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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행 11:24-26) -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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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행 11:24-26)

엊그제 인터넷에 ‘친구의 특이란 이름’이란 제목으로 글이 올라와 많은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교복을 입은 학생의 명찰을 사진으로 찍어 올렸는데, 그 이름이 ‘최첨단’이었습니다. 스마트한 이름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특이한 이름들이 나열되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이상하거나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개명을 신청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개명신청을 한 재미있는 이름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방귀남, 신호탄, 김만두, 하지만, 경운기, 임신중, 주사위, 문지기, 고구마, 나거지, 곽엑스, 빈그릇, 도레미 등등’입니다. 
  
이름들 가운데는 이름만 보면 참 예쁜 이름인데, 앞에 성을 붙이면 이상한 이름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름은 ‘진년’인데, 성이 ‘조’씨입니다. 엑센트를 좀 강하게 하면 불쾌한 이름이 되고 맙니다. 또 이름은 ‘상범’이라는 평범한 이름인데, 성이 ‘현’씨여서, ‘현상범’인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이름이 ‘도야’인데, 성이 ‘강’씨입니다. 

몇 주 전에는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 일본식 이름 짓기가 유행한다는 인터넷 글이 회자되었습니다. 자기의 생일을 가지고 만든다는 것인데, 태어난 달과 날짜를 조합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생일이 10월 12일이라면 10월에 해당하는 ‘카게노’와 12일에 해당하는 ‘켓쇼오’라는 글자를 조합해서 ‘카게노 켓쇼오’가 저의 일본식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10월에 해당하는 ‘카게노’라는 말은 ‘그림자’라는 뜻이고, 12일에 해당하는 ‘켓쇼오’는 ‘결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카게노 켓쇼오’라는 이름의 뜻은 ‘그림자의 결정’입니다. 
  
아이들 사이에 그냥 재미 삼아 하는 놀이인데, 그것이 만연되다 보면 우리 아이들의 사고 속에 우리나라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그런 유행은 오래 가지 못하고 금방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전주와 같은 작은 도시에서는 별로 없습니다만, 서울에서는 미국식 이름을 갖는 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식 이름을 가져야 아이들이 국제적인 감각을 갖게 되고 글로벌 시대에 맞는 아이로 자란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런데 미국식 이름을 갖는다고 해서 아이가 영어를 잘하고 국제적인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그렇다면 영어 이름 짓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름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름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름에 그 사람의 운명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 했고, 좋은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 돈을 줘가며 작명소에서 이름을 짓지도 했습니다. 또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으로는 출세할 수 없을 것 같아 출세하기 위해서 본인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이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성경에 종종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꿨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원래 이름이 사래입니다. 그런데 ‘여주인’이란 뜻을 가진 ‘사라’로 이름이 바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이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꿔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름은 그의 생애의 요약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름이 갖는 의미는 남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보면 그 사람의 생애가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붙여진 새로운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 이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박해는 더욱 거셌습니다. 계속된 박해를 피해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지로 흩어지면서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박해를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이긴 하지만, 그들은 가는 곳마다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박해를 피해 도망하던 성도들로 인해서 소아시아에 있는 안디옥에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안디옥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날로 부흥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지성인이라고 자청하는 헬라인들까지도 예수를 믿게 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해서 안디옥 교회는 짧은 시간에 크게 부흥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21절에 “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가 짧은 시간에 크게 부흥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안디옥 지역에 복음 전해지게 되었고, 빠른 속도로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안디옥 교회를 돌볼 목회자를 급히 파송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사도들로부터 안디옥으로 파송된 바나바는 아주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4절에 바나바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착한 사람’이라는 말은 성품이 좋은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며, 동시에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좋은 목회자인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 부임한 바나바가 보니까 모든 것이 다 좋은 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안디옥교회는 유대인들만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많은 헬라인들까지도 복음을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스스로 생각할 때 그 많은 헬라인들을 믿음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는 데에 자신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옵니다. 안디옥교회를 함께 섬길 동역자로 사울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울은 헬라문화와 헬라철학에 아주 해박한 사람이요, 헬라인들의 성향을 너무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안디옥교회를 함께 섬긴다면 더 아름다운 목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의 그런 생각은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안디옥교회를 섬기자 안디옥 교회는 더욱 부흥했습니다. 본문 26절에 “큰 무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1년 동안 안디옥 교회를 섬기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더 중요한 것을 우리게 가르쳐줍니다. 안디옥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단어를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몇몇 학자들은 안디옥교회 교인들에게 붙여진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경멸적인 용어였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수치스럽고 간교한 것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경멸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사도행전 26:28절에, 그리고 베드로전서 4:16절, 이렇게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4:16절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경멸적인 말이라면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의 어투는 조금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지 모르지만, 그 말 자체는 성도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하는 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충성스런 무리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목회자인 바나바와 사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되어갔습니다. 겉모습만 신앙인다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런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안디옥에 사는 사람들이 ‘저들은 예수에게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야,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들이야,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야.’ 그렇게 생각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불어준 것입니다. 

26절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단어는 ‘비로소’라는 단어입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기대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런 사람들이라고 불려지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안디옥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기대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경멸적인 용어였다면 오늘 본문에 ‘비로소’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들을 경멸하는 단어였다면, 뭐가 좋다고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고 기록했겠습니까? 자랑스러운 이름이기에 ‘이제사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교회 교인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고 싶으신 이름입니다. 아무에게나 붙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성도들에게 붙여주시고 싶으신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만큼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주고 싶으신 이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대에 걸맞는 모습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이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장면이 두 번 소개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32장입니다. 외갓집 하란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부자가 된 야곱이 네 명의 아내와 아이 12명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얍복강가에 이르렀을 때 형 에서가 군사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야곱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20년 전 눈 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서 외갓집 하란으로 도망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 형 에서는 대단히 노여워했습니다. 야곱을 죽이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화가 나 있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야곱은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야곱은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가족들과 하란에서 가지고온 모든 재산을 모두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야곱 홀로 얍복강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날이 새려 하는데도 야곱이 그 사람을 놓지 않자,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자신의 이름은 ‘야곱’이라고 대답하자 그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었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세기 32:28) 
  
이렇게 해서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을 새로운 이름으로 바꿔주기 위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성취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도 속였고, 아버지도 속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 때에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긴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이름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어찌 간교한 술수를 가지고 살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마가복음 5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셨을 때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무덤 사이에 살면서 온갖 행패를 다 부리는데도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산에서나 무덤에서는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돌로 자기 몸을 자해하여 피로 범벅이 되기도 해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가 대답합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마가복음 5:9) 예수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들어 있는 귀신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놓고, 그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어버린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물음 역시 그 귀신의 이름을 알고 싶으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사람을 괴롭게 하느냐’고, ‘네가 뭔데 그를 그렇게 망쳐놓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말한 그 귀신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때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야곱이라는 이름처럼 늘 누군가를 속이고 자기 욕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다면, 우리의 이름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름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피폐하게 만든 군대귀신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남에게 도움과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2002년 10월,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한 형무소에서 여성 한 명이 독극물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연쇄살인범으로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 여자의 살인수법은 이러했습니다. 그녀는 고속도로에서 자동차가 고장 난 것처럼 가장하고서 지나가는 차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면 동정심 많은 중년 남자들이 그를 돕겠다고 차를 세우고 그녀를 도와줍니다. 

그러면 이 여자는 그 남자를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창녀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남자를 유혹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남자를 유혹해서는 외딴 곳으로 데리고가서 그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척 하다가 총을 꺼내 그 남자를 쏘아 죽였습니다. 그냥 총 한 발을 쏴 죽인 것이 아니라, 남자의 몸에 총을 난사해서 몸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남자의 시체를 고속도로 주변에 버렸습니다. 한 명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무려 일곱 명의 남자를 그렇게 죽였습니다. 24살 때부터 34살 때까지 10년 동안 7명을 그렇게 처참하게 살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체포되어 12년 동안 재판을 받은 후 46세의 나이에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여자는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자기를 빨리 죽여 달라고 악을 쓰며 몸부림을 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자기 몸속에는 증오심이 들끓고 있어서 기회만 되면 다시금 살인을 저지를 것이기 때문에 빨리 사형을 집행해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아이린입니다. ‘아이린’이란 이름의 뜻은 평화입니다. 그런데 평화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명찰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내 이름은 아무개입니다’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우리의 가슴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름표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면 우리에게 그 이름표를 붙여주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기대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표를 붙여주셨는데, 우리가 그 이름표에 걸맞게 살지 못한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실망하실 것입니다. 

인도의 선교사였던 맥스웰(Maxwell)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인도는 마을마다 부족마다 언어가 달라서 새로운 마을에 갈 때마다 새롭게 언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한 번은 맥스웰 선교사님이 한 마을에 들어가서 점잖고 학식이 높은 힌두교인에게 그 지방 말을 가르쳐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힌두교인이 정중하게 거절하더랍니다. 몇 번을 간곡하게 부탁을 해도 거절하길래, ‘왜 자꾸만 거절하느냐?’고 ‘공짜로 배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사례비를 드릴 것’이라고 말해도 거절했습니다. 거절한 이유가 이렇습니다. “선교사님과 함께 있으면 제가 기독교인이 되고 말 것이란 느낌이 자꾸만 들어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선교사님은 그 지방 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제가 전도하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힌두교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안 됩니다. 선교사님과 함께 있으면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진 이야기입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전도하지 않아도 내 인격과 삶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의 모습이 드러나고, 그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변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만큼 멋지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바로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런 사람이 교인이라면 나는 교회 안 다녀!’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볼품없는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달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평생 그 이름표를 달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표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네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당당하게 ‘제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 정말 그리스도인 맞느냐?’고 사람들이 되물어오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마십시다. ‘당신 정말 그리스도인답다’고 칭찬 받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럴 때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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