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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 (삼상 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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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 (삼상 13:1-14)


이제 막 인생이 피어나려 하고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간다 싶을 때 한걸음 헛딛는 바람에 그만 졸지에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일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한창 인기를 모으고 절정에 도달해 가던 가수가 대마초 사건으로 입건되면서 그 연예인 생명이 끝나고 마는 일을 가끔 보게 됩니다.
혹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에는 인기가 최고 광고 모델과 맞먹을 정도로 치솟다가도 그 임기 중에 경제 정책에 실패하는 바람에 그만 하루아침에 온 국민의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기적적인 대승을 거둔 사울은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그 인기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온 국민이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가운데 대관식을 올리고 이스라엘의 제1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에 그의 인생은 마치 활짝 핀 꽃과 같았고 그 상승세가 꺾일 기미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사울 왕이 그만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실수로 인하여 그의 생애는 그야말로 급전직하(急轉直下)에 이르게 됩니다.
그 실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향하여 "너는 왕으로서는 틀렸다."라고 선언하고 돌아서시게 됩니다.
일단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점 찍히게 되자 사울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추락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처럼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던 사울은 단 한 가지의 잘못으로 인하여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내리막길로 치달았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중대한 잘못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하신 명령' 하나를 지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실수 하나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인생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사울 왕으로 하여금 그처럼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만들었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사울 왕의 그 비극적인 일생일대의 실수를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거역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는 '주변 상황'에 압도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함으로써 오직 그 말씀하신 대로만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1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년에 2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산에 있게 하고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3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4온 이스라엘이 사울의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함을 듣고 길갈로 모여 사울을 좇으니라 5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서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 치매 6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7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떨더라"고 했습니다.

1절의 말씀은 히브리어 원문상 조금 난해한 구절인데 "사울이 일 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이년 째 되던 해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때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국방 체계를 크게 바꾸었습니다.
"삼천을 택하여...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는 말은 이제 사울이 일종의 '상비군'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그 이전까지 이스라엘의 군대 조직은 전쟁이 일어나면 즉시 전 국민을 동원하는 '민병대' 체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처럼 상비군을 조직하여 "믹마스와 벧엘산"과 같은 전략적 요충지에 항상 군대를 배치해 둠으로써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사울 왕은 판단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그 상비군 중에서 "일천" 명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 왕자의 지휘 아래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자신의 재량권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사울의 명령을 받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는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선제공격했습니다.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였고 이스라엘은 자연히 블레셋 사람의 "가증히 여김이 되는" 즉 그들의 원한을 사는 결과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은 당장 보복 전쟁을 걸어왔고 사울 왕 역시 다시 모든 백성에게 동원령을 내림으로써 양국은 전면전의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모든 상황은 사울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블레셋 군의 병력은 양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이스라엘 군에 대하여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병력의 숫자는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완전히 보병만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군에 대하여 블레셋 군은 기병과 전차병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자면, 한쪽은 소총 부대만 있는데 다른 한쪽은 포병과 탱크 부대를 동반한 경우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북한군의 소련제 탱크 공격에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던 국방군의 상황만 돌이켜 보아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절대적 열세의 병력만 해도 사울 왕으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거기에 설상가상이 있었습니다.
미처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나마 예비군 동원령을 받고 모여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대 다수가 탈주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즉 블레셋 군대의 압도적인 전력에 완전히 겁을 집어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 등 숨을 곳만 생기면 다 도망쳐 버렸으며, 개중에는 아예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아주 멀리 뺑소니쳐 버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15절에 보면 그처럼 탈주병들을 제외하고 사울 왕 밑에 그대로 남아 있던 병력은 총 "육백 명 가량"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소집된 예비군들은커녕 원래 자기가 거느리던 상비군 삼천 명조차 대다수가 도망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병력이 무슨 '기드온의 삼백 용사' 같은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떨더라"는 말씀대로 그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군사력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군기'와 '사기'입니다.
즉 전쟁에서 병력 그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병사들이 얼마나 군인으로서의 기강이 꽉 잡혀 있고 또한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데, 지금 사울 왕의 경우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최악의 상황에 빠졌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전투를 당장 눈앞에 둔 지휘관으로서는 정말 '못해 먹을 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주변 상황이 사울 왕을 지극히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이처럼 하나님보다도 세상 돌아가는 현실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을 때, 그의 심령은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무디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할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 왕에게는 사실상 그런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그가 암몬 족속과 전쟁을 치르면서 체험했던 경험을 되새겨 보기만 해도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하게' 하심으로써 암몬을 간단히 무찌르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기만 하면 지금의 이 블레셋과의 전쟁도 아무 어려울 일은 없었던 것인데, 사울 왕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야곱 역시 한 때 그처럼 주변 상황에 압도된 때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던 그는 애굽의 총리라는 사람이 시므온을 잡아 놓고 이제 막내아들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이 모든 것이 나를 해롭게 한다. 나는 흰 머리로 슬피 울며 죽겠다.'라고 자기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조금 후에 정신을 차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의지하게 되었을 때, 그의 모든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상황이 악화되어 가는 것처럼만 보일 때에도 사실은 바로 그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 기독신자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컨트롤에서 벗어나서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 훈련받은 병사는 총탄이 빗발치고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도 오직 자기가 받은 명령만 기억합니다.
  
베이스에 나가 있거나 타석에 서 있는 야구 선수는 그 긴장 초조가 극에 달하는 순간에도 오직 감독의 작전 지시가 무엇인지 그것만을 따라야만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써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실 줄을 확신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기억해내고 의지함으로써 그 악화일로의 상황을 넉넉히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자신의 논리'로 변명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만을 존중함으로써 그 엄명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8절 이하 14절의 말씀에 "8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레를 기다리라"고 지시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테스트해 보신 것이었습니다.
그 이레가 지나고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비로소 전쟁을 시작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되어도 아직 사무엘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사울은 더더욱 초조해졌습니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 현상이 시간이 갈수록 더 심화되는 때라 더욱 그러했습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사울은 "번제와 화목제를 이리로 가져오라"고 지시하고는 자기 자신이 제사장 노릇을 하면서 번제를 드리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번제가 막 끝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경솔히 행한 일을 보고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질책하자 사울은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그랬다고 변명했습니다.
즉 사울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번제 드리는 때를 늦출수록 탈주병이 늘어나 병력이 더욱 약해져 가고 있는데도, 그 번제를 드려 주려고 했던 사무엘은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군대는 "믹마스" 즉 원래 사울의 상비군이 지키고 있던 전술의 요충지를 이미 점령해 버리고 더욱 위협을 가중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판단하기를 "블레셋 사람이 곧 길갈로 공격해 올 텐데 내가 아직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라고, 즉 어찌하든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제사를 먼저 드려야만 하겠다고 자기 딴에는 기특한 자세를 지킨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에게는 그가 그렇게 비상수단으로 번제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음을 정당화시킬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나 논리도 하나님의 명령 불순종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라고 엄중히 책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정말 정신 나간 짓을 했소.'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오직 제사장만이 제사를 집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바로 그 제사장 고유의 권한과 직무를 침해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어겼습니다.
즉 그가 행한 일은 단지 사무엘 선지자에 대한 실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월권 행위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사울의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대실수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잘못 하나로 인하여 그는 '그의 왕권이 영원하지 못하고 단절되는' 벌을 받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조 대신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급전직하는 단 한 가지 잘못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사울 스스로는 자기의 판단과 행동이 옳다고 여겨지는 모든 합리적인 이유와 논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을 결코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우리 누구나 다 빠지기 쉬운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다들 천재적인 머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치고 세금을 떼어 먹으면서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돈 벌 길이 없는데 어떡하나?'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 보는데.'라고 아주 간단하게 정당화시킵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당하고 있는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지.'라고 자기 딴에는 정연하게 논리를 펼칩니다.
신앙생활에 불충하고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이런 바쁜 현대 사회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고 오히려 아주 당연한 듯이 자기를 변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부득이한 경우'란 절대로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누구라도 이럴 수밖에 없지 않나?'라든지 '아무리 신자라 해도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지.'라는 말들은 오로지 그 사람의 자기합리화요 핑계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불순종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논리를 따지면서 자기의 행위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저히 말도 안 될 소리를 그렇게 뻔뻔스럽게 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강퍅해져 있는 심령은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태, 바로 '사울 왕의 내리막길'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라는 말은 결코 신앙생활에 논리가 밝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진 불순종하는 자의 핑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때에는 그 말씀을 하신 분이 바로 '절대주권자'이심을 기억하면서 결코 불의할 수도 없고 결코 틀릴 수도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한마디도 어김없이 절대복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야구 시합에서 이런 상황이 있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자기 팀이 '1대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9회말 무사만루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 팀에서 가장 타격이 좋은 4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는데, 감독은 일단 1점을 내어 동점을 만들려고 '스퀴즈 번트' 사인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4번 타자는 감독의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한번 휘두르면 희생 플라이가 될 수도 있고 아주 한방에 역전까지 가능한데, 왜 그런 소심한 작전을 펴는지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독의 사인을 무시하고 그냥 배트를 풀스윙으로 휘둘렀는데 그것이 만루홈런이 되면서 대역전극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물론 그 타자는 모든 관중들과 동료 선수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 다이아몬드를 돌아 홈을 밟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감독이 그 선수를 칭찬할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떤 감독이라도 그런 경우가 생기면 그 선수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야단칠 것입니다.
아마 다음 경기에서 타순을 끌어 내리든지 어쩌면 아예 몇 경기에서 출장 정지까지 시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수의 독단적인 플레이가 그 한 경기는 이기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장기간 페넌트 레이스에서 그런 식으로 플레이 하면 바로 팀을 지게 만들 장본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타자 나름대로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결과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감독의 명백한 명령을 무시한 죄는 선수로서 저지를 수 있는 최대의 잘못인 것입니다.
감독과 선수 사이에서도 그처럼 명령 복종을 통한 위계질서가 철저해야 한다면, 더욱이 하나님과 신자 사이는 어떠하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압도될 때 그것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쉽게 어기게 됩니다.
또한 자기 속에서 어떤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논리에 스스로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조차 쉽게 거역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 주변이 악화일로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무섭게 여기면,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위험한 순간입니다.
내 머리 속에서 돌아가는 논리가 기록된 신구약 66권의 말씀보다 더 정당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점 찍히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어떤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불리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그 명령을 능히 순종할 수 있도록 '넉넉한 은혜'로 도와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날이나 추석 때 다른 모든 불신 가족들로부터 제사상 앞에 함께 절하기를 강요당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견디기 힘든 상황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그 어떤 우상 앞에도 절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을 때에 그 명령을 지키고자 하는 성도에게는 그런 불리해 보이는 상황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뜻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의 판단과 이론과 논리 가지고서는 결코 도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심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연휴를 맞이하면 정말 모처럼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인데 일 년에 겨우 두어 번 정도만 주일예배에 빠진다고 해서 뭐 그리 큰 문제일까 하는 생각도 쉽게 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는 명백한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히 항명은커녕 이의를 달거나 불만조차 가져서는 안 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심을 이미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결코 어떤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나 '부당한' 명령을 내리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의 입에서 나와서 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그것을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 - 그 어떤 불안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그 어떤 내 나름대로의 판단이 서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오직 그 말씀대로만 순종하고 복종함으로써 그 말씀 안에 이미 약속되어 있는 은혜와 축복을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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