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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합력하여 이루시는 하나님 (롬 8: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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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력하여 이루시는 하나님 (롬 8:28-34)

지난 공동의회 때에 감사로 인한 진통이 있었고 아직도 후유증이 있습니다. 교회 부지를 사겠다고 하던 Waldorf School 측에서 사겠다는 의사를 철회하였습니다. 부지를 매각한 후에 사고 싶었던 길 건너편 Valley Bible Church도 이미 다른 교회의 오퍼를 받아 에스크로에 들어갔습니다. 연초부터 별로 좋지 않은 듯한 소식이 계속 들려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을 준비를 다하였으나 하나님은 다윗이 아닌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짓게 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아직도 싸워야할 적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아직 평강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에게 교회당을 마련할 기회가 이번에 주어지지 않은 것은 샬롬이 우리 교회에 아직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의 샬롬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예비하신 귀한 선물을 우리에게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요예배마다 작년보다 훨씬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여 말씀을 배웁니다. 제직부서나 선교회마다 의욕적인 사업계획을 세우며 추진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사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도록 역할의 분담이 이루어져서 저의 수고를 많이 덜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만 좋은 일만 생기지 않습니다. 나쁜 일도 생깁니다. 형통하지만 않습니다. 때로 불행처럼 여겨지는 일도 생깁니다. 우리의 실수로 인하여 삶이 엉망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불평합니까? 원망합니까? 그런데 돌아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실수까지도 이용하셔서 선을 이루십니다. 그렇게 하시도록 돕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 다른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고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제 신자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성령에 속한 자라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며 성령을 좇아 행하는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바울이 "성령을 좇아 행하라", 혹은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특징을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이미’ 그러나 ‘아직’입니다. 

비록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으며, 그 거주하는 성령에 의해 '이미'(already) 새 시대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not yet) 육을 따라 살 수 있는 위험 아래 있습니다. 신자가 성령 체험을 한 순간 완전한 구원의 상태에 들어가거나, 죄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천사와 같은 존재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성도들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자신의 정욕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예수님께 속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됨을 중개하시는 양자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자들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준비도 해야만 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도우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기도하는 자리로 이끄십니다. 또한 그 기도로 말미암아 연약한 우리들을 변화시켜 강력한 하나님의 도구로 만드십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할 마음뿐만 아니라 기도의 내용을 보이시고 마땅히 구해야 할 바를 구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하십니다. 성도 안에 계신 성령께서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흔들림이 없이 걸어가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전에도 함께 하셨고 현재도 함께 하시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자입니다.

28절을 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말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생각은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기술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성령 안에서 갖게 되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행, 실패, 좌절, 비방, 질병, 죽음까지 다 포함합니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것 같고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과적으로 복이 되고 선이 됩니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고 고난을 당하고 슬픔을 당할지라도 그 마음에는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다는 믿음이 가진 자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합력한다는 말은 '함께 일한다'는 뜻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어울려서 선을 만듭니다. 행복과 불행이 함께 어울려서 하나님의 선을 만듭니다. 삶과 죽음이 함께 어울려서 하나님의 선을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선을 만듭니다. 실패까지도 절망까지도 죽음까지도 선으로 만듭니다. 

어려운 일을 겪습니까? 그때마다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이 도리어 복이 됨을 느낍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인내의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 빚으십니다. 그러한 고난과 역경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복을 이룰 수 있습니까? 심히 고단하고 영혼은 갈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앞의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형통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8:28절의 말씀을 믿는 성도들은 잠시는 흔들릴 지라도 이내 회복을 경험합니다.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임으로 그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다시 살게 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셔서 예수님을 부활이 첫 열매로 삼으셨고, 도리어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으로 이끄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엄청난 박해를 당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온 유대 지방으로, 사마리아로, 팔레스타인을 넘어서서 소아시아로 흩어집니다. 그런데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박해 자체는 불행이요 엄청난 시련이었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성도들의 흩어짐을 인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큰 일 났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대단치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호수를 배를 타고 나아갑니다. 갑자기 광풍이 몰아칩니다. 열심히 노를 젓지만 배가 나아가지 않습니다. 파도가 치니 배에 물이 들어옵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를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제자들의 말에는 곤경에 빠진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 주님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이 섞여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에 잠겨 가는데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예수님도 무엇인가 해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서 주무시고 계신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 없는 자기들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광풍 가운데 주무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보여주고 계신데 제자들은 영의 눈이 어둡다 보니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구원자를 한 배에 모시고 가면서도 도리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된 삶을 혹시 우리들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을 진대 담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고 위기가 닥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이 우리를 붙들어 인도하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심각한 어려움에 빠질 때, 얼핏 보면 시험이요 문제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인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로 부르신 목적: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29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에 택하시고 미리 정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아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전에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예수 믿고 구원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미리 알려진바 된,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들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사탄의 수많은 유혹 속에 살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흠 없고 온전하고 거룩하게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사는 자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정죄함이 없게 만드시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 주시며,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감싸 주시고 우리의 실패와 절망과 좌절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슬픔과 고난도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절망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과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30절을 보십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구원의 1단계는 '정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과 섭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자리에 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정하심'은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왜 저 사람은 선택받지 못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내가 선택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섭리 가운데 두신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2단계는 '부르심'입니다.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선택받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런데 선택을 받았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것은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것을 주기 위하여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3단계는 '의롭게 하심'입니다.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 로마서의 핵심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된 그들을 부르십니다.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십니다.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 피로 우리의 죄를 다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귀의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늘의 상속자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4단계는 "영화롭게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흠 없고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두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의 절정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 받은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도록 만드십니다. 사탄의 모든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보좌에서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천군천사와 장로들과 생물들과 함께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스러운 곳까지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요, 아들의 형상으로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죄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를 그 영광 가운데 두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어떤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까?  

1) 승리에 대한 확신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바울이 이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으며, 우리를 택하셔서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 우리를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시편 3:6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이 담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는 견고함 때문입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2) 은사에 대한 확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절)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셨는데 무엇을 더 아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에게 하나님은 넘치도록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한량없는 은사를 우리에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구하시고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3) 구원에 대한 확신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3-34)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합니까? 마귀는 지금도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으려고 여러 가지 궤계를 부립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자신은 압니다. 이때 마귀가 와서 속삭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들먹이며 고소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귀의 그런 고소가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든다면 우리가 힘이 빠질 때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기에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모든 상황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짧은 안목과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놓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좌절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선언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일깨워 주며,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게 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겪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뜻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도전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견고한 반석 같아서 흔들 자가 없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우리의 시선은 주님께 고정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그 영광의 복을 누리도록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성령 안에서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붙들며 담대하기 나아가는 가운데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를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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