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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인 선언 - (4) (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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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인 선언 - (4)  (마 5:1-6)
  

사람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초만 되면 온 집안에 부적을 붙이고 아주 진지하게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고사를 지낼 때도 돼지머리 앞에서 진지하게 절을 하면서 복을 기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복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세 가지 놀라운 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이 되기를 희망하고 어른이 된 뒤에는 아이로 되돌아가기를 열망한다는 것과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고 다시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다가 갑자기 어느 날 무의미하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여덟 가지 복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여덟 가지 복을 요약하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된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살면서 내 삶이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고 소명을 이루어 자녀로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다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두 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뒤의 연은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고 있고 앞의 연은 여덟 가지 복을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어떤 사람이 여덟 가지 복을 누리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가난은 말 그대로 가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가난 앞에 심령이라는 명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 심령은 헬라어 “프뉴마”(pneuma)라는 단어로 속사람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내 안의 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내 안의 내가 가난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가난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나임”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겸허한 심령상태를 말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이런 마음의 가난한 상태, 즉 겸손과 겸허함이 요구됩니다. 이 겸손과 겸허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내적 상태는 겸손과 겸허함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의 가난을 팔복에서 첫 번째 덕목으로 삼으셨습니다. 때로는 이 가난이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목회자는 한결같이 가난한 출신들입니다. 때로 목회자 중에 부잣집 아들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하나같이 실패합니다. 목회과정에서 겪는 고된 일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이런 대우를 받는가 하고 그만둬 버리기도 합니다. 믿을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그만 두어도 살길이 있고 의지할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난한 목회자는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의지할만한 물질도 다른 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절박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마음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심령이 겸손합니다. 시편은 대부분 그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시입니다. 시편 69편 29절에는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시편 70편 5절에는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시편 74편 21절에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시편 51편 17절에는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영적 배고픔입니다. 이 영적 배고픔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천국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간절한 것이 없어집니다. 

한때 미국 이민자들이 미국생활을 천국생활이라고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미국에 가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부흥회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주제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에 한 신자가 찾아와 말하기를 “목사님 미국에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설교는 하지 마십시오, 여기가 천국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은 밥맛이 좋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플 때는 조금만 주어져도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조금만 실수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상대를 찾아가 사과하고 용서를 빕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하여 내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아픈지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 

4절을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애통”은 “영적인 애통”을 말합니다. 이는 죄를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 에 대하여서 슬퍼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죄에 대하여서도 탄식하게 됩니다. 특히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는 분들을 보면서 마음으로 애통해하고 눈물로 중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애통을 헬라어로 “펜둔테스(penthuntes)”라고 하는데 이는 비통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오시리라고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야는 자꾸만 늦어져서 백성들은 매일 탄식했습니다. 

그 사이 로마는 더 강해져서 구원이 점점 막막해 보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뜻있는 신앙인들은 모든 환란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고 이 억압이 자기 조상들의 죄 때문임을 고백하고 비통해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 마음이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죄, 나의 무능에 대해 애통해 하고 나의 교만, 자만, 욕망의 깊어감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의 위로는 하늘로부터의 위로입니다. 

하늘로부터의 위로가 주어진다는 말은 그 기도가 응답받는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최대의 위로는 그 기도가 응답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엄밀히 말하면 매일 평안하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세상을 보며 슬퍼해야 하고 시험당하는 이웃을 보고 애통의 눈물을 흘리고 고난당하는 친구와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하늘로부터 위로의 복, 기도응답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은 메시야의 도래를 고대하며 매일 기도했습니다. 당시 메시야의 도래가 늦어져서 모두 낙심하고 소망 없이 살아가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로마의 압제는 날로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시므온은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가 마음이 가난한 자의 기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므온은 정결예식을 위해서 성전에 온 어린 예수를 만납니다. 시므온은 그 예수를 품에 안고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제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를 보며 애통해야 하고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모인 것이 얼마 전 1000회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할머니들도 연세 때문에 한분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죽어가기 전에 한마디라도 사과의 말을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타까워집니다. 그런데 일본은 반응도 없습니다. 그런 일본을 생각하면 마음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옵니다. 그래서 눈물이 흐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세상의 죄와 불의를 보면서, 세상의 선한 자가 고난 받고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이들이 학교에서 폭력을 사용합니다. 요즘 학교에서 폭력문제가 화제입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나쁜 모습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인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려서부터 저렇게 악하면 앞으로 얼마나 악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중보기도실로 들어가 눈물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작게는 나의 영적 무지와 빈약함을 위해서 애통해야 하고 크게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기를 위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고 살아가기를 위해서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 위로는 기도 응답의 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시하신 두 번째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자 

5절을 보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역설입니다. 강한 자가 땅을 차지하는 법입니다. 어떻게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로마라는 너무나 강대한 나라에 살면서도 온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강한 로마를 몰아내고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그런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대에도 온유하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니체는 이 말을 약자의 변명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에 대항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그 말밖에 더 할 말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약자라서 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온유라는 말은 헬라어로 “푸라우스(praus)”라는 단어로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이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온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라”고 하셨고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는 “너희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으라.”고 하셨으며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서는 “너희는 믿음과 인내와 온유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온유가 가장 강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강한 힘이 온유라는 것을 예수님이 강조하셨고 사도바울이 강조한 것입니다. 정복자는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뺏고 정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온유로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처음에는 밀리는 것 같았고 지는 것 같았고 실패자 같이 보였지만 예수님은 온유로 모든 것을 다 이기셨습니다. 마치 햇빛이 세상을 다 녹이듯 말입니다. 햇빛은 소리도 없고 요란함도 없습니다. 그러나 햇빛은 소리도 없이 이 세상을 다 녹입니다. 

이삭이 이방 땅인 그랄에 거주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또 메웠습니다. 이삭은 또 도망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멀리 도망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삭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창 26:22)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정복자들은 물의 근원을 찾아 헤맸지만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가는 곳 그곳에서 우물을 파면 물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그것이 온유한 자가 받는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이론은 뺏어야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정반대로 온유해야 땅을 얻고 승리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이론은 모두 역설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복된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온유한 사람이 마지막에 승리한다는 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6절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하심 즉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입니다. 또한 자비하심은 긍휼이고 온유이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의가 이 세상에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의를 세우는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의를 이루기에 능력이 크게 못 미칩니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불의가 판을 쳐도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감각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 즉 인간의 내적 자아를 채워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내적공간은 영적 요소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은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빈 공간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기꺼이 헌신하는 헌신자들이 있고 막대한 헌금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오늘의 평안을 반납하고 전도자의 삶을 사는 전도자가 나오며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순교자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영혼의 빈 공간을 채우고자 하는 뜻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의사 게리 헤멀린은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라는 책에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사십 평생을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해서 바보 같은 일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첫째, 사재를 털어 방황하는 십대를 위한 센터를 건립하자. 둘째, 가난한 여인과 아이를 위해 무료진료소를 짓자. 셋째, 더 많은 시간을 선교사역에 동참하자.”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이 운영하던 병원의 문을 닫고 하와이로 건너가 평생 선교에 몸 바쳤다고 합니다. 

이 마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마음입니다. 1939년 젊은 목사 본회퍼는 뉴욕 항을 떠나 고국 독일로 향했습니다. 그 당시는 히틀러가 사람을 마구 죽이고 전쟁이 확산되던 때입니다. 그 가운데 독일교회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압력을 받아 히틀러 만세를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본회퍼는 고국과 독일 교회를 깨워야 한다며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독일에 도착하여 교회를 향해 회개를 외쳤습니다. 또한 히틀러의 죄상을 공개하였고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죽인 것도 고발했습니다. 마침내 본회퍼는 히틀러 제거운동에 가담하였고 결국에는 투옥되어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에 와서 본회퍼는 목사가 과격한 반정부운동을 했다고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뒤틀린 역사가 종료되려면 누군가가 희생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그 어려운 시대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야 말로 의에 주리고 목말랐던 사람입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단지 많이 먹고 배부른 것입니까? 좋은 집에서 편안히 살고 잠 잘 자는 것일까요? 진정한 복은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온유한 것입니다. 애통하며 의에 주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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