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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자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고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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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고후 4:7-11)

사람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잘 나간다고 앞으로도 계속 잘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지금 어렵다고 앞으로도 계속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2010년에 시작해서 2011년 1월에 종료된 드라마가 있습니다. [시크리트 가든]이라고 생각납니까? 평균 시청률이 30%를 기록한 인기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현빈이고 여자 주인공은 하지원입니다. 

그런데 작가의 이름은 알고 있는지요? [시크릿 가든]의 작가는 김은숙 작가입니다. 김은숙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책 살 돈도 없었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새우깡 한 봉지로 3일 먹은 적도 있었답니다. [시크릿 가든]으로 유명해 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30만원 월세방에서 살았습니다. 학원에서 강사로 아르바이트 하면서 근근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작품을 쓰다가 [시크릿 가든]으로 대박을 맞았고 지금은 드라마 한 편으로 6억 원을 버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조건 속에 있어도 하나님이 높이시면 높아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희망을 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자신의 무능함으로 인하여 절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인간은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보배이신 주님을 모시므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들어보겠습니다. 

1. 나는 질그릇 같이 약한 존재입니다. 
   
7절에 보니 질그릇이 나옵니다. 여기서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타락한 인간은 질그릇처럼 약하고 가치가 낮다는 말입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빚어 유약을 바르지 않은 채로 구운 그릇을 말합니다. 질그릇의 특색은 모양이 소박하고 작은 충격에도 잘 부서집니다. 사도바울이 인간을 질그릇에 비유한 이유는 인간은 그만큼 연약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 때 능력의 주님을 찾게 됩니다. 병든 사람이 자신의 병을 인정해야 의사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그래서 신앙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결국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어릴 적에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이라는 프로 레슬러가 있었습니다. 김일 선수 박치기 한 방이면 아무리 강한 선수도 다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그는 박치기 후유증으로 생긴 뇌질환으로 인해서 20년이 넘도록 고생하다가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 최배달씨를 아십니까? 본명은 최영의입니다. 이분은 세계를 돌면서 당대 최고의 격투기 선수들을 각개격파한 인물입니다. 심지어 맨 손으로 무려 47마리의 황소의 뿔을 쳐서 부러뜨렸고, 그 중 네 마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무인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72세에 폐암으로 별세했습니다. 그렇게 강한 사람도 실은 언제 깨어질는지 알 수 없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제가 가끔 웃으개 소리로 “머리 좋다고 자랑하지 말라.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망치로 머리 한 대 맞으면 맹구 된다”는 말을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삼손을 보세요. 천하장사아닙니까? 누가 그 힘을 당해냅니까? 성문을 뽑아 버릴 정도의 힘입니다. 이만기, 강호동씨와는 비교될 수 없는 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손을 떼시니 갑자기 무기력해져서 적들에게 잡히고 눈이 뽑히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이 질그릇 같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약한 존재들입니다. 


2. 주님은 보배이십니다. 
   
7절에 보니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았습니다. 그 보배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사야할 보배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 속에 보배이신 주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는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배가 되시는 이유를 두 가지 말해보겠습니다. 첫째는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보배이십니다. 개미 1백 마리 하고 인간의 생명을 바꿀 수 없습니다. 개미가 1억 마리가 되어도 아니 1천억 마리가 되어도 한 사람의 생명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생명이 귀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의 생명을 다 합쳐도 주님 한 분의 생명의 가치만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보배이십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배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느 집에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그 며느리 때문에 늘 싸움만 있던 가정이 평안해 졌습니다. 기울어가던 사업도 며느리 때문에 번창했습니다. 며느리가 음식도 잘해서 병든 가족들이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자식들 교육도 잘 시켜서 아주 훌륭한 인물들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시부모라면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 며느리는 우리 집의 보배야”
   
주님이 우리에게 보배가 되시는 이유는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 받는 은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우리는 보배이신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니 로페즈라는 여성은 47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회생불능의 뇌사상태라고 말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임신 4개월이었습니다. 아기의 운명은 그녀의 운명과 함께 결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산소호흡기 등 생명 보조장치를 모두 떼도록 하고 임종을 기다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그녀의 뱃속에서 아기들이 심하게 꿈틀거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뇌사상태였던 대니 로페즈의 뇌파가 갑자기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완전히 뇌파가 죽었는데 애기들이 뱃속에서 발차고 몸부림을 칠 때마다 뇌파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이 여인은 뇌사 상태에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의 예측을 깨고 무의식상태에서 건강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후 여인은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더니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깨어난 후 자신이 체험담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의식이 가물가물해 질 때쯤 뱃속에서 괴로움으로 요동치는 아이들의 태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고, 나는 절망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순간 내 마음에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라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녀는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 주셔서 이 애기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뇌는 죽었는데 그 영이 속에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녀가 뇌사상태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아기를 순산하고 그 모친도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기도를 가능하게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보배이십니다. 

3. 나는 주님 때문에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질그릇은 요즘 같은 시대에는 그냥 공짜로 준다고 해도 가져갈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배를 담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 질그릇 속에 꿀을 담으면 꿀그릇이 됩니다. 금을 담으면 금그릇이 됩니다. 은을 담으면 은그릇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질그릇이 아니라 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그릇과 질그릇 안에 담긴 것이 하나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박해자요 비방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나 주님에게 쓰임 받으니 보배를 담은 그릇이 되어 사도 중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 때문에 보배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역시 주님 때문에 보배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 영국의 런던 다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추운 겨울 날 한 불쌍한 노인이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동전 한 푼을 얻으려고 낡은 바이올린을 열심히 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신통치 않은 바이올린 솜씨에 행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노인에게 동전을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인 앞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서서 노인에게 “바이올린을 내게 잠시 빌려주십시오”라고 청하더니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연주를 시작하니 같은 바이올린 이었는데 노인이 연주할 때하고는 완전히 다른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는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연주에 감동을 받아서 돈을 던져 넣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행객의 바이올린 솜씨에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교통에 방해가 되자 경찰관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경찰관도 여행객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는 곧 아름다운 소리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시에 가장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니콜로 파가니니입니다.
   
같은 바이올린인데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잡히는 순간부터 우리는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 되어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J. 하드필드 박사는 자신감에 대하여 한평생 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에게 “넌 틀렸어. 이젠 끝났어.” 이렇게 말하고 스스로 마음에 낙심하면 자기가 가진 능력의 30%도 발휘할 수 없는 폐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넌 할 수 있어. 넌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고백하며 자신감을 가질 때는 자기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가 가진 능력을 150%까지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자기가 가진 능력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생각하며 “나는 주 안에서 할 수 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주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주님 때문에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4. 주님을 모신 사람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 만사가 형통하고 복이 눈에 보이게 팍팍 오면 좋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믿는데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환경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나 또한 이 고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가득하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압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가득해도 그것을 이길 능력이 주님 안에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4가지 어려움이 나옵니다. 먼저 8절에 보면 우겨쌈이 나옵니다. 우겨쌈은 새로운 보쌈의 이름이 아닙니다. 사방으로 포위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보배이신 주님을 모신 사람은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엘리사 때문에 아람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작전을 세우면 엘리사가 다 알아버려서 왕에게 방비하게 해서 번번이 아람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그런데 아람 왕이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대를 보내서 아람성을 포위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밖에 나가서 보니까 온 산에 아람 군대가 가득합니다. 그는 놀라서 방에 뛰어 들어가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지자님, 큰일 났습니다. 아람의 군대가 우리를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말합니다. “걱정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군대가 아람 군대보다 많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하니 사환의 눈이 열려서 아람 군대를 포위하고 있는 아람군대보다 더 많은 천군천사를 보게 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기를 포로로 잡으려고 했던 아람 군대를 포로로 잡는 승리를 경험합니다. 엘리사는 우겨쌈을 당했지만 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엘리사와 같은 역사가 믿는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사방이 막힐 때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어려움은 답답한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18절에 보니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답답한지 압니까? 안 깨달아지면 답답합니다. 풀리지 않으니 답답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새벽기도 시간에 개인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한 자매의 기도소리가 들리는데 기도가 참 특이하더랍니다. 자매님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보리보리 보리보리 가을보리,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보리보리 보리보리 가을보리. 하나님 봄보리는 있는데 가을보리는 모르겠어요. 봄보리는 있는데 가을보리가 뭡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자매님! 무슨 그런 기도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매님이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가을보리를 믿으라 가을보리를 믿으라고 하는데 봄보리는 있는데 가을보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가을보리가 어디 있는지 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아이고 답답해. 봄보리 가을보리가 아니고 갈보리입니다. 갈보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산 이름인데 그 산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산이에요. 무슨 봄보리, 가을보리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자매님이 “아이고 그렇게 간단한 것을 안 깨달아지니까 답답했지요.” 하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계획하고 바라는 일이 풀리지 않기 때문에 답답한 것입니다. 계획하고 바라는 것이 잘 풀려 가면 답답할 일이 없습니다. 안 풀리니까 답답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풀 수 없는 문제가 있어도 우리는 낙심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답답할 때 자기 혼자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답을 주실 것입니다.
   
9절에 보니 박해의 어려움이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을 때 그는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버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던 주님이 일어서서 스데반을 응원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박해를 받고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고,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는 지하교회 신자가 약 40만 명에 달합니다. 그 가운데 7만 명 이상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도 기독교인인 것이 발각되어 공개처형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들이 비록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9절에 보면 거꾸러뜨림의 어려움이 나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믿는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2년 전 필리핀에서 제가 사랑하는 후배 조태환 선교사가 괴한들의 총탄에 거꾸러졌습니다. 그가 거꾸러졌으니까 망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땅에 있는 장막 집은 무너졌으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천국에서 여기에 있는 우리들보다 더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조태환 선교사는 망한 것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계 21:4에서 말씀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떠한 환난이나 역경이 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37:23,24에서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성경 잠언 24:16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드리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과하면 부활이 있는 것처럼, 광야를 통과하면 가나안이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보다 더 풍성한 것들로 예비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오베랑 목사님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성도를 찾아가서 보석 두 개를 보여 주면서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어느 보석이 더 빛나게 보이나요?” 그 성도는 더 빛나는 보석을 가리켰습니다. 같은 보석인 데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오베랑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이 보석은 8번 깎았지만 더 빛나는 이 보석은 80번 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실수록 더욱 빛나게 됩니다.” 주님을 모신 사람도 어려움을 당하지만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5. 나는 부인하고 주님의 공로는 받아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10절 11절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말은 언제나 그분의 공로를 인정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죽음,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영생 내 영생이라고 늘 믿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것은 내 것이라는 믿음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지난 가을에 독감주사를 맞았습니다. 독감주사를 맞았으므로 저의 몸에는 독감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습니다. 독감주사를 안 맞은 사람은 독감 바이러스가 찾아오면 감기에 걸려 콜록 콜록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안에 독감에 대한 면역력을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에 독감 바이러스가 왔다가 그냥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게 되면 주님의 공로가 내게 여러 가지 면역력을 주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면역력, 마귀에 대한 면역력, 죄에 대한 면역력, 저주에 대한 면역력, 질병에 대한 면역력 등이 생겨서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생활도 주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주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남자가 아내를 앞서 천국에 보내고 혼자서 아들을 길렀습니다. 이 분이 늙으니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어서 고속도로 옆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짓고 햄버거, 핫도그 같은 것을 팔았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별로 공부도 못하고 무식했지만 성실하게 장사를 했고, 다른 사람보다 햄버거에 고기도 많이 넣고 채소도 많이 넣고 맛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장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거기서 번 돈으로 아들 대학등록금도 내고, 생활도 하고, 가게도 운용비용도 했습니다. 그래도 돈이 남으니 전광판도 하나 갖다가 붙여 놓고 아르바이트생도 두 명 고용해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 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아들이 아버지 돕는다고 왔습니다. 아들이 학문적으로 보니 아버지 장사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아버지,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전광판을 붙이고 햄버거에 고기를 이렇게 많이 넣고 채소를 이렇게 많이 넣습니까? 거기다가 아르바이트생을 둘이나 씁니까? 이러면 망해요 망해!”, 
“그래?”, 
“아버지는 무식해서 몰라서 그래요. 경제학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 경제가 좋지 않은데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 전광판도 꺼야 되고 아르바이트 하는 애들 내보내야 됩니다. 그리고 고기도 될 수 있으면 적게 넣고 채소도 적게 넣어야지 이렇게 많이 넣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들은 지금 대학교 다니면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자기는 그저 새벽기도 때 엎드려서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부탁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주님께서 도와주신다고 믿고서 했는데, 아들이 와서 보더니 틀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에 긍정적인 생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곧장 전광판도 없애 버렸습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애들도 내 보내고 고기도 적게 넣고 채소도 적게 넣었습니다. 그러니 장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 안 팔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잘 안 팔리니까 노인이 생각합니다. ‘우리 아들 말이 맞았구나. 그러면 전에 잘 팔렸던 것은... 그것은 우연히 그렇게 잘 팔렸지. 무식한 내가 뭘 아나. 아들이 하는 말이 맞다.’ 그래서 결국 아들 때문에 장사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짋어지고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상식이나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하심과 주님의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잘 알려진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은 69살에 중풍에 걸려서 쓰러졌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데 의사들이 다 말했습니다. “나이가 고령이고 뇌혈관이 터졌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스탠리 존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능력을 믿었습니다. 방에 들어오는 간호원이나 의사들보고 “안녕하십니까? 그런 소리하지 말라. 반드시 나를 보면 제일 먼저 ‘스탠리 존스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스텐리 존스 선교사가 시키는 대로 그를 볼 때마다 ”스텐리 존스는 예수 이름으로 이러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탠리 존스 목사님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인도로 돌아가서 20년 동안 더 하나님 사업을 하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이게 상식적으로 될 일입니까? 그런데 스텐리 존수는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으로 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인격이나 내 능력으로 살면 안 됩니다.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보배이신 주님이 질그릇인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1. 나는 질그릇 같이 약한 존재입니다.
2. 주님은 보배이십니다.
3. 나는 주님 때문에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4. 주님을 모신 사람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5. 나는 부인하고 주님의 공로는 받아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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