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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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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1:1-11)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알 수 있었듯이 고린도 교회 안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분파로 인한 갈등의 문제, 우상 제물과 우상숭배에 관한 문제, 교인들 간에 법정 소송에 관한 문제, 불신자들과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문제, 성찬에 대한 오해, 부활에 대한 잘못된 교리, 방언을 비롯한 각종 은사에 대한 문제 등등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를 해서 설명하고 권면하므로 고린도교회 안에 문제가 다 해결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실제로는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 가운데는 듣고 회개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비방하고 거짓으로 모함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성도들을 선동하면서 사도 바울을 가리켜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했고, 원래 사도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르칠 자격도 없는 자”라고 비방하였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가리켜 “공교하게 속이는 자”라고 비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적잖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는 이 외에도 외부적인 고난과 환란도 참 많았습니다.

고후 11:23-28절 말씀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도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고후 12:7-8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불치의 병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심한 눈병이나 혹은 간질로 설명합니다만 성경을 통해 보면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육체의 질병으로 심한 고생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외부적인 환난이 참으로 크고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나,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거짓교사들의 선동에 의해 그의 사도권이 부정되고 이로 인해 복음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에게 외부적인 환난은 오히려 그에게 기쁨이 되고 또한 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짓교사들로 인하여 그의 사도권이 부인되고, 따라서 그가 생명을 걸고 전파한 복음도 부인되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겪는 고통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9절에 보면 이러한 그의 환란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이 고통을 알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모든 점들을 고려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고 다른 복음이 비복음적임을 권면하는 내용의 편지가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후서의 서론 부분을 기록하면서 ‘위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위로’라는 단어를 열 번이나 사용합니다. 

특히 본문 3-4절에 보시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위로’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위로라는 말은 “옆에서 돕는다, 곁에서 말해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령님의 이름이 ‘보혜사’인데, 보혜사는 “돕는자”란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보혜사와 위로라는 말의 헬라적 어원이 같습니다. 따라서 ‘위로’라는 말은 “옆에서 돕는다, 곁에서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친구나 친척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병들거나 사회적으로 능력이 없으면 무시하고 그 곁을 하나씩 떠납니다. 가장 힘들어 할 때 힘이 되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는커녕 더 큰 낙심을 주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위로라는 말 그대로 옆에서 도와주시고, 우리 곁에서 격려해주고, 말을 들어주시고, 또 실제적으로 힘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450:1의 경쟁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이고 당당히 승리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서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너를 죽이리라” 경고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로써 응답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엘리야가 이 말을 듣고 겁이나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합니다. 지칠 대로 지쳐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를 어루만지면서 위로해 주십니다.  

여기서 보면, 엘리야처럼 대단한 선지자도 이렇게 지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대단한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도, 큰 승리의 사람도 넘어질 때가 있으며, 절망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때야 말로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환난이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이 위로의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시고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성도에게나 이웃에게 받지 못한 위로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모든 고통과 환란가운데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환난가운데 있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신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9절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환란이나 고난을 당할 때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서 환란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도록 다듬어 가시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각으로 우리에게 닥치는 환란이나 어려움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나 다윗, 요셉, 다니엘, 욥, 베드로 사도 바울 등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다 환란과 고통을 통하여 믿음을 연단 받았고, 이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실 환란이나 어려움이 오면 너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받을 때 대개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눠집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환란이나 고통을 받으면 아주 악해집니다. 이 경우에는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과 뜻을 모르고,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고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고통 속에 하나님의 비밀한 뜻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믿고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고통을 넉넉한 가슴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나아가서 인생의 연약함을 깨닫고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 가지 종류의 고통이나 환란이나 어려움을 만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시대나 사회나 환경을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대신에 그 고통과 어려움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더 크게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환란과 고난을 주신 또 다른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6절에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은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하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위로와 긍휼과 자비를 받게 되면 이 땅에서 고난과 환란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자비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신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라는 강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은 위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하나님께 받은 그 위로로써 세상을 향해 위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세상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마치 달이 태양 빛을 받아 우리의 밤길을 비추듯이 우리의 위로도 우리 인간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로로서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빅토리아 여왕시절입니다. 한 신하의 아내가 임신을 하였는데 그만 유산을 하였습니다. 실망한 그 신하의 아내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소식을 여왕이 듣고 친히 신하의 아내를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왕이 다녀간 이후 신하의 아내가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안정을 찾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궁금하여 아내에게 여왕이 찾아와서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냐고 물었습니다. 아내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여왕이 손을 잡고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라는 한마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말은 바로 여왕에게도 이러한 아픔이 있었기에 그 아픔과 고통을 다 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들은 아내는 자기의 고난이 자기 혼자만의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 순간 아픔은 물러가고 위로와 소망의 마음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를 위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많은 고난 속에서 위로를 받으면 이제 그러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나의 가난이 유익할 수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을 위로하려고 하면, 나의 실패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병든 자를 위로하려면 나의 육체적인 연약함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도 유용하게 사용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건강해야 하고, 다 형통해야만 영광 돌리는 것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에겐 실패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은 더욱 큰 것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의 극심한 고통에도 하나님의 큰 뜻이 있습니다. 또한 고난 후에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실패와 절망의 늪을 통과해 본 사람만이 실의에 빠진 이웃을 건져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둔 세상에서 빛과 같은 생활, 그리고 썩어져 가는 세상 가운데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빛과 소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바로 낙심한 세상에 대해여 소망을 주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그리고 자신의 이익 앞에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고 대치되어 있는 충돌의 위기 속에 있는 세상에 하나의 안전지대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독을 내 뿜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독과 악을 해독하는 해독제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위로의 말은 천국의 말입니다. 격려의 말은 천국의 언어입니다. 감사의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언어입니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살아갈 때,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가족과 이웃에게 위로와 감사, 격려와 축복의 말을 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받았습니까? 그러면 위로 받을 대상을 이제 찾아보십시오.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받은 위로로 그를 위로해 주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그들이 놀라운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놀라운 기쁨과 보람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먼저 경험하시고 그 받은 위로로 다른 모든 사람을 위로 할 수 있는 성숙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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