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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 (시 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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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 (시 33:12)


고대 희랍에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그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마침 디오게네스는 통에 기대어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에게 물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지금 무엇을 가장 바라십니까?" 
"그리스를 정복하길 바라네." 
"그리스를 정복하고 난 다음에는 무엇을 원하시렵니까?" 
"아마도 소아시아 지역을 정복하길 바라겠지." 
"그 다음은 또 무엇을 바라시렵니까?" 
"아마도 온 세상을 모두 정복하길 바라겠지" 
"그러면 그 다음은 또 무엇을 바라시렵니까?" 
"그렇게 하고 나면 아마도 좀 쉬면서 즐겨야겠지." 

"이상하군요. 왜 지금 당장 좀 쉬면서 즐기지 않습니까?"
알렉산더는 쓴웃음을 지으며 디오게네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네." 
"아! 그러시다면 제가 햇볕을 쬘 수 있도록 옆으로 좀 비켜 주시지요." 

이 말에 대왕은 크게 웃으며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는 비록 나무로 만든 둥근 술통을 집으로 삼고 구걸하면서 살았지만 궁전에 살며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 대왕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디오게네스가 행복했던 이유는 그가 모든 욕심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큰 재산을 갖고 있어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만족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보다 더 큰 부자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불행해 하니까요. 하지만 누구나 디오게네스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의 삶은 파격적인 것이지 정상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저는 디오게네스 식의 행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참 행복에 관해서 말씀해 드림으로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우리는 절망적인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니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는가 하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상태입니까? 마귀의 본성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요 10:10)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제 손아귀에 든 인생들을 놓아주는 법이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노예로 삼아 착취하고 끝내는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며, 영적 소경이었던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인생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셨으며,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받을 아무 공로가 없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더구나 구속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 이르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도 한없이 감사한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주셨으니 만입이 있다한들 어찌 그 은혜를 다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단지 법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자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4절로 17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부자 아버지를 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위세가 당당한지 모릅니다. 아무 노력도 없이 많은 재산을 물려받습니다. 대통령의 아들쯤 되면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장관들도 그 앞에서 굽실대고 유력 인사들이 안면을 트기 위해 줄을 댑니다. 더구나 영국이나 태국과 같은 왕국에서는 왕자나 공주의 인기와 영향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님들의 신분은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울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알고서 비록 가진 것이 없고,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그 때문에 의기소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만으로도 이미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도님들에게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간구할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온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자녀 된 성도들이 구할 때 결코 인색하게 대하지 않으시며,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자격으로  아버지의 것을 당연히 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말하기를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눅 15:31)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서 풍성히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삶에 지치고 기분이 울적할 때 성도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신분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다시금 마음속에 감사와 행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죄 사함의 은총을 입은 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언젠가 강도질을 하고 숨어 다니던 사람이 경찰에 붙잡히자 “이제 붙잡히니까 마음이 후련합니다. 죄 짓고는 못 살겠습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먼저, 양심이 고통을 당합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양심은 “너는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지었더라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기 양심이 압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살지라도 양심이 편치 못하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지어도 양심이 괴롭거늘 하물며 하나님께 죄를 짓고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를 보세요. 그들은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고 나자 그만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벌거벗은 상태였지만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나자 그만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자, 아담은 대답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범죄하면 양심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 싫어합니다. 

왜 사람들이 죽음에 관해서 말하기를 싫어할까요?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사람들을 종으로 삼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 보니, 마귀를 일컬어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히 2:14)라고 하였습니다. 또 인간들을 가리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히 2:15)이라고 했습니다.

서구에서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죽은 사람의 얼굴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예쁘게 화장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좋은 옷을 입혀서 관에 눕힙니다. 그러면 마치 평안히 잠자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문객들이 두려움 없이 죽은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장술로써 죽음의 실상을 감추는 것은 사람들이 죽음을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지 못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오락을 탐닉합니다. 그러나 술과 오락이 죄책을 없애지 못합니다. 이사야 57장 21절에 이르기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행복하다면 구태여 술을 마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술은 흥겨운 분위기를 위해서도 마시지만,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도 마십니다. 그러므로 잠언에 이르기를 “독주는 죽게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잠 31:6)라고 하였습니다. 

현대는 질병 가운데 정신적인 질환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친 것만 정신질환이 아니고 우울증, 조울증, 여러 종류의 망상, 비정상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불안장애, 인격의 파탄을 가져오는 인격장애, 현실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적응장애 등 수십 종류가 넘습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경쟁이 심하고, 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어서 정신적인 장애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인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죄책감이 여러 가지 정신적인 질환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죄책에서 놓여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들을 해방시키실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4-36)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책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보면, 위대한 해방선언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더 이상 죄책감에 억눌려 살 이유가 없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때때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는 않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사죄의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책에서 해방된 행복감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보살핌 가운데 살게 된 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가지만, 그와 동시에 언제 어디서 무슨 재앙을 만날는지 늘 염려하면서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살아가므로 불안해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을 언제나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주십니다. 

시편 91편을 지은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이같이 노래했습니다. 

“1)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5)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6)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7)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8)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9)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10)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시편 말씀과 같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 아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항상 그 날개 아래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가 사노라면 때로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모든 사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안하고 두려움이 엄습할 때 이렇게 외치십시오. “6)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7)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8)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9)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시 118:)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선한 목자가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듯이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날을 위해서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하였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앞길을 환히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길을 하나님께 맡길 때 평강의 길로,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인생길에서 지치고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핍박과 환난이 중첩되고, 가깝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몸이 병들어 쇠약해 질 때도 있습니다. 이 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행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위로 받으려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위로로써 우리의 상한 마음을 싸매시며 치료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느라 무수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굶기도 하고, 추위에 떨기도 하였고, 헐벗기도 했으며, 죄 없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바다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라고 했던 고질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낙심하지 아니하고 힘차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고린도후서 1장에서 그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마나 풍성한 위로를 베풀어주셨던지 사도 바울은 모든 환난을 능히 이겨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난 중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지치고 피곤한 상태에 놓여 있으십니까?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풍성한 위로를 받아서 모든 시험을 이길 뿐 아니라 환난 중에 있는 다른 형제들을 위로하는 행복한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게 된 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많은 일을 하면서 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귀영화를 받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큰 사업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웅장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들도 지었습니다. 지중해는 물론이고 멀리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무역을 해서 큰 부를 쌓았습니다. 또 지혜로운 잠언을 삼천이나 말하였고 노래를 지은 것이 일천 다섯이나 되었고, 학문에도 힘써서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했습니다(왕상 4:). 

그러니까 솔로몬은 편히 앉아서 인생을 즐기기만 한 사람이 아니고 잠을 아껴서 많은 것을 이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이르러 자기 일생을 돌아보면서 탄식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고 하였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오늘까지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을 탄식한 것입니다. 아무리 큰일을 한들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인생을 사는 동안 무익한 일에 세월을 낭비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고 하셨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일이라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큰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라도 예수님을 믿게 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되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장로로서, 집사와 권사로서, 구역장으로서, 교사로서, 성가대원으로서, 그리고 남녀 선교회 임원과 회원으로서 각자 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행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직분이든 맡기거든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봉사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그것은 상 받을 기회를 상실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기거든 감사하고 행복해 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서 살게 된 것이 행복한 이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신 이웃을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했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신실한 성도가 되고 직분을 받는 것을 볼 때의 기쁨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의 수고는 주안에서 헛되지 않으며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된 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성경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하였습니다. 후사란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장차 주 예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터인데, 그 때에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다 부활의 몸으로 일어나고, 살아남은 우리도 홀연히 변화되어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성도들은 어떤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지구는 뜨거운 불에 타서 녹아지고 지금의 하늘도 불에 타버릴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열 두 종류의 보석과 정금과 진주로 지어진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터인데, 성도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하신 대로, 성도님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 자녀가 되었으니 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런즉 이 시간 말씀해 드린 그리스도인이 행복한 이유들을 생각하시면서 언제나 활기차고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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