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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만나는 길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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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나는 길 (눅 15:11-24)

<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 

일전에 새벽기도 마치고 주일말씀을 준비하는데 말씀이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기도하는데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들었다가 꿈까지 꿨습니다. 그때 꿈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우리 선교사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는데 마치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 사명을 이룰 복된 영혼들을 세어보라!” 그래서 세어보자 모두 28명이었습니다. 

그 뒤 일주일 내내 그 꿈에 나온 숫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선교사역을 음지에서 후원할 거룩한 큰손들의 숫자인가? 우리교회를 앞서 이끌고 갈 거룩한 리더들의 숫자인가? 도대체 무슨 숫자일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거룩한 큰손이 되기를 위해 계속 기도하자 그런 간절한 소원이 꿈에 나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냥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 아니라 예수 믿고 인물이 되어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거룩한 큰손이 되는 것입니다. 

저도 금년에 50이 되면서 인생이 짧음을 새삼 느낍니다. 그처럼 짧은 일생을 살면서 속아 사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세상의 부귀영화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평안과 건강을 잃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27명 왕의 평균 수명이 34세였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5시간만 되면 배는 다시 채워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밥그릇을 따라 살지 마십시오. 

현 시대는 밥그릇 채굴 경쟁시대입니다. 희생이 없는 천민자본주의와 천민 민주주의가 만연해서 누가 밥그릇을 건드리면 무섭게 반발합니다. 그러나 밥그릇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영혼이 사는 문제입니다. 영생의 준비도 없이 밥그릇만 추구하며 속는 인생을 살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선택한 자녀에게 어려움을 허락합니다. 그 어려움에는 “내게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1978년 저희 집이 서울 청와대 옆 옥인동에 있을 때 정부에서 길을 낸다고 집을 강제로 수용했습니다. 그때 2가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첫째, 길을 내는 목적이 재벌집 앞으로 큰 길을 뚫기 위해서라는 소문 때문에 억울했습니다. 둘째, 당시 그곳 땅값이 평당 120만원이었는데 정부에서 그 값의 5분의 1인 평당 24만원만 보상해서 억울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담담하게 그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보상비로 갈 곳이 없어서 당시 서울 끝의 강동구 명일동으로 이사 갔습니다. 지금은 그곳이 아파트 숲이지만 당시에는 집 바로 옆이 논이었습니다. 그 논을 보면서 서울 끝으로 쫓겨난 느낌 때문에 억울했지만 그것이 사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사 간 후 어머님이 바로 앞집에 사는 분의 전도를 받고 52세에 처음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 뒤 가족들이 한사람씩 다 구원받았습니다. 결국 그때의 어려움은 전 가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그때부터 복된 역사가 시작됩니다. 

< 하나님을 만나는 길 > 

어떻게 하나님을 만납니까? 본문에 나오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길에 필요한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낮아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11절).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 중에서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날릴 줄 알았지만 그래도 재산을 나눠줬습니다(12절). 분명히 아들이 낭비할 것 같지만 어떤 때는 제재하지 않고 요구대로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한번 실수할 기회도 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낭비성이 있습니다. 낭비벽이 있으면 안 되지만 헌신과 사랑의 낭비는 필요합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은 여인은 분명 낭비했지만 마지막 길을 가시는 주님에게는 꼭 필요한 낭비였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약간 순진한 사람이 진짜 사랑을 합니다. 계산하기 시작하면 참된 사랑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손해가 예상되어도 기회를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허용하십니까? 그때 자기를 발견하고 믿음의 진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편할 때는 신자와 불신자가 잘 구분되지 않지만 힘들 때는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뚜렷해집니다. 신자란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어려움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면 그때부터 어려움은 축복의 디딤돌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도 허용하시고 실패할 기회도 주십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둘째 아들은 며칠이 못되어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받은 재산을 허비했습니다(13절). 결국 어떻게 됩니까? 본문 14-15절 말씀을 보면 그는 건강과 재산과 기쁨을 다 잃고 남의 종이 되어 들에서 돼지를 치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길이 막힙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나름대로 복을 주셨지만 그 복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자기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복이 사라집니다. 어쩌다 돈을 벌어도 낭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쌓아놓은 돈이 아닌 좋은 일에 쓴 돈으로 부를 측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떠나면 인생이 비참해집니다. 넉넉한 아들이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돼지 치는 환경보다 아버지가 없는 사실이 더 비참한 것입니다. 절망적인 사람들이 환경 때문에 절망합니까? 아닙니다. 인생 자체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모든 것을 잃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선택된 자녀가 하나님을 떠나면 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얻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길이 막힙니다. 그러나 그처럼 길이 막히고 낮아지는 상황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났을 때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2. 돌이킴 

어떻게 둘째 아들이 다시 행복을 찾습니까?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그는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회심이란 하나님의 풍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떠난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녀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녀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회심했는가가 중요합니다. 회심이 없이 어떻게 삶이 달라지고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합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는 자신의 부족함과 비참함을 자각하고 마음을 돌이키는 용기입니다. 인생은 별 차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살 수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키면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대개 문제와 실패가 있는 자리입니다. 

지금 혹시 어떤 문제로 답답합니까? 그러면 지금이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는 죽고 싶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힘든 현실은 우연이 아니고 그 현실 속에는 하나님의 부름과 초대가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돌아서면 그 어려운 자리는 불행이 죽고 행복이 탄생하는 자리가 되고, 그때 하나님을 만나면서 잿빛 현실은 무지개처럼 찬란한 은총의 세계로 변합니다. 


3. 낮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둘째 아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자신을 극도로 낮췄습니다. 사람은 힘든 상황이 될 때 비로소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눈을 뜹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잘 나갈 때 만나는 체험과 절망적일 때 만나는 체험입니다. 신기한 일은 잘 나갈 때 하나님을 만난 체험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절망적일 때 하나님을 만난 체험은 오래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절망을 허락하십니다. 

어느 날, 한 50대 여인이 아파트 길에 나와 벌벌 떨며 서 있었습니다. 근처의 목사님이 지나가다가 너무 안쓰러워서 왜 그렇게 서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학원에 간 딸이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왜 밖에서 기다리느냐고 묻자 옛날의 어머니가 생각나서 나와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자기가 늦게 돌아오면 늘 문밖에 서서 초조히 기다리시다가 자신이 돌아오면 자기 손잡고 좋아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난 것입니다. 

사람이 철든다는 것이 그처럼 어렵습니다. 자신이 부모가 되어야 비로소 부모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가끔 그런 깨달음을 얻습니다. 청년 때 저는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촉망 받는 청년으로 목사님의 총애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목사님께 죄송했던 생각이 많이 납니다. 봉사하면서 좀더 사려 깊게 봉사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목사님을 너무 돕고 싶어서 스스로 자비로 교회 전단지 수만 장을 만들어 열심히 동네에 뿌리며 전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그 전단지를 보고 제가 그렇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그 일을 좋게 봐주실 줄 알았습니다. 물질헌신, 시간헌신, 순수한 마음, 조용한 전도 등 나쁜 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불편해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목회하면서 비로소 이해되었습니다. 자비로 전도지를 만들어 조용히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가상합니까? 그러나 교회 전도지는 교회의 얼굴이기에 그 문구나 내용에 대해 최소한 목사님과는 상의했어야 했습니다. 뜻은 좋았지만 사려는 깊지 못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언제 생깁니까? 그런 비슷한 일을 당할 때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생각과 시야의 폭을 넓히고 자신의 참 모습을 보도록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그때 둘째 아들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그는 자신이 아들이 아닌 품꾼으로 여겨져도 좋다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낮아짐’과 ‘낮춤’은 다릅니다. 낮아진 환경에서 자기를 스스로 낮추어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용기 있게 선언해야 부족한 허물이 다 덮이고 어디에 가든지 사랑 받고 쓰임 받습니다. 

진정 축복을 원하면 “나를 축복하소서!”라는 권리주장의 선언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권리포기의 선언을 우선하십시오. 그처럼 권리포기의 선언을 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 시스템이 신속히 가동됩니다.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은 손에서 장풍이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품꾼으로 보세요.”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처럼 마음 하나만 낮춰도 길이 활짝 열립니다. 교회에서 최고로 은혜 받는 비결도 “나를 품꾼으로 봐주세요.”라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고백으로 살면 감사도 넘치고 은혜와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4. 돌아감 

둘째 아들이 자기를 낮출 결심을 한 후 어떻게 합니까? 본문 20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그는 생각으로만 회심하지 않고 행동으로 회개했습니다. ‘돌아섬’과 ‘돌아감’은 다릅니다. ‘결심’은 ‘결단’으로 진전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눈물 흘리고 감정풀이만 하고 끝나거나 생각으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회심한 후 새롭게 출발하는 발걸음까지 있어야 진정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생각을 천사처럼 하고 입과 생각과 마음으로 잘 뉘우치는 것도 좋지만 결심(決心)만 하고 결단(決斷)이 없으면 안 됩니다. 어떤 친구는 전도하면 “생각해볼게.”라고 10년 동안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생각이 있으면 발걸음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초청을 계속 거부하면 언젠가는 저승사자의 초대장이 날아옵니다. 그 초대장을 받고 비로소 결단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작심이 없으면 작살나고 결단이 없으면 결딴납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란 책이 있습니다. 어느 날, 두 마리의 생쥐와 두 명의 꼬마가 행복의 치즈를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결국 고생 끝에 치즈 창고를 발견하고 거기서 행복하게 치즈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치즈가 다 떨어졌습니다. 그때 두 마리의 생쥐는 미련 없이 치즈 창고를 떠났고, 한 꼬마는 며칠 동안 실의에 빠졌다가 새롭게 치즈를 찾기로 결심하고 떠나서 마침내 더 큰 치즈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반면에 나머지 한 꼬마는 빈 창고에 앉아서 넋두리를 했습니다. “누가 내 치즈를 훔쳐갔을까?”  

변하지 않으면 고민과 넋두리만 커집니다. 그러나 변화를 모색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나가면 길은 열립니다. 이제 변화를 즐기고 변화에 도전하십시오. 인생길이 쉽지 않지만 믿음으로 개척하면 길은 반드시 열립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과감히 하나님의 품으로 나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붙잡아야 절망은 희망으로 변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는 청소년 때 비극적으로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 상처를 잊으려고 한때 마약에 손을 댔습니다. 그 후 마약을 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그러나 노력과 의지로도 안 되고, 맞아도 안 되고, 가족들과 박태준 전 포철 회장이 애써도 안 되고, 결국 3번이나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를 다니면서부터 순수하고, 예의 바르고, 진실하게 변화되었고, 지금은 한 기업체 회장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품안에 있어야 영혼이 아름다워집니다. 아름다움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떠나면 추해집니다. 선인과 악인은 가장 큰 차이는 무엇보다 자리 차이입니다. 아우슈비츠의 독일군들이 다 악마였겠습니까? 그들은 대개 평범한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 자리가 그들을 악마로 만들었습니다. 

살다 보면 실망스런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상당수는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무조건 탓하지 말고 “그가 제 자리를 잃었구나!” 하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제 자리를 찾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품안에 있어야 가장 사람답고 가장 행복하게 됩니다. 아무리 빛이 안 나는 자리도 하나님이 주신 자리라면 그 자리가 행복의 자리입니다. 

어느 날, 중국의 열자(列子)가 진리 안에 초연히 사는 스승 호자(壺子)를 만납니다. 그 후 열자는 자기 삶의 천박함을 한탄하다 새로운 삶을 배우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스승을 찾은 것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 3년 동안 집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글공부한다고 아내 고생시킨 것이 아니라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쳤습니다. 그렇게 소박한 자리를 중시하면서 그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려고 꼭 기도원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사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짜 진리는 가정을 중시합니다. 또한 진리를 일상에서 소박하게 실천하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소박한 자리에서는 진리를 찾지 못합니다. 삶이 편안할 때 하나님을 애절하게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개는 사방의 길이 막히고 막다른 곳에 몰려야 비로소 울먹이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가끔 인생길이 막힐 때 자기를 성찰하기보다 덜컥 이런 질문부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그런데 왜 이런 고통이 있어야 합니까?” 그러나 고통이 있는 것이 알고 보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고통이 있어도 교만이 있는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그 교만이 어디까지 갔겠습니까? 결국 고통은 자신을 사람답게 만드는 도구요 하나님께 나가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기근과 흉년도 감사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을 만나면 그 이후의 인생은 누구보다 복된 인생이 됩니다. 

<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가자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한 걸음 걸어오자 아버지가 열 걸음 달려가는 것이 느껴집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힘들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가는 먼 거리를 내가 ‘행위’로 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은혜’로 달려오십니다. 원래 아들의 허물은 허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찾는 것 자체가 아버지의 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7시쯤 집에 들어가면 첫 딸이 7시 20분쯤에 눈을 비비며 내 방으로 옵니다. 다시 5분쯤 후에 둘째 딸이 눈을 비비며 내 방으로 옵니다. 그때 어떤 필요와 용건이 있어서 아빠를 찾기보다 그저 눈을 뜨고 무의식적으로 아빠를 찾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지 모릅니다.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문제가 있을 때만 찾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품이 좋아서 찾으십시오. 부족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은 언제나 받아주시고,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기쁘게 맞아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넘쳐 있습니다. 어려움조차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그처럼 아버지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깨닫는 것입니다. 

어느 날, 미국에 사는 수잔 앤더슨이란 여인이 눈 수술을 받다가 그만 실명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아내를 직장까지 출근시켜 주고, 퇴근할 때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내일부터 당신이 혼자 출근해요.” 그녀는 섭섭했지만 남편을 이해하고 이를 악물고 직장에 혼자 출근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넘어지면서 너무 서러워서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조금씩 출퇴근이 익숙해졌습니다. 

하루는 그녀가 버스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무심코 말했습니다. “부인! 부인은 좋겠어요. 참 좋은 남편을 두셨네요. 매일 한결같이 부인을 뒤에서 살펴주네요.” 알고 보니까 남편은 아내가 버스를 타면 같이 타고 조용히 뒷자리에 앉았다가 아내가 회사에 들어가는 모습을 본 후에 자기 직장으로 출근한 것입니다. 

살면서 때로는 넘어지고 서러운 눈물도 나지만 그때도 하나님은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남편처럼 하나님은 안 보여도 여전히 우리의 등 뒤에 계십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있습니다. 문제는 그 넘쳐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만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은 금방 우리 앞에 오셔서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지만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외면 속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에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선한 계획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꿈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제 하나님 안에 있는 절대행복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꼭 붙잡고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꿈을 향해 멋지게 전진하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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