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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날은 어떻게 오는가? (창 2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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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은 어떻게 오는가? (창 22:9-14)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 로쉬 하샤나

아름다운 주일 아침,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옛사람들은 설 전날인 섣달그믐에 어른들을 찾아뵙고 절을 올렸습니다. 그것을 묵은세배라 하는데, 그해를 잘 보낸 것에 대해 웃어른들께 감사 인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살아온 날을 감사함으로 돌이켜본다는 사실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귀성행렬을 볼 때마다 도대체 어떤 힘이 저들을 고향으로 잡아당기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 뿌리에 대한 그리움과 두고 떠나온 날들에 대한 추억일까요? 

어린 시절 시골에서 맞이했던 설날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식구들이 모여 식혜도 만들고, 조청도 만들고, 한과도 만드느라 아궁이에 불을 많이 땐 탓에 아랫목이 절절 끓었습니다. 모처럼 맛보는 그 넉넉함에 마음이 절로 흥감해져 잠을 잘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어떤 규칙적인 소리에 이끌려 잠에서 깨어나면 초롱불을 켜놓은 채 아버지가 떡국 떡을 썰고 계셨습니다. 썰어야 할 떡을 눈으로 가늠해보고는 ‘저걸 언제 다 써나’ 하는 막막함에 이내 다시 혼곤한 잠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어서 일어나라는 채근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 엄마는 몰래 준비해놓았던 설빔을 내미셨습니다. 차례를 지내고, 부모님께 세배를 올리고, 떡국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도저히 집에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집 저집 돌며 세배를 드리면 어른들은 엿이며 강정이며 주전부리를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저마다 가난하던 시절이라 세뱃돈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의젓하게 덕담을 듣고 물러나와 다음 집으로 줄달음쳤습니다. 그리운 시절이고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오늘은 우리 설날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설날인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로쉬는 ‘머리’라는 뜻이고, ‘하샤나’는 ‘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해의 머리가 되는 날이라고 새기면 되겠습니다. 이 절기는 유대의 종교력으로 티쉬리Tishri월 첫 날 시작됩니다. 우리 달력으로는 9월 말이나 10월 초에 해당하는데, 이때를 새해로 잡은 까닭은 탈무드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때가 바로 티쉬리월입니다. 로쉬 하샤나는 우리 생명의 목적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삶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절기입니다. 

절기節氣는 시간의 매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에 맞춰 시간에 구획을 정함으로 자기 삶에 리듬을 부여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전3:1)고 했습니다. 그 때를 분별하고, 그 때에 맞춰 사는 생을 일러 철든 인생이라 합니다. 문제는 분주함입니다. 정신없이 내닫다 보면 우리 인생의 때가 언제인지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세속의 절기든 교회 절기든 그것은 우리 삶이 속절없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영혼의 닻입니다. 

• 이삭 이야기 둘

유대인들은 신년 축제의 첫날 이삭의 탄생 이야기(창21장)를 읽습니다. ‘이삭’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얻은 아들입니다. 이삭은 ‘그가 웃다’라는 뜻입니다. 신년 축제에 이삭 탄생 이야기를 읽는 것은 일 년 내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더라도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언제나 꽃밭일 수는 없습니다. 만수무강, 만사형통의 꿈은 언제나 좌절되게 마련입니다. 예기치 않은 어려움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면 허물 때도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도 있고, 찾아 나설 때가 있는가 하면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신년 축제의 둘째 날 유대인들이 이삭의 결박과 희생 이야기(창22장)를 읽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백세에 얻는 아들과 더불어 아브라함은 기쁨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모처럼 맛보는 호젓하고 넉넉한 행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창22:2)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요구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배경의 역할을 합니다. 성경은 이런 부당해 보이는 요구의 동기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들이 너무 큰 정서적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런 구절을 적어놓았겠습니다만 그런 맥락을 알 리 없는 아브라함은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하란, 세겜, 베델의 동쪽 산간지방, 네겝, 이집트, 헤브론, 그랄, 브엘세바…. 고단하고 신산스런 삶을 살면서도 그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동행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인자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갑자기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요청입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이 갑자기 낯선 분으로 변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소돔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도 끈질기게 하나님과 협상을 시도하던 아브라함입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18:23) 남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아브라함이 정작 자기의 문제 앞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항변했더라면 우리 마음이 그렇게 아프진 않을 겁니다. 성경의 이야기꾼은 아주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태의 추이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3)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야기꾼은 사흘 길을 가는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깊은 침묵은 오히려 우리의 가슴을 시리게 만듭니다. 세상의 어떤 말을 다 동원한다 해도 그의 심정을 묘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이 끊긴 자리에서 우리도 아브라함이 되어 함께 아파할 뿐입니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4) 

고도의 압축입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한 후에 장작을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 함께 걸었습니다. 이삭이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결과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아브라함의 절절한 마음 아픔을 알 수 있는 말입니다. 

• 하나님의 낯선 얼굴

우리는 이후에 벌어진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는 그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습니다. 그런 후 이삭을 묶어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올렸습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 순간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림 속의 이삭은 순종과 기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충격과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카라바조). 오른손에 칼을 든 아브라함의 얼굴은 대개 고뇌로 일그러져 있습니다(렘브란트).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낯설고 무서운 분입니다. 욥이 경험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의 희생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상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시는 분으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깊은 속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전3:11)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세상 섭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욥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장엄함에 눈을 뜬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욥42:3)

살다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우리에게 무관심하신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절망의 가장자리로 몰아가시는 것 같아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거둘 수도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늘 모든 게 잘 될 거라며 ‘긍정적 사고방식’ 혹은 ‘적극적 사고방식’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절망의 자리, 낯선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삭 희생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신앙은 상식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문화적 문법에 등을 돌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삭 이야기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숫양 한 마리를 예비해 놓으셨고,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붙였습니다. ‘주님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이 한 마디 말씀은 오늘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를 맡길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 양각 나팔(Shofar)

로쉬 하샤나는 이처럼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거나 낙관적으로 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삭의 탄생이 기쁨이라면 이삭의 희생은 슬픔과 고통입니다. 인생은 시간이라는 올실에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의 날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무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 때 우리가 짜는 인생의 무늬는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 마음은 자주 표류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우리 삶을 좌지우지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마음을 주님께 비끌어매야 합니다.

로쉬 하샤나 축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축제 기간 내내 참가자들이 듣는 것은 쇼파르Shofar, 곧 양각나팔 소리입니다. 길게 혹은 짧게 울려 퍼지는 쇼파르 소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를 파고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습니다. 세상의 소음을 뚫고 울려퍼지는 쇼파르 소리는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을 울립니다. 사람들은 시간과의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설날을 맞아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아갑니다. 장소로서의 고향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영혼의 고향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더욱 중요한 귀성입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이 늘 꽃밭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저런 고뇌와 시련도 찾아올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다시 일어나 걸어갈 겁니다. 인생이 본래 어려운 것이라면 괜히 투덜거릴 것 없습니다. 그것을 즐기면 그만입니다. 홀로인 듯싶어 외로울 때에도 우리는 홀로 일 수 없습니다. 동행이신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늘 새로운 시간의 주인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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