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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재의 가치가 보이는가! (눅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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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가치가 보이는가! (눅 13:10-17)


저널리스트인 [게일 쉴리]라고 하는 사람이 40세 이상의 성공한 사람들 중에 물질적인 성공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성공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봤더니 흥미로운 공통점이 대략 일곱 가지정도가 나왔습니다. 

첫째는 확실한 방향을 가지고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일생을 옳게 정한 하나의 방향으로 외길처럼 살았더랍니다. 휘청거리지도 않고 목적과 방향이 분명한 생을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잘 살았다는 자신감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대해서 잘못 살았다는 자책감 없이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자기 만족감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이에 상관없이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은퇴했다고 노는 게 아니고 오늘도 내가 할 일은 있다고 찾아서 하는 그런 체질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의 공통점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두려움이 없는가 하니 미리 다 정리했습니다. 항상 남은 생을 정리 해가면서 살았습니다. 마지막에 부랴부랴 정리하는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미리 정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다섯 번째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남이 잘했다고 하는지, 못했다고 하는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자신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체면 때문에 이리하고 저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신앙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공통점은 주위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든, 누구든지 간에 내 스스로가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상대방이 미워해도 내가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통해서 내가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그것이 얼마나 행복이겠습니까! 마지막 일곱 번째가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신앙을 삶의 중심에 간직하고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삶의 가치를 좀 더 높은 차원의 곳에, 좀 더 미래지향적인 곳에 두는데 그 방법을 점점 더 신앙에 충실하면서 신앙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게 뭔가 달라도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인생 하반기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육신이 건강하고 온전한 정신만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가치를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남이 뭐라고 하든지 자신만의 가치를 자기가 알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또한 알아야만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실은 하루도 우리는 우리자신을 보지 못하는 날이 없습니다.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마도 거저 일상적인 생각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얼굴이 부스스하지는 않은지, 화장은 곱게 먹었는지, 예쁘게 보이는지, 잘나 보이는지...’만약에 매일을 이런 것들만 보고 산다면 존재의 가치를 찾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나라는 자신에 대한 내면적인 것들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합니다. 나의 성격은 어떠한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을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인품을 가졌는지를 볼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자신이 보는 내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람의 가치 평가에는 남이 보는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각에 의해 내가 평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조건이라든가 혹은 내적인 품성까지도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그 가치가 평가 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평가가 때로는 내가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깨닫게 해주는 유익이 있기도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평가란 것도 절대적이지는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평가에 매여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불행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의 가치를 남의 평가에만 의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만 인정받기 위해 내 삶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어차피 평가 받아야하고 정말 정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택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도 아니요, 다른 사람에 의한 평가도 아닌 정말 내 존재가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이미 맘속으로 답하고 계시겠지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평가에 의해서 우리의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결국 오늘 우리는 이 사실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떡하니 나타나셔서 “너는 그 정도로 살면 되겠다!” 혹은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돼!” 라고 말씀해 주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이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 존재가치를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실천해 나가는 신앙의 모습들이 비로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필요하고, 설교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은 이 예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우리들의 평가기준으로 볼 때 가장 비참한 한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몸이 꼬부라진 척추장애자입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꼬부라진 채로 무려 열 어덟해 동안 살아왔습니다. 누구도 이 여자에게서 나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고, 소망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가족들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설상가상으로 귀신이 들려서 정신적으로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의식의 부자유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말은 하되 의미가 없는 말이요, 들을 수는 있지만 뜻이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해봐도 사랑을 모릅니다. 준다고 고맙다고 할 줄을 모릅니다. 어찌 생각하면 살아 있는 인생이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할 정도입니다. 몸도 병들었고, 정신도 병들고 나니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인격도 병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보편적 가치로는 아무쓸모가 없는 버려지고 완전히 소외당한 불쌍한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가치론의 대표자인 [R. B. 페리(Ralph Barton Perry)] 라고 하는 사람이 <인간 가치론> 을 이야기 했습니다.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물질적 가치입니다. 물질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가졌느냐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돈이 많으면 대접받고 돈이 없으면 천대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소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가지기만 한 구두쇠는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돈을 가치 있게 쓰느냐 하는 것까지가 사람의 가치입니다. 또 하나는 신체적 가치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누구든지 건강하고 잘 먹고 튼튼하고 그리고 늠름하게 보일 때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정신적 가치 혹은 심리적 가치라고도 합니다. 얼마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줄 수 있느냐, 또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가치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미의 추구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생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는 그것이 그 사람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자, 이런 가치론에 준해서 본문에 나오는 이 여자를 생각해봅니다.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어쩌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민폐입니다. 누가 이 사람을 필요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삶을 살아가던 여자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예수님 앞에서 이 여자는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인간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람됨을 보시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외모가 아닙니다. 소유로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지식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의 건강과 젊음도 아닙니다. 오로지 그 사람의 내면적 존재를 보십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불쌍하고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왜 고치느냐는 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필 이 여자라는 것이 더 멸시의 대상이었고, 문제의 중심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찮은 인간, 누구도 상대하지 않는 천박한 여인이었기에 과연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고쳐야 할 가치가 있느냐고 더욱 목소리를 높여서 따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나 시각과는 달랐습니다. 

안식일 법이라고 하는 외적인 형식과는 비교 되지 않는 존재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존재의 가치입니다. 지엽적인 것들 때문에 본질적인 가치를 보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또한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고 살아갑니까? 한편으로 내가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믿음의 형식들, 할 바를 다 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옹위하며 살아가고 있는 내 신앙의 모습들을 주님께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면을 들여다보신다면 차라리 이 여인만 못해서 얼마나 부끄러운 우리들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시 자신감이 없어서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내 안에 얼마의 존재가치가 내재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볼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 안에 있는 존재의 가치를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는 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건강한 신앙의 모습들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어떤 존재의 가치가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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