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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대 신앙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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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신앙 (마 15:21-28)


I. 1미터의 법칙

19세기 중엽, 미국 서부에서 골드러시가 있었습니다. 이무렵 중부에 살던 한 청년이 자본금을 가지고 서부로 와서 광산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동안 아무리 땅을 팠지만 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그 금광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금광을 산 새 주인이 불과 1미터를 더 파내려가자 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청년은 몹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좌절하는 대신 뼈아픈 경험을 통해 인생의 값진 교육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보험 회사에 취직한 그는 항상 ‘1미터만 더 파자’하는 마음으로 고객들에게 설명하고 또 설명했습니다. 결국 그는 금광을 발견한 것 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미터의 법칙’입니다.

포기가 불신앙이라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는 것은 절대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집안에 있는 한 어린 딸아이가 귀신들려서 몹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끈질기게 기도함으로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큰 응답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는 「절대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이 여인의 신앙을 배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유대영역을 떠나신 적이 꼭 한 번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신 사건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가나안 영역에 속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본문의 주인공은 가나안 족속의 피가 흐르는 이방여인입니다. 
요세프스의 글에 의하면 두로지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가장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더구나 시돈은 아합왕 때 바알 신을 끌고 와 나라의 신으로 섬기게 한 악녀 이세벨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대 역사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땅을 지나게 될 때 이 지방 여인 하나가 예수님을 좇아 왔습니다. 이 여인의 딸이 귀신에 붙잡혀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꽃같이 자라고 티없이 놀아야 될 어린 딸이 더럽고 추한 병에 시달릴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질듯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때문에 아이의 어머니는 백방으로 딸이 나을 수 있는 길을 힘써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분 만나면 귀신이 두려워 떨며 도망가고,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고, 
보지 못하던 자들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 만날 기회를 몹시도 기다리던 가운데 마을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의 행렬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II. 신앙의 방해꾼 : 사람

그렇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발길이 머무는 그곳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그곳엔 언제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 말씀이 선포된다. 성령이 임재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절정에 달하여 우리가운데 오신다.” 
 이것은 여러분 생애에 결정적인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1.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있어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이 맞는 첫 번째 신앙방해였습니다.

오늘 본문 이 여인이 만나는 장벽은 때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부딪치는 장벽일 수 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장벽 앞에서 좌절하지 아니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에게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 딸아이가 미쳤다는 것이 자랑이 아닐진대 어찌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앞에 내 형편 있는 그대로 내어놓으면 주님이 나를 만나 주신다. 
내 무거운 짐, 아픈 모든 것들을 들고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 이것이 기도의 시작이요, 주님을 만나는 출발점입니다.

이 여인에겐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 소리 질렀습니다. 이토록 훌륭한 결단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마땅히 두 손 들어 그 여인을 영접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는 너무나 잔인했고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귀는 언제나 불쌍한 간구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져 있던 귀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의 입술은 언제나 부르짖는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위하여 준비된 입술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유독 이 불쌍한 여인에게만은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묻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 부딪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을까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낙심하여 돌아섰을 것입니다. 원망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이분이 그렇게 소문에 듣던 자비로운 그분이란 말인가?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더란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면 이럴 수가 있는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돌아설 만하지 않습니까? 
이 불쌍한 여인의 부르짖음에 예수님은 침묵만 하고 계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침묵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신학자 카르는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이 가진 작은 믿음의 씨가 자라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D.L 무디가 섬기던 교회는 교회건축을 위해 오랜시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은 열리지 않았고 설상가상 1871년 어느 날 시카고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하루 동안 계속된 화재로 시카고의 온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이 화재로 무디가 시무하는 교회도 완전히 불타버렸습니다. 신문기자들에게는 이것이 좋은 뉴스꺼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기자가 빈정거리며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무디선생,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주신다고 설교하셨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성전인 교회가 불에 타 없어지는 것을 보시고도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이 말을 듣고 무디는 말했습니다. "나는 벌써부터 하나님께 큰 교회를 달라고 기도해 왔었소. 그랬더니만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응답이 오지 않았겠소. 큰 교회를 짓기 위해서는 이 교회를 헐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화재로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기 때문에 교회를 허는 비용을 덜어주신 것이지요. 앞으로 얼마나 큰 교회당을 주실지 저는 기대가 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절대신앙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에 부딪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의 작은 믿음의 씨앗들이 자라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선 여러분의 태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끝없는 허공만 돌아오는 암담한 상황에 부딪힐 지라도 도무지 물러설 줄 모르는 “불퇴의 신앙” 이 신앙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신앙이 바로 절대신앙입니다. 

III. 기도가 거절될 때 

2. 예수님의 냉담은 침묵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두번째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또 다시 한 번 타오르는 불길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24절입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 나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아마 이 정도에서 대개의 사람은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첫 번째 장벽에서 부르짖기만 하던 이 여인은 두 번째 장벽이 가로막자 오히려 한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25절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더 다가와 주님 앞에 애원했습니다. 
절대신앙은 장벽 앞에 주저앉거나 꺾여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냉대도 예수님의 침묵도 이 여인의 열심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의 거절과 냉대도 이 여인을 물러서게 하지 못했습니다. 
기도에는 이러한 열심이 필요합니다. 물러서지 않는 태도가 절대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의 태도는 얻을 때까지 매달리는 것입니다. 찾는 이의 태도는 찾을 때까지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진정으로 응답받기 원하면 문이 열릴 때까지 몸부림을 해서라도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주님앞에 나와 엎드려 절하며 “나를 도우소서” 애원했습니다. 

IV. 내 믿음이 모욕을 당할 때

3.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여인에게만은 응답의 문이 점점 더 굳게만 닫혀져    가는 듯 보였습니다. 세번째 장벽을 보시겠습니까? 

26절 예수님의 거절의 강도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하기까지는 몇 가지 배경들이 있었습니다. 

① 이방인들은 제사를 지낼 때에 그들의 신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고 나면 신전에 있는 여사제들과 음란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음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라는 얘기는 음란한 족속이라는 뜻입니다. 

② “개”는 더러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먹은 것을 토하고 토한 것을 다시 먹는, 죄를 짓고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다시, 동일한 죄를 짓는 - 부끄러움을 모르는 백성들, 끊임없이 죄를 반복하는 백성들이란 뜻입니다.

③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보면 걸핏하면 시비를 겁니다. 싸움을 걸어옵니다. 이유 없이 어르렁 거리며 시비를 거는 족속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향하여 개 같은 이방인 이라고 모욕을 한 것입니다. 마지막 거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큰 절망과 낙심 가운데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애완용 개가 루터가 밥을 먹는데 포크가 올라가면 따라왔다가 내려오면 내려오고 계속해서 손만 보고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뒷발을 들고 앞발 모두어 서서 루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기 한 점을 썰어서 던져 주었더니 폴짝 뛰어 받아먹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루터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며 주인의 밥상 앞에 앉아 주인의 손길을 바라보는 저 애완용 개처럼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주인이 던져주는 고기 한 점을 받아먹기 위해서 주인만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여! 주님 앞에 한 마리 개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응답을 기다립니다. 도움을 기다립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겸손히 엎드려 루터는 기도합니다.

한 마리 개처럼 취급받으면서도 주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 여인의 절대신앙을 보십시요. 이 여인은 절대절망의 장벽 앞에서 엎드려 소리 질러 기도합니다.  

① 22절 “소리질러”라고 할때 이 말은 ‘까마귀가 쉰 목소리로 끈질기게 울부짖는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반복적으로 소리지르며 따라왔다는 뜻입니다. 

② 25절 “절하며”라는 단어 역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엎드려 절했다’는 뜻으로 헬라어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포기하지 않는 절대신앙의 기도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막다른 골목에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사면초가에 부딪힌 분이 계십니까? 앞으로 전진해 보지만 안개낀 길처럼 앞길이 보이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매달려도 매달려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까? 한 번, 두 번, 열 번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들이 있습니까? 

그럴수록 포기하지 말고 주님앞에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정상일보직전에 당신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한걸음만 더 전진하면 만날 수 있을 것을 한 번만 더 밀면 열릴 수 있는 문이 정상일보전에서 닫혀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한 번만 더 참으시고 하루만 더 인내하시고 하나님앞에 찾아나와 기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래전 경기도 연천에서 무장공비 토벌 작전이 있었습니다. 이 작전에 포병 소위로 참전했다가 척추를 다쳐 1급 척추 장애인이 된 이운봉씨가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가슴 아래 하체가 완전 마비된 이씨는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그를 치료하던 우갑선 간호사가 이 척추 장애인에게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절망 중에 살던 이씨에겐 한줄기 기쁨이요 희망이었지만 이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양가의 반대와 핍박이 심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우씨는 양가에 3년동안 매일 편지를 보내 결혼을 허락받습니다. 

결혼 후 상상도 못하던 임신이 되었습니다. 이때 애기 아버지는 통증을 잊기 위해 모르핀을 상용하고 있었습니다. 애기 엄마는 임신사실을 전혀 모른체 장기간 감기약에 주사까지 매일 맞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당황한 이들은 초음파 검사를 합니다. 
“애기의 손가락이 자라지 않고 있습니다. 
다리도 자라다 말았습니다. 기형아 임이 분명합니다.” 
- 절망, 또 절망이었습니다. 
애기를 포기하라는 주변의 수많은 말들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애기를 낳기로 결단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태어난 애기는 짧은 다리, 짧은 팔, 조그만 살덩어리처럼 붙어 있는 짧은 손가락, 양손 합쳐 4개! 

그러나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고 “이희아”양을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피아노를 가르칩니다. 
4손가락 중 마디가 있는 손가락은 달랑 하나,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는 피아노를 내려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손가락도 자라고 마디에 힘도 생길 거라고 믿었습니다. 

신체 구조상, 덜 발달된 뇌의 구조상 피아니스트가 되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 그러나 이들은 불가능에 도전장을 냅니다. 손가락 끝이 터져 매일같이 피가 납니다. 음악 콩쿠르에 참가신청조차 잘 받아 주질 않았습니다. 또 다음 곡에 도전 할 때마다 불가능 또 불가능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이희아 양은 당당히 평택 국립재활복지대학 멀티미디어 음악과에 입학하고 헬렌켈러처럼 자신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섬기는 꿈을 꾸며 지금도 피아노를 내려치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절대신앙이 빚어 만든 작품이 피아니스트 이희아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망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겐 언제나 새로운 기회와 응답이 찾아옵니다. 절대 신앙은 절대 응답을 가져옵니다. 

V. 항변이 없는 신앙

다시 주님앞에 엎드린 이 여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오고 오는 인생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참으로 귀감이 될만한 고백이었습니다. 27절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마리 개로 취급받는 절대절망의 상황에서 마지막 끈을 붙듭니다. 

1. 첫째,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하나님께 항변하지 않는 자기 인정입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에 올라 가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가 되어서라도 주님의 긍휼을 덧입을 수만 있다면, 주님의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칭함을 입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럽사오니 
 종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 돌아온 탕자의 고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앞에서 “주여! 옳소이다”를 연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논란을 펴거나 사족을 달지 않습니다. 
“나는 개가 아닙니다.” 반박하지 않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나이다. 
 주님이 개라고 말씀하시면 개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은 선포된 말씀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결단코 논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경험과 이성과 자존심에 맞지 않아도 “주여 옳소이다”를 연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절대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는 사람, 오시는 예수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 바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용기를 주든지 실망을 주든지 책망하시든지 위로하시든지 응답을 주시든지 침묵하시든지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거두시든지 다시 돌려주시든지 높혀주시든지 낮추시든지 “주여 옳소이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진정한 긍정과 순종은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고 내 뜻과 내 지도자의 뜻이 다를 때 순복하고 Yes하는 거기에 진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요 절대신앙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똑똑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일들 앞에 옳소이다를 고백하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항변을 합니까?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2. 절대 신앙 - 그것은

어떤 난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계3:19)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열심이란 것은 인생의 엔진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동차라 할지라도 엔진에 불이 붙지 않으면 꼼짝하지 않습니다. 열심의 불이 붙지 않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를 이끌어 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뜨겁지 않은 것은 불이 아니듯 뜨겁지 않은 기도엔 불이 붙지 않습니다. 

바로 본문의 가나안 여인에게는 이런 열심히 있었습니다. 열심은 사람만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처럼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첫 번째 장벽, 두 번째 장벽, 세 번째 장벽에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주님앞에 그 열정을 보여드릴 때에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여인아” - 이 말은 원문에서 “오, 여인이여” 예수님의 감탄이 가득서려 있는 표현입니다. 여인의 절대신앙! 어떤 장벽에도 어떤 거절에도 어떤 냉대에도 어떤 무시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릴 줄 아는 이 여인의 절대신앙을 보고 예수님께서 “놀랍도다 여인이여”라고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여기 “크도다”는 메가톤급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여인아 네 절대신앙은 참으로 메가톤급이로다. 네 믿음은 놀랍도다 소원대로 될지어다. 할렐루야! 

지금은 메가톤급 신앙! 절대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3. 절대 신앙 II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끝으로, 절대신앙은 주님의 능력, 주님의 부요하심에 대한 절대신뢰입니다. 주님의 부스러기는 나의 태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부스러기 한토막이면 내 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한번만 관심을 가져주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집니다. 주님의 은혜 부스러기 한토막이면 나는 구원받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스러기 한토막이면 지옥의 문이 닫혀지고 천국의 문은 열려집니다. 
주여 부스러기 한토막이라도 좋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이 교회 성령의 불이 떨어집니다.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안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스러기 한토막이면 내겐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한국교회가 살아납니다.
주님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한민족이 살고 한 시대가 다시 살아납니다! 

할렐루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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