읽고 크게 충격을 받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손에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합니다. 아주 특이한 performance입니다.대개 말씀을 듣지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먹지는 않습니다. 

에스겔이 입을 벌려 먹으라는 말에 순종하자 놀랍게도 꿀같이 단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를 위해 무슨 일을 해드리려고 하기 전에,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입을 벌려야 합니다. 말씀 사역자가 먼저 순종하여 말씀의 참맛을 경험하고 그 말씀을 내면화할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에스겔이 재앙의 말을 전해야 할 대상은 이방인들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다른 민족에게 에스겔을 보내서 말씀을 전하게 하였더라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종종 겪게 되는 현상입니다. 

에스겔은 소위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받아서 전하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의 성공 여부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신실하게 행하는 것뿐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잘못 믿으면 아예 믿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절감케 합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지 않는다면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추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에스겔은 말이 통하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굳어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향해, 포로로 잡혀와 있으면서도 징계의 의미를 모르는 무지한 백성을 향해, 곧 돌아갈 것이라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만 환호하는 미혹된 백성들을 향해 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이마는 굳고 마음은 강퍅하고 패역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배신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습니다. 그들이 너무 완악하였기에 하나님은 에스겔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굳은 얼굴에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에스겔의 얼굴을 굳게 하시고 그들의 강한 이마에 대항하여 에스겔의 이마를 화석보다 강한 금강석 같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 받기를 거절할 때, 거절당하는 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 것을 믿고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상황이 언제나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떠한 난관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오직 주신 말씀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들은 것”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습니다(3:12-15) 

여호와의 영광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가십니다. 주의 권능이 힘 있게 그를 감동시킵니다. 에스겔이 소리를 듣는데,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로서 크게 울리는 소리라고 합니다. 에스겔은 감동이 되어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라고 찬양합니다. 에스겔은 성령에 의하여 옮겨질 때에 "근심하고 분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든 상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에스겔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이스라엘의 죄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에스겔은 델아빕에 이르러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데 두려워 떨며 칠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는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픔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어렵고 고통스러운 사역에 자신을 부르셨음을 자각했기 때문에 느꼈던 에스겔 자신의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에스겔은 무려 칠일 동안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와 같은 마음의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파수꾼이 될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자신의 사명의 무게에 눌려 마음이 상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신이 그를 크게 감동하십니다. 즉 그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주어집니다.  

파수꾼으로 부르십니다(3:16-21)

이 침묵의 칠일은 에스겔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마음으로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칠일간의 침묵이 지난 후에 에스겔에게 민족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십니다.파수꾼의 임무는 성벽 높은 곳에 서서 눈앞에 닥친 위험을 성안의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만일 적의 침입을 제대로 경고하지 못한다면, 그 성에 임한 고통스런 결과에 대해 차수꾼이 책임져야 합니다. 

에스겔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해주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파수꾼은 히브리어로 '초페'인데 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보는 것 즉 감찰하는 것입니다. 이제 '초페'로 임명받은 에스겔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대신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사명을 받은 자는 사명을 내리는 자의 말을 정확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명하게 실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17)

파수꾼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대리자이기에 파수꾼에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힘입게 하시고 감동시키십니다. "나를 대신하여"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대행자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에스겔이 전하는 말씀이 신적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성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위대한 사명을 부여받은 자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파수꾼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성령으로 감동되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힘을 입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하나님께서 그 피값을 파수꾼의 손에서 찾을 것이다"(3:18)

만약 에스겔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파수꾼의 직무를 잘 감당하지 못했을 경우에 악인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가운데 끝까지 악을 행하다가 죄악 가운데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도 악인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파수꾼이 직무에 태만하여 상대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를 갖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한발 앞서 회개한 자체는 놀라운 복이지만 그에 따른 막중한 의무가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파수꾼은 생명을 보전한다"(3:19)

선지자가 파수꾼의 임무를 다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발생하게 되는 결과의 두 번째 유형은 파수꾼이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는데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범죄자는 죄악 가운데서 죽는 반면, 선지자는 임무를 다했으므로 책임을 면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는 자가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다 해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간접적인 이유가 됩니다.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3:20) 

20절에서는 깨우쳐야 할 대상이 악인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의인입니다. 여기서 '의인'은 한번 구속함을 입은 후 다시는 죄의 형벌 아래로 가지 않는 자,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입은 의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율법과 그 민족적 규례만을 비교적 잘 지킨 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가 타락하지 않도록 항상 말씀으로 경계해야 하는 것도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3:21)

에스겔이 파수꾼으로 자신의 직무를 완수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에서 떠나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이들의 생명을 살리고 자신의 영혼도 보존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이며 하나님께서도 진실로 원하는 바입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날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매시간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이 원하시는 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행위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과연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의지의 결단만으로 가능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원이 내 힘과 내 노력,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삶의 변화를 위해서,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영광스러운 우리 삶의 미래를 내다보며 또 내 이웃들의 삶의 진정한 변화를 기대하면서, 날마다 구체적인 삶의 결단으로  "내 뜻대로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주님께 우리의 삶 전체를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주셔서 자신을 대신하여 이 백성을 깨우치라고 하십니다. 적의 동태를 살펴서 나머지 거민들이나 군대에게 상황을 알리는 것이 파수꾼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스겔이 알려야 할 긴급한 대적은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분의 임박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속히 자신들을 구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거라고 믿었던 이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될 것입니다. 믿으면 만사형통, 사랑의 하나님이 심판하실 리가 없다 등등 장밋빛 복음으로 무성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의 대적이 되실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도 선포되어야 합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성실하게 경고하는 것뿐입니다. 듣는 이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경고를 하지 않거나 왜곡된 정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몇 년 전에 어느 분이 교만이라는 단어를 듣기 싫으니 설교할 때 그 단어를 빼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바리새인에 대한 언급은 여러번 들었으니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는 것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더욱 선명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 때로 그 말씀이 양심을 찌르는 칼이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면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언제 말씀이 불편하게 들려옵니까? 그럴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깨달으라고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며 고쳐야 합니까? 아니면 목사가 설교를 통하여 자기를 친다고 해야 합니까? 

에스겔을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다는 말씀은 에스겔에게 한정된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말씀을 읽거나 듣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변을 보면 에스겔의 시대보다 더 악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케 됩니다. 우리 누구에게나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는 명령이 우리 모두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 중의 복음이 주어졌습니다. 명심할 것은 전도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역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의 사역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않겠지만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입니다. 듣는 귀를 가진 것은 커다란 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파수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부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킬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목숨을 걸고 파수꾼의 역할을 다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에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 직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끝까지 듣지 않으려 합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은 패역한 백성이다’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실까요? 이것은 그들이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강퍅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무엇으로도 설득할 수 없는 구제불능이라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어도 일을 열어 설명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 견고함과 강퍅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보시고 얼마나 답답해하시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니님은‘들을 자는 들을 것이고 안 들을 자는 안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심령이라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주님을 마음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전해야 합니다. 

셋째, 온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그것은 에스겔 자신이 메시지 그 자체였음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이 행하는 모든 행동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저도 주일 설교를 하고 매일 새벽설교를 하지만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설교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고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고 어둠을 밝히는 빛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2600년 전 바벨론 땅 그발 강가로 가서 미스터리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라가 망한 후에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 에스겔이 그곳에서 본 것은 절말 놀랍고도 신기한 현상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즐거운 경험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에스겔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부르시는 장면에서도 나타나는 그 답답함, 견딜 수 없는 그 막막함, 온 몸을 동여매고 방안에 틀어 박혀 있거나 밖으로 나와 전력을 다해 외쳐 봐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그 지독한 무관심,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었더니 성공했더라는 이야기만 좋아하거나 성경 말씀보다 예화에 더 관심을 갖는 신앙의 가벼움, 하나님을 진지하게 섬기기보다 자신의 기분에 좋도록 하는 것을 예배로 생각하는 이 시대에 에스겔서는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자신의 취향을 따를 것인지 옆에 있는 친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부족한 우리를 부르신 주님, 우리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일을 계획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의 말씀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며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주님의 계획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 허락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한 주님의 일꾼으로 서며 지금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 주님을 따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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