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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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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4-18)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는 오스카 쉰들러라는 독일인 사업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치당원이었습니다. 때는 1939년, 폴란드에서 유태인으로부터 나치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간 한 공장을 인수한 쉰들러는 인건비를 들이지 아니하고 유태인의 노동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많은 돈으로 독일 장교들을 매수했습니다. 그는 군납품업자로서 독일장교 사회에서 그의 위상이 점차 높아갔습니다. 

그가 유태인들을 자신의 공장에 고용하는 의도는 그들을 나치의 살인 만행으로부터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유태인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끌려가는 화물차에 고의적으로 호스를 가져다가 물을 뿌리는가 하면 어린이들을 탄피 만드는 공장에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유태인 1,100명의 명단을 건네주고 독일군을 보석과 돈으로 매수하여 그들을 죽음에서 살려내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전범자가 되어 자기가 살려준 유태인들과의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오스카 쉰들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전범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들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유태인의 지도자급들은 금 치아를 빼서 녹인 것으로 반지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표식을 새겨 그에게 끼워주었습니다. 그들은 오스카 쉰들러의 업적에 대하여 한 사람씩 서명 날인 한 것을 건네주면서 만약 당신이 전범자로 체포되면 이것을 보여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당원의 뺏지를 자신의 옷에서 뽑아놓고 이것만 주어도 두 사람은 살릴 수 있었을 것인데 하고 안타까워합니다. 또 나치당원들이 타고 다니는 승용차를 가리키면서 저것만 팔아 사용했어도 10명은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인데 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는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나치독일의 횡포가 도살처럼 처참한 모습을 보고 죽어 가는 유태인들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서 한 것입니다.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측은지심이 정의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유태인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태인들을 살리는 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했습니다. 그는 유태인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 한명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Ⅰ.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명령입니다.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1) 본질적인 면입니다.

(1) 성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에 『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전하는 과정에 자신의 인기와 명예에 영합(迎合)하여 사람을 의식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셨지만 세상이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이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으니 핑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롬 1:20).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 자체가 미련한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전도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 운동 자체는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받을 축복을 보고 그들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2) 성자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
마가복음 16장 15절에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고 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온 세상입니다. 전파의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따라서 지역을 가리거나 사람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3) 성령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자(martyr)라는 말입니다. 즉 순교적 자세로 예수를 증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 가치적인 면입니다. 

(1) 빚을 갚는 일입니다. 
로마서 1장 14-15절에 『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빚진 자는 죄와 의무의 개념을 동시에 가집니다. 빚을 갚지 아니하면 율법을 어긴 것이므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의무를 가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화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2) 화를 면하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의 보람이 아니라 사명의식이 먼저였습니다. 여기 부득불(不得不)이라는 말이 이 사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4) 교회 부흥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에 『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전도 행위가 있어야 계속해서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전도에 힘을 쓰지 않으면서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과실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Ⅱ. 포용력을 가지라는 명령입니다.

1) 전도의 범위가 온 천하입니다.
본문 16장 15절에 『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고 했습니다. 
복음은 지역을 초월하고 종족을 초월해서 전파되어야 합니다.
여기 만민은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특별한 단위 민족으로써의 인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민족 중에 택자는 개인 개인입니다.

2) 전파의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5-7절에 『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재직했던 반틸(C. Vantil) 교수는 그의 변증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은 살아 계시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때 불신자는 그 증거가 무엇인지를 질문할 것입니다. 당신은 지체 말고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라고 하십시오. 다시 불신자는 묻기를 "성경이 무엇입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십시오. 다시 불신자가 묻기를 "어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때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십시오. 다시 불신자가 묻기를 "성령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거든 그 다음은 "말할 수 없다"고 하십시오. "성령께서 친히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사 대답을 해주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지만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 상을 받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란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Ⅲ. 절대확신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1) 사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한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탄생할 때 임마누엘이란 말로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가 분명합니다.

2) 승리에 대한 자기 확신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 『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고 했습니다. 
여기 『 날 』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입니다. 이 날은 마지막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구속사역의 착한 일에 대한 은혜를 완성하는 승리의 날입니다.
로마서 8장 33절에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송사(訟事)는 법정적 술어로서 칭의(稱義)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사탄이 여호와 앞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송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죄를 사하고 아름다운 옷과 깨끗한 관을 씌우셨습니다(슥 3:1-5).
여호수아는 재판장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심으로 사탄의 송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3) 성령께서 인도하심에 대한 자기 확신입니다. 
시편 110편 3절에 『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롬 8:9; 고전 3:16; 요일 3:24). 그러나 이때는 성령 강림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성령의 인도에 관한 말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전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이나 무질서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전도자는 언제나 성령의 두터운 보호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하지 않기 때문에 전도가 안된다고 하는 말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고 한 말씀은 전도의 원리입니다(요 20:21).
교회는 세상 속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주의 제자들은 그 누구나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지상 교회의 존재의의입니다. 이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없어지지 아니하고 살아남을 교회입니다. 교회가 전파할 줄 모르면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심판의 구주로 다시 오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믿는 자는 영생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영벌의 부활로 다시 살리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반드시 믿지 않는 자는 영벌의 심판이 있다고 전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전해야 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주시라고 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전도 행위는 우리의 맥박처럼 쉴사이 없이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의 피처럼 뜨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22장 18절에 『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고 했습니다.
분명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자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그의 씨라고 하심으로 언약의 성취자를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입니다.

앞서간 천천만 성도들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당장에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쉽게 포기하거나 다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매우 간사한 일이며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담당하기 위하여 교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우리의 미련한 전도 때문에 교회 나오는 일을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교회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전파 행위는 택한 백성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이 사명을 위한 수단으로 우리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목적으로서의 예수, 교회, 복음전파를 통한 택자 구원운동, 수단으로서의 삶, 이와 같은 술어는 실로 엄청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로부터 강력한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수단으로의 기도는 간절하고,
수단으로서의 전도는 뜨겁고,
수단으로서의 대인관계는 떳떳하고,
수단으로서의 힘든 오늘은 언제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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