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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고후 11: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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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고후 11:22-33)


사람은 '말'은 똑같아도 '의미'는 정반대가 되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대표의 축구 경기를 관람하면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정말 경기를 잘 풀어가고 있을 때에 "잘한다!"라고 칭찬하면서 응원할 때도 있지만 그 반대로 졸속한 플레이를 펼치고 있을 때에도 "잘~한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후자는 결코 정말 잘한다고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핀잔을 주는 말입니다. 
  
이처럼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 뜻하는 내용이 정반대가 되게 말하는 것을 가리켜 소위 '반어법'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반어법이 자주 사용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4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말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너희들이 정말이지 잘하고 있다.'라고 칭찬하는 말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거짓 선생'들 즉 '가짜 사도'들을 잘 가려내어 교회에서 쫓아내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좋다고 졸졸 따라 다니는 모습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사도 바울이 "너희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 가짜들을 잘도 좇아다니는구나!"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당시 고린도교회 내에 있던 허다한 문제들 중의 하나가 교회 내에 몰래 침투해 있던 이단이었습니다.
그런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을 분별해 낼 줄 모르고 오히려 사도처럼 받들어 모시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모습에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사도 바울은 19절과 20절에서도 "19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너희는 지혜로운 자다."라는 말도 물론 글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비꼬아서 말하는 냉소적인 반어법입니다. 
"그 어리석은 자들" 즉 제 자랑이나 하는 어리석은 거짓 사도들이 너희들을 '종을 삼거나' 즉 율법 아래의 종으로 삼고, '잡아먹거나' 즉 사람 잡아먹듯이 돈을 뜯어내고, '자고하거나' 즉 그들의 엉터리 권위 아래 사로잡고, '뺨을 칠지라도' 즉 너희들을 가리켜 율법을 범하였다고 함부로 정죄하면서 온갖 모욕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거짓 선생들 앞에 굽실거리는 것을 보니 너희들이야말로 정말로 똑똑한 사람들이구나."라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경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안타깝기 그지없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오직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증거를 세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그것들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대로 우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육체적 고통'과 '교회와 성도를 염려하는 영적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제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그 마지막 세 번째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 증거들도 그렇지만 이 세 번째 증거는 더더욱 '가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는 그야말로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로 보여 줄 수 없는 결정적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3.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성도입니다.

주의 일을 하면 할수록, 남들보다 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면 될수록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곧 자신의 약함을 갈수록 더 깊이 절감하고 반면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에만 모든 영광을 돌릴 줄 아는 것입니다.
바로 30절부터 33절에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 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32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33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바울이 간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참 이상한 간증입니다.
일견 말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법한 사족처럼 여겨지는 내용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그처럼 누구에게나 흠모될 만한, 누구 앞에서도 자랑할 만한 너무나도 놀라운 두 가지 체험들을 자신의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 된 증거들로서 제시했었습니다.
문맥상으로 보나, 감정의 흐름으로 보나 사도 바울의 고백은 29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미 그 절정에 도달한 듯이 보였습니다.
즉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증거들을 들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다 "아! 사도 바울 선생이야말로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 된 모범이구나!"라고 흠모의 찬탄을 금치 못할 것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기치 못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 절정처럼 보였던 고백 바로 뒤를 이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는 말입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일반적인 작문법에 따른다면 완전히 '0점'에 해당될 말입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멋있게 이끌어 왔던 내용에다가 한순간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는 듯한 사족과 같은 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는 말이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더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 남들이라면 그리 내세울 만한 일도 못되는 지난날의 한 경험담까지 첨부시켜 설명을 했습니다.
32절에서 사도 바울이 회상하고 있는 내용은 그가 갓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을 때에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신자들이 핍박을 피해서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을 때에 바울, 즉 그 당시의 사울은 그들을 추격하여 다메섹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회심하게 됨으로써 '핍박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로 변하는 극적인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울의 회심은 유대인들의 눈에는 바로 배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바울이 오히려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행 9:22) 전도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더욱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은 다메섹 왕과 공모하여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밤낮 없이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다메섹의 기독신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려서"(행 9:25) 그를 간신히 탈출시켜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사건, 사실상 별로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쑥스러운 경험담을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지금 여기서 구태여 자기 입으로 꺼내어 말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이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했던 사건, 자신의 용기 없고 힘없는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던 과거의 한 단면을 말하면서 "내가 부득불 자랑해야 한다면 이것이 바로 대표적인 것이다. 내 자신에게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이처럼 나의 약한 것밖에 없다."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영원히 찬송 받으실 하나님"까지 증인으로 내세워서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라고 확증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왜 그랬겠습니까?
그는 혹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오해하여 자기를 치켜세울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사도 바울은 이처럼 끔찍한 육체적인 고통도 이겨내고 이처럼 뜨거운 영적 고통을 간직한, 정말 초인적인 그리스도의 일꾼이었구나.'라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신을 오해할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내가 무슨 슈퍼맨과 같은 힘이 있어서, 내가 남달리 강한 의지와 인내력이 있어서 그처럼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절대로 아니었다. 나라는 인간 바울로 말하자면 정말이지 약한 것 외에는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그 모든 영광을 오로지 '찬송 받아 마땅하신 하나님'께, 자기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남 앞에 내세울 만한 화려한 신앙의 체험이 자기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수록 더더욱 자신의 연약함을 진실로 더 깊이 깨달을 줄 아는 사도 바울의 성품은 그가 기록했던 서신서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고린도전서 2장 3절과 4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사역했을 때 나 자신은 심히 약하고 두려워하고 벌벌 떨었지만, 오로지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에만 의지하여 너희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거짓 그리스도의 일꾼은 절대로 보여 줄 수 없는 증거였습니다.
그들은 18절에 있는 말씀대로 "육체를 따라 자랑"하던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이 '육체를 따라'라는 말은 '세속적으로'라는 뜻으로 쓰는 헬라어의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즉 가짜 일꾼들은 마치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식으로' 그들의 이루어 놓은 업적 따위를 자랑하면서 자기가 진짜라고 내세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경력을 약력난에 빠짐없이 기입하고 추천장마다 꼭 써 넣어야 하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식으로 "육체를 따라" 자랑했지만, 사도 바울은 정반대로 오히려 자신의 못난 것, 약한 면을 제일의 자랑거리라고 내세웠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반드시 체험해야 할 단계인 것입니다.

사실 이런 자세는 평소에 '육체를 따라' 자랑하기를 잘하는 불신자들조차 때로는 나타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을 때에 자기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자랑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두고 자기 뒷바라지를 해 주신 어머니께 감사를 드리면서 학사모를 대신 씌워 드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연예인이 연말에 무슨 대상을 받게 될 때에도 그 모든 것을 두고 소속사 사장이나 동료나 스텝들에게 공을 돌리면서 박수를 쳐 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겼다는 사람이 조금 충성의 열매를 남겼다고 해서 스스로 자랑하거나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면 그 얼마나 꼴불견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 점을 더욱 명백히 강조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7장 7절 이하 10절에서 "7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무익한"이라는 말은 '아무 쓸모없는' 혹은 '보잘것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종이라는 것은 만약 자기 주인에게 쓰임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무익한' 자신에게 일거리를 준 주인이 그저 고맙기 짝이 없을 뿐이고, 그런 주인이 자기에게 '명령하는 일'이라면 밭가는 일이든지 양치는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다 행하고, 그 후에 주인의 식사를 수종드는 일 역시 당연히 해야 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사례하겠느냐?'고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처럼 자기 종이 자기 일을 다 마쳤다고 해서 종에게 감사하고 절할 주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이 한 일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보다도 종 그 자신부터가 분명히 자각하고 있어야 할 사실이며 끝까지 견지해야 할 기본자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 선배 목사님들도 그와 똑같이 '겸손한 종'의 자세를 견지하시는 모습을 저는 많이 봅니다.
모름지기 큰 교회를 성장시킨 훌륭한 목사님, 많은 선한 일을 충성스럽게 이루어내신 목사님들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석 목사님, 제가 주의 일을 하면 할수록 정말 '내가 무엇을 했구나.'라는 생각은 점점 더 사라지고 '아, 이번 일도 또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셨구나.'하는 간증만 점점 더 진심으로 고백됩니다."라는 간증을 제가 감히 마주 앉기도 송구스러울 만큼 훌륭하고 신실하신 역전의 용장들로부터 저는 정말 자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경향교회의 개척 멤버들과 1대 당회원 장로님들에게서도 그처럼 '모든 영광은 오직 주님께만 돌리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을 늘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분들이 교회와 신학교와 선교 사업을 위하여 그야말로 '생애 최고의 것'을 바치면서 지금까지 섬겨 오신 봉사와 충성을 '육체를 따라' 즉 세속적으로 판단해 보자면 정말 그 어떤 공로패나 표창장을 가지고서도 비길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분들 중에 "저는 제 집까지 팔면서 헌당헌금을 했습니다."라고 '육체를 따라'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습니까?
오히려 "저는 원래 헌금하기 싫어서 외국으로 도망까지 갔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자신의 '약한 것'만 고백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교역자들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전도하는 심방장이나 주교교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주일밤 예배시간에 간증을 하면서 "저는 아파트 주민들에게 욕을 얻어먹고 경비원들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부지런히 전도했습니다."라고 자랑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오히려 "저는 처음에 전도하러 나갔을 때에는 벨을 눌러 놓고도 사람이 나올까 무서워도 도망쳐 나왔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오로지 자신의 '약한 것'만을 고백했을 뿐이었습니다. 

실로 우리 경향교회 안에는 목사가 보기에도 절로 감탄과 칭찬이 나올 정도로 '죽도록 충성을 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 '자기 공로'를 자랑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이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섬긴 것은 '목사에게 고마운 일'도 아니고 '교회 앞에 자랑할 일'도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 예외 없이 통과해야 할 마지막 관문입니다.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주님을 모시고, 아무리 교회와 성도를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긴다 하더라도 만약 이 마지막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면, 결국 그 주인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일꾼이 밑에서 가로채는 꼴로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불충하고도 악한 일이 될 뿐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나름대로 잘 충성한 후에 혹시라도 그처럼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어리석은 실족에 결코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거룩 거룩 거룩 주의 보좌 앞에 모든 성도 면류관을 벗어 드리네" -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 주님 앞에 서게 될 때마다 달리 어쩔 길이 없는 '자동적인 반사작용'입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신실한 목사', '능력 있는 장로', '열심을 다하는 집사'의 면류관이 씌워져도, 아무리 우리에게 '주의 일에 죽도록 충성을 다한 성도'라는 칭찬이 주어져도, 우리 주님 앞에서는 그런 면류관을 그냥 받아쓰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다 /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그것조차) 감사하며 섬기리다"라고, 실로 모든 영광은 오로지 진짜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 경향의 모든 성도들이 이처럼 자신은 '약하고 무익할'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해 주시는 주님께만 늘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일단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미 받은 구원 은혜의 감사와 더불어 장차 주님께로부터 받게 될 칭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느라고 겪게 되는 모든 수고와 고난을 다 통과한 후에 저 천국 보좌 앞에 서게 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친히 들려주실 한마디 말씀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바로 이 한마디 말씀만 들을 수 있으면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긴 수고란 것은 정말이지 깨끗이 갚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카투사에서 근무하다가 제대할 때였습니다.
마지막 날 전역 신고를 하기 위해 미군 중대장을 만나 인사를 드렸을 때, 그 중대장님이 제게 다음 주중에 다시 한 번 부대로 방문해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저의 모범적인 근무를 '제19 비행 대대'의 이름으로 표창하고 싶으니 날짜만 잡으면 자기가 대대장에게 상신해서 준비해 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중대장님께서 저를 칭찬해 주시는 말씀 그 자체가 제게는 바로 최고의 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Your very words are a great reward to me). 저는 이 외에 다른 표창장은 필요 없습니다(I don't need any other letter of commendation)."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중대장님은 저의 서툰 영어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You're a good soldier(자네는 훌륭한 군인이야)."라는 말씀과 함께 마지막 힘찬 악수를 나누어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실 저는 진심으로 그 중대장의 말 한마디로 충분했습니다.
 제가 상병과 병장으로 군생활할 동안 모시고 지냈던 상관이 저를 모범군인으로 인정해 준다는 그 자체만으로, 저는 정말이지 전 대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형식적인 표창장 하나 받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뿌듯했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재림하실 주님 앞에 설 때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무어 그리 받을 상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얼 그리 잘했다고 훈장이니 상장이니 면류관이니 주렁주렁 받을 게 있겠습니까?
그저 우리가 일평생 모시고 섬겨 왔던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한마디만 해 주시면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듯이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일과 오늘 함께 나눈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처럼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칭찬 받는 진짜 일꾼이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자기 몫의 십자가 고통'을 달게 지는 성도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교회를 염려하는 영적 고통'을 느끼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성도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사도 바울이 보여 준 것과 같은, '참된 그리스도 일꾼'의 세 가지 증거가 과연 있는지를 이 시간 각자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광명한 천사'처럼 가장하는 온갖 형태의 '사단의 일꾼'들이 기독교라는 버젓한 간판 아래 마치 자기네들이 진짜 의의 일꾼인 것처럼 설치면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뿌리고 돌아다니는 이 혼란의 와중 속에서, 과연 나 자신은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증거들을 의연히 나타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위해 무언가 한답시고 나서다가도 그것이 내게 힘든 짐이 될 때에는 슬그머니 비켜 오지는 않았습니까?
신자라는 이름은 달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그것 때문에 고난은커녕 고생 비슷한 것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아직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의 첫걸음도 떼지 못한 사람입니다.
교회야 어떻게 되어 가든지 아무 관심도 걱정도 없는 그런 '편리한(?) 무신경'이 내게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내 곁에 있는 교우가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하든지 말든지 조금도 염려되지 않는 그런 뻔뻔스러운 강심장이 자신의 심령을 둘러싸고 있다면 '나도 그리스도의 일꾼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무언가 해 놓았다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사기꾼 같은 버릇이 혹시 내게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 가지고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일꾼처럼 행세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지막 날에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그 멋진 칭찬으로 인정받는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은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는 길에도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자신의 세속적 조건이나 배경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이라고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성장한 가정의 신앙 분위기, 내가 몸담고 있는 교단의 이념, 지금 내 이름 앞에 붙어 있는 교회의 직분 - 이런 것들만 가지고는 결코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진짜 일꾼인 것을 증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로 인하여 당하는 약간의 육체의 고통쯤은 넉넉히 이겨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주님께서 가장 귀중히 여기시는 교회와 그 지체된 영혼들을 위한 염려가 내 피부에 와 닿는 통증보다도 훨씬 더 아프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리 많은 성도들이 흠모하고 칭찬할 만한 충성을 바쳤다 하더라도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만을 더욱 깊이 통감하는 가운데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자세를 끝까지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진짜들만이 가짜들 앞에서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달게 지고 그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와 서로 교제케 하신 교우를 아끼고 사랑하며 바로 그 주님께만 모든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림으로써,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우리 주님의 칭찬의 자리,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만 베풀어 주실 그 마지막 영광의 자리에 다 함께 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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