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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살핌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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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핌 (눅 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 불순한 질문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몹시 추웠습니다. 저는 저녁 무렵 교회에서 집에 걸어갈 때면 효창 공원을 한 바퀴 돌곤 합니다. 두서없는 생각을 가지런히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혹독하게 춥던 날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끄럽고 황량한 공원길을 홀로 천천히 걷는데 문득 이 추운 날 노숙자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나는 잠시 후면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분들에게 이 밤이 얼마나 길고 막막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워하는 마음뿐 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다가 서울시에서 서울역 지하보도에 노숙인들을 위해 온돌을 깔아주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신선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들을 배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아픔의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삶을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한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 질문에 담겨있는 불순한 동기를 모를 리 없건만 예수님은 친절하게 응대해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율법학자는 마치 자동응답기인양 주저없이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성경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의 대답은 군더더기조차 없이 명료합니다. 주님은 그에게 아주 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예수를 시험하려던 그의 의도는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곤경에 처한 것은 그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삶으로 번역할 용기가 없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율법학자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율법학자는 여전히 자신의 참상을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실천의 문제를 또다시 이론의 문제로 환원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 속에는 자신의 불순종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의 절망감이 배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들려주신 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론적인 질문에 이론적으로 답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론은 현실을 추상화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현실을 인상 깊게 보여줌으로 청중들을 이야기 속에 끌어들입니다. 사람들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통해 자기의 숨겨진 욕망을 보고 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외면하고 싶은 상황

이야기꾼인 예수님의 솜씨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거두절미하고 딱 한 마디로 상황을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놀라울 만큼 간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구체적인 장소가 언급된 유일한 비유입니다. 그 장소들이 언급된 것은 이야기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관개 시설이 잘 되어 있던 여리고는 ‘천 그루의 종려나무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숲이 울창한 도시였습니다. 헤롯은 그곳에 겨울 궁전을 지었고, 많은 제사장들이 그곳에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아주 척박하고 황량한 광야 지대였습니다. 황량한 산허리에 있는 동굴은 강도들이 몰려들기에 적합했습니다. 

불운한 한 사람이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회적 신분을 보여주는 옷조차 벗겨진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력한 익명의 사람일 따름입니다. 누군가가 발견하고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황량한 광야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마침 그 현장 곁을 제사장 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걷던 길인데 그 끔찍한 폭력의 현장을 보게 되었으니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는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딴 곳을 보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고 말합니다. 얼마 후 한 레위인도 그 현장을 지나갔지만 그도 역시 눈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 가련한 사내의 생은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끊겠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중들의 반응을 살피고 싶기 때문입니다. 청중들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 가련한 사내의 불행한 운명을 동정하는 이도 있고, 강도가 출몰하는 현실을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전 체제를 상징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무정함에 대해 분노했을 것입니다. 이미 강도의 굴혈로 변해버린 성전 체제에 대해 밑바닥 계층 사람들의 반감은 상당히 깊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중들은 이제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 상황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자기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름 없는 영웅’의 출현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반전

하지만 이야기는 그들의 예측과 기대를 비켜갑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한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도 똑같은 현장을 보았지만, 그의 반응은 좀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 피하여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다음 날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청중들의 술렁거림이 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어쩌자고 혼혈 잡종으로 취급받던 사람들, 그래서 부정한 존재로 여겨지던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자기들과는 다른 성경 판본을 가지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접촉한 사람, 물건, 장소는 다 부정해진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호감을 가지고 예수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도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을 그렇게 선하게 그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선하다’는 말과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은 절대로 연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청중들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며 그가 속한 나라, 계급, 인종, 종교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부도덕한 일이고 반인륜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청중들의 일그러진 마음을 폭로하고 계십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웃고 있었지만 그들 또한 자기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 또한 그들을 암암리에 무시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전혀 다른 동기에서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강도만난 사람에게 다가간 것은 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측은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믿음의 고백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만 권의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리를 암송하거나 종교집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내적 변화입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누군가의 불행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 그래서 그의 앞에 멈춰 서고, 그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쓸 때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한 지인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었습니다. 

“아침 7시. 동네 골목을 막 벗어나려는 찰나, 그만 시동이 꺼져버렸다. 마침 지나던 어떤 아저씨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점프를 꺼내, 차의 시동을 살려주셨다. 그리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생겨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전화하신다. 이렇게 추운 날, 이런 호의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밤새 앓아 잠을 거의 못 잤는데, 덕분에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

영하 15도 아래로 떨어졌던 날, 서울의 한 골목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 한 번의 따뜻한 마주침이 밤새 끙끙 앓던 한 사람의 마음에 힘과 빛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알았을까요? 그 순간 자기가 천사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네가 바로 이웃이다

당황스러워하는 청중들의 반응과 관계없이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주님은 여기서 ‘이웃이 누구냐?’는 본래의 질문을 ‘누가 이웃이 되어 준 것이냐?’는 질문으로 돌려놓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는 마지못해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나를 향한 그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까지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만입니다. 물론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묵상하면서 저는 제가 바로 제사장이요 레위인임을 절감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강도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 이들이 많은 데, 저는 바쁘다는 핑계로,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나는 나대로의 역할이 있다는 핑계로 그들을 보면서도 피하여 지나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 곁에 다가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많아서, 여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적 뜨거움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첫 걸음을 옮겨야 할 때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물 위를 걸은 베드로 이야기를 하면서 “만약 그가 물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믿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60쪽)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이웃이 되어 주는 일에는 경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작년 말 교통사고를 당해 큰 어려움을 겪었던 김대규 교우를 기억하시는지요? 이제는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얼마 전 그의 병실에 갔다가 참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고가 나기 얼마 전 그는 캄보디아 오지 주민들에게 햇볕 조리기(solar cooker)를 보급하기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역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또 기술까지 이전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있는 한 젊은이는 거의 폐인처럼 보였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기관에서 자란 그는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 정상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무리 놀라운 것을 보아도 5초 이상 집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딱하게 여긴 대규씨가 그를 불러 여러 차례 설득했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결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혼을 해서 처자식을 부양하려면 직업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내게 와서 일을 배우지 않겠는가?” 그를 작업장에 불러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고 합니다. 

자를 주고 105밀리미터에 점을 찍으라고 해도 그것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규씨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가르쳤고 마침내 그는 단순하기는 하지만 시키는 일을 곧잘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기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약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야기 끝에 대규씨가 말하더군요. “제가 하는 일은 지역 주민을 돕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더라구요.” 

지금 이 세상은 이처럼 사람들의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냉랭한 세상에 봄 소식을 가져오는 영적 사마리아인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어떠하든 이제부터는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겨울의 한 복판에 들어선 봄처럼 이 냉랭한 세상에 훈기를 불어넣으며 사십시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이런저런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 곁에 다가서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할 때 우리 믿음은 커질 것이고, 우리 내면에는 더 깊은 자유와 기쁨이 깃들 것입니다. 강도 만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라는 주님의 거룩한 소명에 응답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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