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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신 18:15-20, 막 1:21-28, 고전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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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신 18:15-20, 막 1:21-28, 고전 8:1-13)

<사랑 때문에 제한되는 자유>

오늘은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입니다. 이번 주일의 성서정과 중에서 먼저 고전 8: 1-13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본문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오늘로 말한다면 기독교인이 고사 지낸 고기나 떡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뒤 기독교는 크게 유대계 기독교와 이방계 기독교로 나뉘어져 발전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구약의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다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방계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만 알았지 유대교의 율법은 잘 몰랐기 때문에 양 계파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크게 세 가지 문제에 있어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할례 문제와 식사 규례, 그리고 안식일을 비롯한 유대교 성일을 지키는 문제였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 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음식 문제로 홍역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4-6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허상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하신 참 신(神)이므로 우상은 허깨비이고 이 허깨비에 바친 음식을 먹는 것 역시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8절을 봅시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 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도 아니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에 어떤 음식을 먹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음식도 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요, 또한 예수님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바울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하나 달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다시 말해 우상이 참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하등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지식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7절을 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일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신학적 지식을 갖지 않은 채 오랫동안 우상을 섬기던 습관에 젖어 그들이 먹는 고기가 우상의 것인 줄로 여기고 먹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아직 건전한 신학적 지식을 갖지 못한 채,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으면 더럽혀진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이든 어떤 음식이든지 간에 음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음식도 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지식을 가진 이들의 처신이 문제입니다. 

9-11절을 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 말씀을 우리 시대의 비유로 아주 쉽게 풀어본다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이 우리의 구원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가진 이가 아직 그런 지식이 없고 믿음도 약해서 술 담배를 하면 크게 잘못하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 앞에서 술 담배를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면 아직 초신자 앞에서 집사님이나 권사님이 공석에서 아무 거리낌이 없이 술 담배를 자유롭게 할 경우, 그 초신자가 “아 예수 믿는 사람이 이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구나!” 하면서 주초(酒草) 문제를 따라 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이런 논리를 따라가면 11절의 말씀 그대로 주초 문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사람의 지식 때문에 아직 믿음이 약한 자를 망하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형제자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이지요. 

결국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참 아름답고도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자유로 인해서 아직 믿음이 연약한 형제자매가 상처를 입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자유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상은 참 신이 아니므로 우상 앞에 바친 제물고기 역시 하등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 거리낌이 없이 고사나 제사를 지낸 다음 나온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아직 그런 지식이 없습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 몸과 마음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아직 지식도 없고, 믿음과 양심도 연약한 형제자매가 나의 자유로운 행위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그 형제자매를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정신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자유의 포기 선언이지요! 

바로 이 점에서 1절 말씀 그대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형제자매가 어떤 상처를 받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대로만 행동한다면 그 지식은 사람을 한없이 교만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때로 바른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그 지식에 의거한 행위 때문에 누군가 오해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면,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지식과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고자 할 때 덕이 세워집니다. 


<자유인이나 종이며>

바울 사도는 갈 5: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신신당부합니다. 하지만 같은 장 13절에서 또한 이 자유에 대해 분명한 한계를 그어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마르틴 루터 역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 굴복 당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한 만유의 주인이지만, 이와 동시에 모든 이에게 굴복 당하고 절대적으로 만인을 섬겨야 할 종”(a perfectly free lord of all, subject to none…[and] a perfectly dutiful servant of all, subject to all)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담배도 피울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고, 카드놀이나 화투도 칠 수 있고, 노래나 춤도 출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가 내 이웃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순전히 그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정신으로 내 자유에 제한을 가하겠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도서관에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알려진 칼 바르트가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바르트는 신정통주의 신학의 아버지요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었는데 그런 분도 담배를 피우는데 우리라고 해서 못 피울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신학생들 가운데는 음주나 흡연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창 믿음이 순수한 신입생 후배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서는 걸려 넘어지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선배들을 따라하다가 물든 이들도 많았고, 또 크게 실망해서 아예 신학교를 떠나는 이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전 세계에서 유난히 주초 문제에 대해서 엄격한 곳이 한국 교회입니다. 서양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렵게 된 것이 다 술 담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교회를 나오려면 이것부터 끊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둘째 치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난히 주초문제에 엄격한 것이 한국 개신교회의 불문율이요 전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다는 지식 하나 때문에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음주를 하고 끽연을 한다면 상처받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지만 오직 사랑의 정신에서 그 자유를 때로 기꺼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더러운 영을 깨끗케 하신 주님>

이제 복음서로 돌아옵니다. 오늘 봉독한 막 1: 21-28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먼저 21-22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서기관들, 즉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주제가 예수님의 authority, 즉 권위입니다. 예수님의 이 권위 때문에 악한 귀신도 쫓겨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놓쳐서 안 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23-26절을 봅시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복음서 기자는 귀신 들린 사람이 누구인지 전현 관심이 없습니다.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예수님이 거룩한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을 말씀 한 마디로 쫓아냈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거룩한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 결과를 27절에서 이렇게 보도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더러운 귀신이 쫓겨 나간 사건 역시 예수님의 권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먼저 교회는 예수님의 권세가 가득해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 악한 영들이 쫓겨나가는 이유는 사람이나 제도 때문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권세가 충만할 때 그렇게 됩니다. 또 한 가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거룩한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 회당, 즉 교회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가 어떤 자리라고 감히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을 자리이냐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썩은 사과 하나가 사과 상자 전체를 썩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교 율법이 바로 이런 정신을 가졌지요. 더럽고 부정한 사람이나 물건을 만지거나 접촉하면 곧바로 더럽고 부정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을 더럽힌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율법의 방향을 바꾸셨습니다.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율법에서 복음으로 방향이 바뀌는 과정은 ‘오염’에서 ‘치유’라는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으로의 방향선회입니다. 

혹시 오늘 우리도 여기 거룩한 교회에 와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와야 할까요? 당연한 대답은 “누구나 다!”입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말한다면 누구나 다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는 여러분이 백화점이나 상가에서 한 십분 동안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왔으면 좋을까? 열심히 관찰하다보면 우리 교회에 안 왔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 않은 것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옷을 잘 차려입고 예절 바르고 교양도 있고 돈도 좀 있어 보이고, 교육도 제대로 받은 사람은 괜찮은데, 아무데나 침을 탁탁 뱉고 무례하고 술에 찌들려 있고 옷도 허름하게 입은 사람들은 별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마약을 거래하는 상인들, 몸 파는 창기, 동성연애자, 조폭 등등은 우리가 꺼려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이들도 꺼려할 수 있겠지요. 불결하다는 생각에, 또 여기 거룩한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편견 때문에 누구나 다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는 분이기 때문에 어떤 더러운 귀신도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교회는 깨끗한 사람들만 오는 곳이 아닙니다. 더러운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권세로 깨끗케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교회 역시 지식만 가지면 언제나 교만해지겠지만 사랑의 정신을 가지면 항상 덕을 세울 수 있는 곳입니다!


<권위냐? 우상이냐?>

이제 신 18: 15-20절로 오늘 말씀의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요단강 건너편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두고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작별 인사요, 고별 설교입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15절). 그 선지자의 입에 모세의 말을 담아 줄 것이므로 그 선지자의 말을 듣는 것은 곧 모세의 말을 듣는 것이고, 듣지 않는 것은 곧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18-19절). 

이렇게 모세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이 말씀을 선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권위 있고 존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와 같이 선지자들의 권위를 부인하는 백성들도 문제이지만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정작 선지자들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20절을 봅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든지, 아니면 설령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신들의 이름을 빌려 말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만 선포해야지 시류에 영합하고 교인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加減) 없이 온전히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교회는 주님의 입이 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탁받아 참 권위를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꼭 전하라고 하신 말씀만 전하면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온갖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의 권세로 쫓겨나가는 역사가 오늘도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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