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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거듭남, 진정한 믿음 (요 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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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거듭남, 진정한 믿음 (요 3:1-15)

예수님의 대화 방식은 점잖은 대화 방식의 표본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디에 가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님처럼 말씀하시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이 예수님의 대화는 대화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진리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나타내는 호기심이라든가 찬사 같은 데에 별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관심을 표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찬사를 말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거의 무시하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쏟아놓는 찬사에 대해서 예수님은 관심이 없습니다. 미사여구에 대해서 무반응하십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관심이 있는 것은 사람들의 진정한 영적인 변화입니다. 네가 거듭났느냐, 네가 천국에 들어갔느냐,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갖는 관심보다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와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은 솔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겉치레로 하는 말을 예수님은 꿰뚫어보십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에 대해서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직설적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 니고데모가 당황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나름대로 자기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얻었다고 생각하고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드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나름대로 종교인이요, 지도자요, 식견을 갖고 있고, 노하우를 갖고 있고,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이 무색하게 됐습니다. 그의 밑천이 예수님 앞에서 드러났습니다. 

유도 챔피언과 무예타이 선수가 시합을 벌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예타이는 킥복싱이지요. 그런데 유도는 원래 상대방의 옷깃을 잡고 던지는 운동이 아닙니까. 그런데 무예 타이 선수가 유도 선수가 잡을 수 있는 옷깃이 하나도 없는,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그리고 발길질을 하고 주먹질을 하면서 유도 선수를 공격하니까 이 유도 선수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유도 선수도 발길질을 하더라구요. 

상상해 보세요. 유도 챔피언이 시합을 하는데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온 유도 기술을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고 발차기를 시도한다면 그건 유도가 아니지요. 격투기의 세계가 유도의 규칙을 적용해주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 실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교육이 직장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에 입사하면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버려야 실제로 필요한 기술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이건 우리나라 교육에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나라의 교육제도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기업이 직접 대학을 운영해서 그 기업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직접 가르치고 채용하는 그런 방법을 쓰는 경우도 많이 있지요. 

신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중에 ‘내가 신학교에 가면 신앙을 자라게 할 수 있으려나?’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신학교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오해가 있는데 첫째는 신학교에 가면 성경을 많이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학교에 가면 신앙이 자란다는 것이고 셋째는 신학교에 가면 목회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세 가지 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럼 신학교에 왜 가느냐? 가야되기 때문에 갑니다. 안 가면 안수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갑니다. 그리고 안 가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가고 신학교를 나와야 성도들이 목사를 신뢰해주기 때문에 갑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교회에서 배우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것도 교회생활을 통해서 자라는 것이고 개인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목회의 노하우는 교회를 경험하면서 자기 스스로 배우는 것입니다. 

미국의 조엘 오스틴 목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 뒤를 이어 교회 목회를 맡게 됐는데 담임목사로 임명받기 전까지 조엘 오스틴은 설교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학교 문턱에도 가지 않은 사람입니다. 배운게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목회하는 것을 보고 자란 것 뿐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엘 오스틴 목사는 미국 최대의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지요. 여기에서 은사라는 것, 재능이라는 것이 교육이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교육 · 학위 이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을 봅니다. 

신앙과 인간의 참 실력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신앙을 실력에 비교하는 것은 좀 어패가 있지만 절대음감, 이건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절대음감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그게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가르쳐도 이건 외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연습해도 되는 게 아니고 귀가 태어날 때부터 발전해야 됩니다. 

또 창의력, 미적 감각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타고나는 것입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현재 한국의 공교육의 창의력 교육, 그건 정말 우스운 얘기입니다. 창의력을 학교에서 가르쳐준다고 그걸 배울 수가 있습니까. 학교가 간섭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습니다. 학교가 창의력까지 가르쳐주겠다고 주입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겁니다. 그건 창의력 교육이 아닙니다. 차라리 학생들이 창의력을 배우기를 원한다면 좀 놀게 내버려둬야 됩니다. 노는 중에 창의력을 배우지, 공부를 강요하는데 창의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창의적으로 시험을 보면 낙제합니다. 

창의력이라는 것은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실력을, 성적을 높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창의력은 타고나는 것이고 그것을 선생이 인정하고 발굴하고 키울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창의적인 국가가 되려면 사람들이 자기의 창의력을 사용해도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어야 되고 남을 흉내 내고 모방하지 않고 자기의 것을 찾을 수 있는 개성을 장려하고 인정해 주어야 되는 게 그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쏠려가는 그런 문화에서 창의력은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우르르 몰려가는 유행은 있지만 진정한 문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은 유행이 지배하는 나라에요. 진정한 문화를 키울 수 있는 나라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늘 신비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노래할 때 비브라토를 내는 것입니다. 저는 노래할 때 비브라토를 내는 사람을 늘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비브라토가 나올까,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줄 수가 없었어요. 

비브라토는 누가 가르쳐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실험을 해봤습니다. 노래를 할 때 몸을 약간 떨면 약간 비브라토가 납니다. 그러나 진짜 비브라토는 성대가 떠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찬양인도를 많이 하고 정말 목이 찢어질 정도로 찬양인도를 하다보니까 어느새 성대를 떠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어요. 이건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할 줄 알든가 할 줄 모르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또 하나, 제가 할 수 있기 전까지 늘 신비하게 생각했던 것이 방언입니다. 저는 방언하는 사람들을 옛날에는 참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방언을 할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어떤 기분일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참 신비하게 생각했는데 요원한 것처럼 느껴졌지요. 그러던 제가 방언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도 방언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는데 사실 그것도 누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을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니고 이건 할 줄 알든가 할 줄 모르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거듭남도 그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거듭남도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용어이지만 그 내용은 신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거듭나야 될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하면 거듭나느냐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어요. 이건 본문 해석의 관전 포인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3장 16절 말씀이 해답이라고 주장하는데 첫째로 3장 16절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인지 요한의 설명인지 불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요한의 해석의 구별이 불분명해요. 그래서 어느 시점에 예수님의 인용구가 끝나고 요한의 설명이 시작되는지 알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설사 3장 16절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구원에 대한 말씀이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은 아니에요. 오히려 거듭남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 성령으로 난 자도 이러하니라’ 이런 식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느냐. 왜냐하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지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임의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몇 월 며칠 몇 시에 거듭났습니다.’라고 간증하는 사람들은 수상한 것입니다. 복음주의의 오류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주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하는데 그건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성령이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느 시점에 성령으로 거듭났는지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장님이었는데 지금은 본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한 말이지요.‘ I was blind but now I see! - 내가 한때는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본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한때는 불신자였는데 지금은 믿는다. 전에 나는 훼방자였는데 지금은 예수님을 섬긴다. 이전에는 안 믿어졌는데 지금은 믿어진다. 그게 옳습니다. 

그럼 니고데모는 결국 거듭났느냐. 당연히 거듭나지요. 이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장사를 지내드린 사람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인 것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대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당연히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 대해서 알 것은 신비한 면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이에요. 이건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니고 사람의 다짐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거듭난다는 말을 정치인들도 사용하고 기업인들도 사용합니다. ‘국민이 사랑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국민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거듭남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기 다짐과 의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거듭남이라는 것은 사람의 도덕적인 변화가 현저해서 마치 새로 나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듭날 수 있다는 얘기냐. 예수님이 중심이 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에 거듭날 수 있었어요. 제대로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집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면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집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온전히 거듭나기 위해서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놔야 됩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쓸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의로움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종교지도자라는 사실이 그의 거듭나는 것에 방해가 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무뚝뚝하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종교지도자라는 사실이 오히려 거듭나기 위해서 필요한 깨달음, 변화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 우리의 모든 의로움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아야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심령의 가난함이 있어야 됩니다. 심령의 가난함. 내가 많이 알고, 내가 많이 이루고, 내가 많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인생의 시련을 통해서 심령의 가난함을 얻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련이 신앙을 주는 건 아니지만 시련을 통해서 사람이 가난해집니다. 그래서 천국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진정한 믿음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해도 안 믿어졌던 사람이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심령이 가난해질 때 그때 비로소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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