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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의 종말 (살전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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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종말 (살전 5:1-11)

북극 근처에 있는 아이슬란드는 인구가 삼십만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경제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이들은 국민소득이 높았고 환경이 깨끗했고 식량을 자급자족했고 민주주의가 발달했고 범죄율이 낮았습니다. 아이슬란드 국민은 바야흐로 역사의 끝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좋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007년에 금융위기가 닥쳤습니다. 아이슬란드에는 세 개의 은행이 있었는데 이 세 개의 은행이 국가 예산의 열 배가 되는 돈을 끌어다 썼습니다. 그때에는 그게 잘하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금융 거품이 꺼지면서 아이슬란드는 국가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평생 저금했던 돈이 날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이것은 국가적인 재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요즘 전 세계적인 화두는 기업을 규제할 것이냐 아니면 자유를 보장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선거철을 맞으면서 떠오르는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재벌을 규제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재벌이 골목 상권까지 위협하는 것을 봐줄 수 없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것을 봐줄 수 없다 하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가 그렇습니다. 비즈니스를 내버려두었더니 빈부의 격차만 벌어지고 상위 1는 잘 되는데 나머지 99가 고생한다. 규제하자. 이런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경제에 해당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인생의 모든 면에 해당합니다. 규제할 것이냐 자유를 줄 것이냐?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요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자유가 전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유가 자유되기 위해서 전제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입니다. 누가 간섭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할 건 하고 안할 건 안하는 책임 있는 성숙한 인간이 있을 때 자유가 자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덜 성숙할수록 규제가 필요합니다. 학교 · 군대 · 교도소는 규제가 없이는 운영할 수 없는 곳입니다. 잘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못하는 자에게 벌을 주는 자율에 맞기기보다는 규율을 의존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학창시절이 괴로운 이유는 규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두발 규제에서부터 교복 규제에서 왜 그렇습니까. 아직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군대가 괴로운 이유는 자율이 허락되지 않는 규율에 의존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도소는 말할 나위가 없지요. 교도소는 화장실에 갈 때도 허락을 받아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에 목말라합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국민이 염원했던 것은 자유에요. 그래서 민주주의를 얻었습니다. 이제 더 자유해졌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더 많은 자유를 향하여 나아갈 줄 생각하고 그렇게 되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아이슬란드처럼 꽝!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나라가 점점 나아질 줄로 생각했습니다. 역사의 종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줄 생각했는데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힌 것처럼 잘 나가던 국가가 무엇에 꽝 부딪힌 것입니다. 

이 재난의 원인이 무엇이냐. 그 원인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의 끊이지 않는 욕망의 문제 때문입니다. 국가 예산의 열 배나 되는 돈을 끌어다가 흥청망청 썼습니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그게 가능합니다. 집값도 계속 오르고 주가도 계속 오르고 돈 벌 수 있는 기회는 많은 것 같습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너도나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뛰어듭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거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서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은행 모든 금융 상품은 최고의 신용등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러다가 망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또 아무도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슬란드와 같은 금융위기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되풀이 되는 인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점점 더 성숙해져서 이제는 스스로 자기의 앞날을 책임질 수 있는 상태가 될 줄 알았는데 꽝 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사람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제는 성숙해서 규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일을 책임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꽝 문제가 터지니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사람의 문제 · 도덕적인 문제 · 욕망이라는 문제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중에 해가 질 때까지 밟은 땅을 준다고 해서 이 사람이 해가 지기 직전까지 한 평이라도 더 얻으려고 뛰어다니다가 해가 지기 전에 원점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는데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멎어서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월가의 금융인 중에 한창 잘 나갈 때 누군가 우리를 규제해 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 규제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멈출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욕망,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누가 외부에서 규제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러다가 망한다. 이러다가 분명히 망할 텐데 누가 규제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멈출 수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고민인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하나님의 고민이라고 말하면 어패가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도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고민하십니다. 

하나님은 가급적이면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자 하십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람이 율법이 아닌 은혜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류는 율법의 멍에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이끌려 살도록 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율법의 요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이끌려 살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율적으로, 성령이 우리 마음에 계셔서 우리 마음에 성령이 율법이 돼서 외부의 규제가 아닌 우리 안에 성령의 감동으로 스스로 자율적으로, 자발적으로, 자기의 선택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은혜에 이끌려서 선한 일을 행하고 선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고 ‘인자가 너희를 자유케 하면 정녕 자유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해서 인간이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 자유함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었더니 자유를 남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유를 주었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더 이상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었더니 그 자유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실이 더 나빠지고 무책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왜 세계적으로 이슬람이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슬람의 매력은 철저한 율법에 의한 종교라는 사실이에요. 철저히 법대로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라고 하기 때문에 다섯 번 기도하는 것이고, 여자는 머리를 가리라고 하기 때문에 머리를 가리는 것이고, 메카를 향해 기도하라고 하기 때문에 메카를 향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편리합니까. 자율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대로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인은 하루에 한 번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슬람은 하루에 다섯 번씩, 법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기 때문에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더 절도가 있어 보이고 강제적인, 차라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고민이요, 기독교의 고민이요, 저의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자유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고 율법으로 되돌아갈 것이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일 율법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 돼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돼 버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번복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전 세계적으로 규제냐 자유냐 하는 논쟁은 경제적인 논쟁인 것뿐만이 아니고 도덕적인 것이고 인간의 문제에 대한 고민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의 해답이 무엇이냐?

첫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번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실치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사람은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거짓 선지자요 이단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이루실 줄을 우리는 믿어야 되고 최후 승리를 믿어야 됩니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이루어질 줄을 믿어야 됩니다. 

두 번째로 다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더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문명이 발달하고 의식수준이 발달한다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에요.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천사가 되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인간이에요. 인간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신뢰하는 것은 생선가게의 고양이를 신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든 현재든, 제3세계든 선진국이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시대는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가 발전했다,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순간에 사람은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언제 멸망의 고통이 오느냐?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이제는 잘 살게 되었다, 이제는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그때에 별안간 멸망의 고통이 온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사람은 평안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에요. 그게 위험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럼 왜 기독교 종말론은 미래를 늘 부정적으로 보느냐. 그런 의문을 가지신 적이 없습니까. 문명은 더 발달하고 사회는 더 잘사는 식으로 변하는데 왜 성경은 종말을 말할 때마다 부정적으로 보느냐. 어둡게 보느냐? 미래에 대한 문학을 접해보면 소설이든 영화든 미래를 그린 작품을 보면 하나같이 어둡게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을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갔더니 아주 어둡고 무서운 사회가 돼 있다고 묘사하고 또 소설 <1984년>도 미래는 big brother 큰 형이 모든 사회를 감시하는 그런 무서운 사회다 이렇게 묘사했고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면 미래는 기계가 인간을 다스리는 시대가 됐다고 묘사하고 또 <아마겟돈>은 큰 혜성이 지구와 부딪혀서 지구가 멸망한다 이런 식으로 미래를 그리는 작품은 어둡고 두려운 그런 세상을 그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결국은 기독교 종말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러면 왜 기독교 종말론은 어두우냐. 이게 비관론이냐. 그건 아니고 그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아무리 의식수준이 발달하더라도 인간의 근본적인 죄와 욕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모든 발전이 사람에게 복이 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글로벌, 세계화 시대가 되면 더 잘 살줄 알았는데 한 나라의 위기가 모든 나라의 위기가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더 위험해졌어요. 세계화 시대는 그만큼 더 위험해졌어요. 한 나라의 아픔이 다른 나라에도 아픔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미래의 열쇠를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 낙원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사람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나라가 아닌,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닌, 하나님에게 속한 나라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인간의 미래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아무리 세상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늘 겸손하고 늘 온유하고 사람을 자랑하지 않고 또 사람의 소유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믿음.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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