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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훈련의 회복과 열정 (신 3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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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의 회복과 열정 (신 32:9-14)


“제자입니까” 라는 책을 썼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요양소와 같은 교회와 또 하나는 훈련소와 같은 교회입니다. 요양소와 같은 교회는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고 낙심한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통하여 힘과 위로를 얻는 교회입니다. 훈련소와 같은 교회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쓰임받기 위하여 훈련을 받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파송하는 교회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다시 교회를 선택한다면, 어떤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는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각자 한번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과 평안을 주는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를 택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병을 안고 씨름 하는 사람에게 병이 나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준다면 얼마나 반가워하겠습니까?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하루하루 피곤하게 사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님에게 오세요. 하고 말하면 그 말 때문에 교회를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성향입니다. 실패하여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낙망하지 마세요. 하면서 소망과 희망을 주는 교회로 인도한다면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를 나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강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펴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거룩한 강자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강한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 집니다. 

훈련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training이 있고 또 하나는 discipline이 있습니다. training 은 우리의 육체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면 discipline은 우리의 인격과 삶의 자세를 다듬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훈련시킨 것은 육체적인 훈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즉 삶과 인격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되기를 원하는 것 입니다. 시험가운데 던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유혹 가운데 두시기도 합니다. Test를 통해서 단련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Training 이 능력을 향상시킨다면 discipline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인격을 만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 위한 마지막 정상을 앞에 놓고 우리의 인격과 삶을 거기에 맞추고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기 위하여 전력을 쏟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 모두의 영적인 어머니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을 배웁니다. 훈련을 받습니다. 그래서 내 믿음이 자라도록 합니다. 내 신앙인격이 계속 주님을 닮아 성숙하도록 노력합니다. 신앙생활은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한 자리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뒤만 돌아보면 안 됩니다. 앞으로 계속 나가면서 올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전에 훈련받았다는 추억으로 신앙생활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중요합니다. 왕년에 훈련받은 것은 이미 지났습니다. 근육은 쓰지 않으면 금방 약해집니다. 허벅지에 깁스를 하고 두 달만 가만히 있어보십시오. 다리가 가늘어집니다. 힘을 쓰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훈련을 통해 믿음의 근육을 단련하지 않으면 쉽게 쓰러집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패하고 맙니다. 교역자로부터 중직들, 제직들, 교사, 찬양대, 성도...누구든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성경공부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이 말씀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던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교훈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신롸했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 짧은 본문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 세가지 방향에서 요약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9,10절에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둘째는 11,12절에 우리를 독수리같이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에는 13,14절에 우리를 만족하게 먹여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를 독수리같이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을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그 당시에는 교련 과목이 있었는데 교련 선생님을 제일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훈련을 받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훈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즘 임직자 20여분을 훈련하는데 정말 고달프죠. 시간과 모든 것을 내 방식대로가 아닌 훈련자로 배우는 자리를 누가 선뜻 좋아하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나이가 50이 넘은 대부분의 사람을 앉혀 놓고 늘 쪽지 시험을 보니까 누가 좋아하겠어요? 

노력한만큼 성적이라도 잘 나오면 몰라도 늘 비참하죠? 어떤 자매는 “목사님! 우리 집에 오면 이 암송할 것들을 화장실에도 붙여놓고, 안방, 부엌, 화장실에도 붙여놓고, 심지어 ‘포스트 ?’에다 빼곡이 깨알처럼 써가지고 정말 주야로 묵상하는데 시험만 보면 신기할 정도로 다 머리에서 하얗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외워도 뒤돌아서면 까먹죠? 그러니 누가 훈련을 좋아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는 제자훈련을 하지만,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훈련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훈련을 달가와 하지 않는데도 우리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엄하게 훈련시키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실감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모세는 하나님을 독수리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어떻게 훈련시킵니까? 

1. 어미 독수리는 때가 되면 새끼들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것입니다. 독수리는 보금자리를 높은 절벽이나 벼랑 위에 만듭니다. 아무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곳에다가 둥지를 틀고 자기의 털이나 다른 부드러운 물질로 폭신한 침대를 마련합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 알을 까서 새끼를 기르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집은 매우 튼튼합니다. 새끼들은 안심하고 거기서 어미가 물어다 주는 것을 받아먹으면서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눈만 뜨면 파란 창공이 올려다 보이고 둥지 아래에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집니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둥지에서 새끼들은 날마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들을 못살게 굴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11절에서는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새끼들은 갑자기 변한 어미를 보고 어리둥절합니다. 어미 독수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개를 계속 펄럭이며 입으로 새끼들을 둥지 가장자리로 마구 밀어내기도 합니다. 새끼들은 어미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보금자리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소리를 지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대부분이 보금자리에서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행복해. 나는 더 이상 바라지도 않아. 나는 만족해.’ 하면서 꿈같은 세상을 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2. 또 하나의 훈련은 공중에서 떨어뜨리십니다. 

독수리 새끼들이 이제 둥우리에서 기어 나오면 어미 독수리는 아주 높은 곳까지 긴 날개 위에다가 새끼를 얹어 고공으로 올라갑니다. 새끼는 잔뜩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미가 새끼를 사정없이 떨어뜨려 버립니다. 새끼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필사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날개는 있어도 사용한번 해 본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펄럭 거려도 훈련 안 된 날개 쪽지는 거의 무용지물에 가깝습니다. 어미도 높은 공중에서 이 광경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조금만 지체하면 땅에 곤두박질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땅에 곤두박질 칠 바로 그 순간 어미는 쏜살같이 내려가서 힘 있는 날개로 안전하게 받아 다시금 높은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얼마 지나 새끼를 다시 떨어뜨립니다. 어미가 몇 번이나 이 훈련을 반복시키는지 모르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새끼가 지기 힘으로 날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종종 이것과 아주 흡사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잔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에는 어려운 문제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절대 안들어 주시고 1년, 2년 끄는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즉시 고쳐 주실 것 같은 질병인데도 �耐맨構�오랫동안 고통을 줄 때가 있습니다. 불평을 그치고 잠잠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왜 이러실까요? 능력이 없어서 일까요? 아니면 나를 미워하시기 때문일까요? 나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분명히 목적을 두고 공중에서 우리를 반복해서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정말 힘든 기간이 아닙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회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지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이 나를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다루시는 것입니까? 높은 하늘을 힘차게 날을 수 있는 믿음의 날개가 생길 때까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생활이 힘들고 고된 일이 자꾸 반복이 되면 하나님이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신 없이 추락할 동안 누가 지켜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독수리가 그 새끼를 땅에 부딪히게 하여 죽게 내버려두지 아니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망하도록 방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큰일이 났구나’하는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려운 고난을 통해서 연단시키시지만, 절대로 망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둘째는 독수리 새끼가 여러번 떨어지는 훈련을 통해서 결국은 스스로 날 수 있게 되듯이 우리 역시 어려운 고통과 역경을 수없이 거치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날 수 있는 믿음의 날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금방 자라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철야기도를 이틀이나 사흘을 했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금방 완성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어떻게 보면 독수리 새끼의 날개와 비슷합니다. 날개의 힘이 생기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험한 경로를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그가 가진 신앙의 날개는 더 튼튼합니다. 

‘스타인웨이’라는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는 140년과 동일하게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피아노를 만들 때는 200명의 기술자가 2만개의 부속품을 가지고 만듭니다. 18겹이나 되는 단풍나무를 휘는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건반하나를 만들 때에도, 두드리는 방에 가서 만 번 이상을 두드려보고 건반의 소리가 변함이 없을 때 사용이 됩니다. 아름답고 정확한 소리가 있기 때문에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이 피아노를 찾습니다. 그만큼 다듬어 졌기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연주자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악기가 되었고, 그랬기에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찾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훈련을 받고 난 이후에 내 인생을 연주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의 아름다운 인생을 연주하시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내 삶을 연주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에 엉뚱한 음을 들려드리는 인생이 아니라 조화와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께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하늘의 기준을 가진 사람은 어떤 훈련을 받아도 그것을 수용을 합니다. “나를 무기력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지 않으시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훈련을 거친 사람들은 세상가치로 현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거듭된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그 믿음, 그 소망이 있기에 현실 앞에 쉽게 무너지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현실을 맞섭니다. 

여러분, 강한 훈련을 통과한 독수리를 보세요. 멀리서 폭풍이 접근하면 본능적으로 금방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그는 즉시 폭풍이 몰려오는 방향을 향해 날개의 각도 조정을 기다립니다. 세찬 바람이 지나갑니다. 그 바람은 독수리를 떨어뜨리거나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고공으로 치솟게 만들어 버립니다. 알맞은 각도로 조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바람의 힘을 역이용하여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오른 높은 창공에는 폭풍이 미치지 못합니다. 아래에는 폭풍우기 마구 스쳐 지나가지만, 그는 유유히 그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여유 있게 하늘의 그 광대함과 찬란함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훈련을 받은 독수리에게는 폭풍우가 전화위복을 가져다주는 한낱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훈련 여하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날개의 강도가 달라집니다. 이런 훈련된 자에게는 인생의 폭풍우가 몰아쳐도 이것이 큰 위협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날개가 없는 사람은 폭풍우가 몰려오면 이리저리 얻어맞다가 나중에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립니다. 인생의 폭풍우를 감당할만한 믿음이 없으니까 매일 얻어맞다가 맙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즐거움을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니기가 쉽상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어려운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날개가 힘을 얻어서 스스로 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반복된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아야합니다. 그 모든 문제는 결국 우리에게 힘있는 날개를 달아주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몇해 전이죠?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와 그의 부인이면서 전에 유명한 영화배우이기도 했던 윤정희 씨 부부가 한국에 왔을 때 기자와 나눈 대담내용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백건우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입니다. 나이도 70세에 가까워 아주 완숙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남편에 대해 윤정희씨가 이렇게 말하는 것예요. "제 남편은 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말을 듣고 기자가 놀라서 반문했습니다. "남들은 백 선생님을 정상에 오른 사람으로 평가하는데요?" 그러자 윤정희 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올라가는 게 한이 없잖아요. 우리는 정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이처럼 위대한 예술가들이 예술의 경지를 앞에 놓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을 봅니다. 백건우 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틈만 나면 연습을 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레퍼토리가 충분한 사람인데 집요하게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설정한 어떤 정상이 있기 때문에 그 정상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아노의 스피릿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4-5년 동안 연주해야 될 스케줄이 꽉 차있을 정도로 살아 있습니다. 

예술의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도 이런데, 하물며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광스러운 신분에 있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게을리할 수 있습니까? 이제 우리 교회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씀 앞에 예배와 교제와 전도 그리고 봉사, 오늘 훈련이 다섯가지가 잘 균형을 갖추어져서 세상에 희망을 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어려움이 있고, 또 뜻하지 않는 문제가 있을찌라도 그 문제에 눌리지 말고 그 문제를 타고 오늘 수 있는 강한 믿음의 날개를 달고 올라야합니다. 믿음의 날개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천국의 생활을 맛 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날개의 힘이 없어서 높이 날으지 못하는 것이 탈입니다. 

우리가 강한 믿음의 날개만 달면 그래서 높이 솟을 줄만 안다면 언제나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볼 수 있고, 바위에서 샘이 터지는 응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풍성함을 맛보는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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