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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피할 수 없다. (욘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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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피할 수 없다. (욘 1:1-17)


1. 선택받은 자의 사명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지금부터 약 2,700여년 전, 북이스라엘왕 여로보암 2세 때의 선지자입니다. 요나는 우리가 너무나 익히 잘 아는 선지자입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피하여 달아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죽을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자신들의 악행을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기로 계획한 재앙을 내리지 않고 용서해주셨습니다. 

요나서는 우리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인 요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앗수르를 미워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있습니다. 다시스는 이스라엘의 남서쪽인 지금의 스페인의 항구도시입니다. 니느웨의 반대편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버림받은 백성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세계 열방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예수 믿게 하신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세계 열방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복의 통로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갑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복을 주셨습니다. 구원의 복을 주셨습니다.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충만한 사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복을 우리의 이웃에게 유통하라고 우리를 먼저 불렀습니다. 우리는 축복을 유통하는 사람입니다. 

2.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나 선지자란 직분을 맡기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특별한 직분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란 직분을 받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의 복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일을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 사랑을 믿는 성도들을 통하여 나눠주십니다.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자입니다. 그의 입과 손발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문제입니다. 요.. 나는 그렇게 하기 싫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할 과제입니다.
4장1-2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악한 도시이기 때문에 당연히 망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시니 요나는 몹시 화가 났다고 합니다. 

어느 부인이 부모없이 자라는 불우한 어린이들의 삶을 방영하고 있는 TV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눈시울울 붉히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한창 TV를 보고 있는데, 아들이 와서 밥을 달라고 합니다. 이 엄마, 밥 달라는 자식을 TV보는데 방해된다고, 시끄럽다고 때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실제 가능합니까? 네, 실제 그렇습니다. TV드라마에 빠져서 불쌍하다고 눈물 흘리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그런 불쌍한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생각 따로, 행동 따로, 각자 따로 노는 것입니다. 
사랑을 좋아하면서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외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사랑을 그렇게 베풀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선지자인데,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데, 그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요나,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큰 은혜입니다. 

3. 이방인도 그렇지 않은데...

저는 지난 주간에 오늘 말씀을 수십차례 묵상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인 사공들이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보다 더 낫습니다. 
요나가 탄 배는 큰 풍랑을 만나 거의 깨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공들은 자기의 신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무엇을 합니까? 
5절 하반절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화가 났습니다. 요나를 깨웠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느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런데도 요나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잡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에 실은 화물을 바다에 던집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제비를 뽑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런 풍랑이 일어났는지 찾기 위해서입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네가 뭐 하는 사람이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 
요나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9절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여러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갈 수 없지 않습니까?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어디 도망간들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풍랑이 일어서 배가 뒤집혀 모두 죽을 지경이 되면, 당연히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제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으면 안됩니다.” 
선지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보다 사공들이 훨씬 낫습니다. 

요나에게서 우리는 말은 잘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행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저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라고 설교하면서도, 실제로 제 삶에 무슨 어려움이라도 생기면, 속으로 벌벌 떱니다. 기도하면서도 걱정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민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진정성의 문제입니다. 정말 그렇게 사느냐? 정말 그렇게 믿느냐? 말만 하고, 실제 그렇게 믿지 않잖느냐? 바로 요나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던져라고 합니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할 것이라고요. 하지만, 사공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습니다. 안간 힘을 써서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습니다. 
요나의 무관심, 미움에 비해, 사공들은 얼마나 사람을 아끼고 사랑합니까? 
사람이 자산입니다. 사람이 미래입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이 전부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을 겪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에게는 이런 것들이 전혀 없습니다. 
남이야 굶어죽든지, 친구의 자녀가 등록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 말처럼,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사공들은 요나를 살리려고 애씁니다.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 애정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4. 사랑,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나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손해만 봤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삯만 낭비했습니다. 배에서 보낸 시간, 그리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을 피하면, 물질의 손해를 볼 뿐 아니라, 시간도 손해봅니다. 배의 물건을 모두 바다에 던졌다고 합니다. 요나는 자기 때문에 함께 배에 탄 다른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경제적, 시간적 손실을 입혔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이렇게 불순종하는 요나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예비해놓으셨습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이미”입니다. 요나를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바다에 던져질 요나를 위해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시편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사랑하는 청산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피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캐나다에 가면, 테리 폭스(Terry Fox)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모르면 간첩일정도로,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그의 이름을 딴 학교도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캐나다 2달러짜리 주화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테리 폭스는 농구를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캐나다의 명문대학인 사이먼프레이져대학교 1학년 때, 악성골종양이란 판정을 받아 오른쪽 무릎 위 15cm까지를 잘라내야했습니다. 수술 후, 마라톤 잡지를 보다가 뉴욕마라톤 사상 처음으로 의족을 한 채 완주한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신과 같이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암연구와 치료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로 결심합니다.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달고, 캐나다를 동서로 약 8,000km를 종단하여 달리는 도전을 했습니다. 성한 사람도 꿈도 꾸지 못할 일을, 무모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부모와 친구들 모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테리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캐나다의 방송은 물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외로운 달리기를 합니다. 퀘백에 도달했을 때, 미국 시애틀방송국이 그를 인터뷰하여 전파를 보냈습니다. 이후부터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미국과 캐나다의 TV방송들이 앞다퉈 테리의 뒤를 쫓아 매일 보도해주었습니다. TV에서 테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유명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닙니다.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테리는 대륙횡단 마라톤으로 100만달러를 모금하겠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암으로 죽어도, 그 돈으로 과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하여 암환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란 신념이 확고했습니다. 무리한 주행 탓에 절단된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물집이 생깁니다. 염증이 갈수록 심해지고 고통이 가중됩니다. 그만두라는 주위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달리던 테리, 143일째 선더베이에서 그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143일동안 하루 37.6km를 매일 뛰어 5373km를 뛴 것입니다. 그는 22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캐나다 전국에 족가 걸리고 국민들이 애도하였습니다. 143일째 그가 달리기를 중단했을 때, 170만달러였던 모금액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2300만달러였고, 그 모금은 최근까지도 계속되어 이젠 5억달러가 넘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고통을 당하는 다른 암환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사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건강해질 수 있다면, 내 몸을 이렇게 불태우리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한 사람이라도 더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내 삶을 헌신하리라 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습니까? 

2월 한달동안 주일마다 요나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눌 것입니다. 우리 이웃에 있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올해 우리교회는 오이코스 운동을 합니다. 52코스란, 우리 각 사람이 다섯 명의 예비신자를 작정하고, 한 해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섬김으로, 그 중에 두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운동입니다. 니느웨 백성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우리 이웃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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