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원한 믿음의 흔적 (마 3:13-17)

첨부 1


영원한 믿음의 흔적 (마 3:13-17)


캐나다의 오지에 있는 어느 숲에서 모피 사냥꾼이 겨울에 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서 통나무를 자르기 시작합니다. 한 시간 쯤 지나서 그는 일손을 놓고 혼잣말을 합니다. ‘땔나무가 이만큼 있으면 겨울을 거뜬히 날 수 있으려나?’ 그 때 마침 인디안 이로쿼이족의 늙은 주술사가 그의 곁을 지나갑니다. 사냥꾼은 그를 불러 세웁니다. ‘이보쇼. 당신은 앞날을 내다볼 줄 안다니 잘 알겠구려. 올 겨울이 어떻겠소? 매우 추울 것 같소?’ 인디언 주술사는 사냥꾼을 빤히 바라다보면서 잠시 생각을 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요. 백인 친구 올 겨울은 매우 추울 거요.’ 사냥꾼은 통나무를 더 잘라야하겠다 싶어서 다시 작업에 들어갑니다. 한 시간 쯤 지나서, 그는‘ 땔나무가 이 정도 있으면 되려나?’ 다시 궁금해졌습니다. 
   
때마침 인디언 주술사가 다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냥꾼이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오래 전부터 여기에 살았으니 잘 알겠구려... 정말 올 겨울이 매우 춥겠소?’ 인디언은 다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합니다. ‘그래요. 올 겨울은 정말이지 매우 춥겠소.’  사냥꾼은 다시 불안해져서 통나무를 한 무더기 더 잘라 냅니다. 인디언은 다시 한 시간 뒤에 그곳을 지나가다가 똑같은 질문을 받고서는 예언합니다. 

‘올겨울은 지독하게 춥겠소.’ 사냥꾼은 ‘이거 정말 큰일 났군... 매우 추울 거라니...’ 생각을 하고는 다시 통나무를 자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날씨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거요?’ 그러자 그 늙은 인디언 주술사가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소. 백인이 땔 나무를 많이 쟁여 놓으면 다가오는 겨울은 매우 춥다는 뜻이다...’ 
   
마치 개그콘서트 같은 코미디 프로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감정은 불안감 이었습니다. 모피 사냥꾼은 나름대로 열심히 땔감을 준비하지만... 이것으로 모자라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연신 조바심을 내면서 한 시간마다 늙은 인디언에게 묻고 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나무를 해보아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그런가하면 늙은 주술사가 하는 말도 어떤 초자연적인 확신이나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이렇게 불안해하고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그것을 의지하여서 미래를 점친다고 하고 있으니... 그도 역시 자기 하는 말이 못미덥기는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들 가운데에 흐르는 정서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불안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그럭저럭 지난해까지는 잘 버텨서 여기까지 왔지만... 새해라는 시간은 도대체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놓였는지... 그것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시간이 두렵기도 하고...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뒤를 이어서 다음 세대를 살아갈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을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새해라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그런 말에 깊이 동감하였습니다. 공연히 나이만 더 먹는 것 같고... 새해라는 기분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뭐 근사한 것을 꿈꾸고 희망하고... 그런 것을 이루기 위해서 마음을 다지고... 결심하고... 뭐 이런 것들이 있어야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이런 새해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불안감은 우리들처럼 힘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미래가 불안하기만한 사람들에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신년 하례식에서 ‘실패가 특권이다.’라는 말을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도 그가 가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라도 무엇인가 혁명적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무너지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불투명하기만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그 마음 가운데에 있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가 믿음이 서야할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에서 오는 불안감이든, 아니면 원래부터 피조물 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근원적인 불안함이든... 우리가 이런 우리의 약하고 어두운 면을 극복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꿈꾸시는 그러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게 되는 힘... 바로 그것은 믿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이야기하다보면...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스스로를 믿음이 없다거나... 약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믿음... 그러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우리들에게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떤 확고한 믿음의 증거들을 내세울 만한 것들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중의 대부분... 아마도 여기에 함께한 대부분의 분들이 해당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에게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지울 수 없는 영원한 믿음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예수님께서 명령하셨던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28:19)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완전히 기억나지 않는 옛 이야기처럼 다가오기도 할 것입니다. 아... 내가 세례를 받기는 하였지... 그 사실까지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도대체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오늘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그것을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잘 생각이 나지를 않습니다. 어렸을 적에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하시니까...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지요. 세례 받은 날이 ‘제 2의 생일날이다. 생일을 기억하는 것처럼 오늘도 소중한 날로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언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가물가물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고... 그 믿음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의 내면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어떤 분들은 군대에서 얼떨결에... 쵸코파이 준다고 하니까... 그것 먹을 욕심에 세례를 받았으니... 좀 다시 받고 싶습니다. 세례식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냥 흉내라도 내며 다시 찍읍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얼떨결에 받았든...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든... 그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믿음의 흔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성 어거스틴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의 황제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책을 다 바쳐야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하여 성도들의 반응이 여러 가지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책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겁을 먹고 성경책을 바쳤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궁리 끝에 로마의 군인들이 무식하니까 성경책은 놓아두고 다른 책을 성경책처럼 바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박해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 일로 인해서 교회는 소용돌이에 직면하게 됩니다.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당연히 끝까지 책을 바치지 않은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어떤 책이 되었든... 바친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특별히 바친자들에 속하게 된 사제들을 공격하면서 그들이 베푼 세례나 성례들은 무효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이럴 때에 나서서 분열의 위기를 극복한 사람이 바로 성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세례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하였습니다. 비록 책을 바쳐서 큰 오류와 흠을 가진 사제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베푼 세례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에서 중요한 것은 세례를 집행하는 사제의 신앙이나 인격에이 아니라, 세례 받을 때에 임재하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집행하는 사제가 좀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제답지 못한 행동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받은 세례가 유효한 것은 세례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기에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받은 세례야말로 영원한 믿음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세례 받음을 통하여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도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믿음의 흔적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누구든지... 사나 죽으나 세례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롬14:9), 세상의 어느 것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 때...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삶 가운데서 생겨나기 시작한 변화는 어떤 것입니다. 오늘은 마침 우리 주님이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받으신 세례와 우리의 세례가 꼭 같을 수는 없지만, 주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받은 세례가 가지는 뜻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례는 먼저 자기를 죽이고 복종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단강을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던 세례 요한에게 자신에게도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하십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낮아짐을 향한 여정이라...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갈릴리에서 요단강까지의 여정은 높은 곳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여정입니다. 가장 밑바닥에 요단강이 있습니다. 더 이상은 내려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 요단강에 자기 몸을 담그십니다. 
   
사회적인 지위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세례를 받으려 하였을 때, 세례 요한은 당황하였습니다.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v.14) 이게 맞는 것인데... 요한은 예수에 비하면 정말 낮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예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시작이라고 하면서 말씀이지요.(v.15) 
   
세례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를 낮추는 것... 나를 하나님의 뜻과 소원에 복종하게 하는 것... 심지어 사도 바울은 세례란 곧 자기가 죽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하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롬6:3)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세례는 이렇게 내가 낮아지는 것... 하나님께 나를 복종시키는 것... 더 나아가서 하나님 없이 살던 나를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버리는 것... 그래서... 과거의 나는 이제 죽었습니다... 고백하면서... 주님께 자신을 내려놓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특별히 세례의 물이 우리의 머리에 부어질 때에... 우리들의 내면 가운데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주님... 이제 저는 죽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주님께 다시 내려놓습니다.’ 이런 고백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다시 강가로 나오셨을 때... 두 가지 신비한 일이 생겼습니다. 하늘이 열리고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예수님께 임하셨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는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께 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다시 살리시는 영입니다. 세례의 출발이 나를 복종시키고...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세례를 받은 후의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게 된 나입니다.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하고 놀라운 생명으로 충만한... 그런 나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영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후에 초대교회 공동체에 임하셨던 성령...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 같은 불로 임하셨던 성령의 강림과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그렇게 요란스럽지는 않은 것이지만... 조용하게 우리 가운데에 임하셔서... 우리들에게 생명의 바람을 불어 넣어 주시는 영... 그리고 이제껏 우리가 살아보지 못하였던 전혀 다른 삶으로 조용히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힘... 바로 그것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임하신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영이 불어 넣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는 진정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v.17) 하나님께서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고... 예수는 나에게 기쁨을 주는 아들이라고 하나님은 모든 세상의 사람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일어난 일인 것을 마음속에 다시금 새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이것처럼 더 깊고 진한 관계는 없는 것이지요.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마치 운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관계를 무효로 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아들이 변변치 못하고... 비뚤어진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좀 아버지의 체면에 손상을 입혔다고 하여도... 그것이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갈라놓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모든 사랑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들에게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함도 물리치게 하여 줍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고 하는 것...’ 지금 내가 세상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인 것을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이 이 시간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들려 지기시를 바랍니다. 

이렇듯 우리들에게는 어떤 것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믿음의 흔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비하고 놀라운 믿음의 흔적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