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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탐욕을 극복합시다 (눅 18: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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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을 극복합시다 (눅 18:18-30)

   
한 건강전문잡지에 실린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암이란 무엇인가. 세포가 무한대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의 모든 세포들은 일정 기간 성장했다가 때가 되면 죽는다. 그 죽은 세포의 자리를 새로운 세포가 채워주는 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과 죽음을 반복해야 할 세포의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 결코 죽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나는 세포가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암세포다.

암세포가 무서운 것은 끊임없이 자라나기 위해서 다른 세포들의 영양분을 혼자서 차지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도 한 군데서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면서 말이다. 이렇게 암세포는 영양분을 낚아채서 독식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암세포의 본질은 탐욕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변질됩니다. 암세포가 다른 세포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처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힙니다. 암세포가 사람 몸 전체를 파멸시키는 것처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공동체 전체를 파멸시킵니다. 결국에는 암세포는 죽게 되는 것처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 자신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우리는 탐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탐욕이란 무엇인가?

구약에서 탐욕 또는 탐심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아와’(Awa), ‘헤멧’(Hemet)과 같은 단어로 표현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헬라어 원어 ‘플레오넥시아’(Pleonexia), '에피두미아‘(Epidumia)와 같은 단어로 표현되어있습니다. 그 뜻은 대체로 “자신이 이미 가진 것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이솝 우화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노부부가 거위 한 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위는 황금알을 낳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만 낳은 것이 아니라 매일 하루에 하나씩 낳았다. 그래서 이 노부부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부부는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얻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거위의 배를 갈랐습니다. 안타깝게도 거위의 뱃속에는 황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일로 거위는 죽었고, 다음 날부터 이 노부부는 황금알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탐욕입니다. 사람이 이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고 싶어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탐욕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우선 이 탐욕이 모든 죄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약 1: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니라.” 마음속에 욕심이 일어나게 되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도 보통 욕심이 아니라 욕심이 계속 샘솟듯이 솟구치는 탐욕에 사로잡히면, 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를 삼하 11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자, 마음속에 탐욕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왕궁으로 불러 동침함으로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이 사실을 덮기 위해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불러들여 아내를 만나게 했습니다. 이로써 거짓의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우리아가 거절하자, 그를 전쟁터 최선봉에 서게 하여 죽게 했습니다. 살인죄까지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삼하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것을 탐내서 힘으로 그것을 빼앗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다윗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탐욕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죄를 짓게 됩니다. 한 가지 죄를 짓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됩니다. 바로 탐욕이 모든 죄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욕은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탐욕이 영적인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부자 관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영생의 문제 곧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결국 주님에게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미 해 오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계명을 다 지켜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자,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했습니다.

이 부자 관리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남들에게 나눠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름으로 계속해서 돈을 버는 일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마음속에 탐욕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여기서 물론 재물이 있는 자는 모든 부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속에 탐욕을 버리지 못한 부자를 말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부자들은 탐욕을 버리지 못합니다. 저들은 남달리 돈을 벌어왔고, 돈 맛을 잘 압니다. 그래서 탐욕을 버리기 힘이 듭니다. 그뿐 아니라 저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리고 돈 벌 재주도 남다릅니다. 그래서 탐욕을 버리기 힘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로 이 탐욕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 탐욕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더 적나라하게 이 탐욕의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골 3:5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가 영적으로 보면, 우상숭배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사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실 여유 공간이 없습니다. 참된 예배,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영성 깊은 묵상, 그리고 영감 있는 찬양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영혼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집착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상숭배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탐욕이 영적인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욕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탐욕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탐욕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필요조건이고, 다른 하나는 충분조건입니다.

첫째, 사람이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탐욕을 극복하려면 사람이 새롭게 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결코 탐욕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엡 4:22-2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탐욕을 뿌리치지 못하고, 탐욕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옛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옛사람이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탐욕을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 훈련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훈련만 잘 시키면 보통개도 다 명견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 훈련의 첫 단계는 복종훈련이랍니다. 그리고 복종훈련의 첫 단계가 먹이훈련이랍니다. 일단 개들은 먹이를 보면 달려드는데, 이 때 “안돼!”, “기다려!” 통제합니다.  반복해서 될 때까지 훈련합니다. 따라하게 되면 먹이를 주고 여유 있게 먹게 합니다.

그러다 먹는 도중 갑자기 통제합니다. “안돼!", "기다려!” 하면서 먹지 못하게 합니다. 좀 치사하긴 합니다. 역시 반복하면서 될 때까지 훈련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먹이훈련과 복종훈련이 지나면, 배변훈련을 하고, 워킹훈련을 하고, 그리고 갖가지 지시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행동훈련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다 거치면 개는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일반개가 명견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 속에서 탐욕이 일어날 때, “안돼!”하고 소리쳐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갈 5:2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사람입니다.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탐욕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성녀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한 일이 있습니다. 인도에서 하고 있는 사역을 보고하고, 그동안 받았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집회 후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상당한 재력가였습니다. 이 사람이 은혜를 받았는지 자기가 무엇인가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수녀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와 함께 큰 일을 해보시지요?”

이 때 테레사 수녀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요?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예수님이면 족합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람이 변하게 되면 예수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변하면 탐욕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새사람이 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새사람이 된 후에도 다시 넘어져 탐욕의 늪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탐욕을 극복하며 살기 위해서는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거할 때 더 이상 탐욕이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 5: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서해안 갯벌에서 전통적인 고기잡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독살”이라는 것입니다. 갯벌에 돌로 담을 쌓아놓습니다. 주소간만의 차이로 밀물 때 올라왔다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던 고기들을 잡는 방법입니다.

독살에는 그 중앙 부분에 보다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면 고기들이 그곳에 모여 있게 됩니다.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들이 웅덩이에 갇혀서 허둥댑니다. 물이 부족하니까 숨을 쉬지 못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그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습니다. 새사람이 돼서 새롭게 살고자 해 보지만 성령 안에 거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허둥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탐욕이 다가오면 이내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다시 탐욕에 끌려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게 되면 더 이상 영적으로 허둥대지 않게 됩니다.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탐욕에 다시 끌려가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후 3:17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게 되면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두 종류의 자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의 자유’입니다. 술 마시고 방탕하게 사는 자유를 말합니다. 욕망에 따라 내키는 대로 사는 자유입니다. 겉으로 보면 대단한 자유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자유가 아니라 욕망의 노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수도원에 가보면 수도사들의 삶은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을 삽니다.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성적으로도 철저하게 절제하는 삶을 삽니다. 겉으로 보면 자유롭지 못한 속박의 삶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릅니다. 그들의 영혼은 정말 자유롭습니다. 그 무엇에도 얽매여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떠나 살게 되면, 탐욕을 부리는 것이 자유인 줄 알고 삽니다. 제 멋대로 탐욕을 부리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의 자유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탐욕의 노예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면, 탐욕을 끊게 됩니다. 그 어떤 탐욕의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탐욕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니까 속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탐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탐욕을 극복하려면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온전하게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전해오는 유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시절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지어주시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옷을 지어주시면, 거기 주머니를 달아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머니를 달아주시면 그 주머니 안에 이것저것 채워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옷을 지어주시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이처럼 보편적입니다. 누구나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연약한 육신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이 이 탐욕에 사로잡히면, 죄를 짓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이 탐욕이 영적으로 걸림돌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가 이 탐욕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탐욕에 길들여진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탐욕과 무관한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탐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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