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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깊은 곳을 향하여(2) (눅 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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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곳을 향하여(2) (눅 5:6-11)

-풍요를 넘어서-

: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다시 불일듯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습니다. 무리가 밀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 때문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대어 있는 배 두 척을 보셨습니다. 그 어부들은 다음 날 고기잡이를 위하여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가셨습니다. 시몬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너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시몬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시몬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는 실패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순종하였습니다. 시몬은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전혀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I. 축복

일반적으로, 축복이란 빌 축‘(祝)자, 복 복‘(福)자를 써서 ‘복을 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축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관용적으로 축복을 ‘하나님이 복을 내리다’는 뜻으로 교회에서 사용합니다. 축복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자,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입니다.

말씀에 순종한 시몬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렇게 하니’ 즉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 결과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심히[plh'qo"/플레도스]’라는 말은 ‘가득 참’이라는 뜻입니다. ‘가득 차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많아[poluv"/폴뤼스]’라는 말도 ‘많은’, ‘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물이 찢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야말로 ‘겁나게 많이’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1.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 3:20)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이삭은 흉년이 들자 불레셋 사람들이 사는 그랄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더니 그 해에 백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창 26:12). 이삭은 재산이 점점 늘어서, 아주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양 떼와 소 떼, 남종과 여종을 많이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할 정도로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조금 받는 사람이 아니라, 꿈꾸는 그 이상의 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시몬이 받은 복은 엄청난 복이라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이 받은 복은 그의 그물만을 찢어지도록 채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몬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손짓하다[kataneuvw/카타뉴오]’는 말은 ‘고개를 아래로 끄덕이다’는 뜻입니다. 감히 입을 벌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동료들이 와서 함께 그물을 끌어올렸습니다. 두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가득히 채웠습니다. 시몬의 배만 채운 것이 아니라 동료들의 배도 채웠습니다. 시몬은 동료의 배까지 가득 채우는 복을 받았습니다.


2. 나누는 복을 받았습니다.

‘배를 채웠다’는 우리말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고기 잡는 배(船)를 고기로 채웠다는 말일 수도 있고, 먹는 음식으로 배(腹)를 채웠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는 고기 잡는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자신의 배부른 것으로 만족하고 남이 배곯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나누어 줄 것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의 형편을 돌볼 여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관심이 부족하여 ‘내 배 부르다고 종의 밥 짓지 말라’는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남과 나눌 수 있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은혜는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이웃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먼저 부요하여야 합니다.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풍성한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야기가 하나님께 순종하였더니 복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성경의 진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만으로 끝난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험을 넘어서야 뿐만 아니라, 번영도 넘어서야 합니다. 전혀 새로운, 신앙의 차원이 있습니다.


II. 경외

순종하여 단번에 엄청난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시몬은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8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8a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릎 아래 엎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깨뜨리는 것이 아닙니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자, 비굴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포로나 노예가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엎드리다[prospivptw/]’는 말은 ‘앞으로 떨어지다’, ‘갑자기 달려들다’라는 뜻입니다. 시몬은 예수님 앞에 펄썩 주저앉았습니다. 시몬은 엄청난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 쓰러지듯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이전과는 전혀 달리 보았습니다.

1. 인생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시몬은 조금 전까지도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고 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몬에게 예수님은 남들과는 약간 다른 훌륭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섬겨야 할 주님이 되셨습니다.

중국의 고승, 임제 선사에게 한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스님, 무엇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그 순간 ‘철석!’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선사가 젊은이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습니다. 젊은이는 저만치 나가떨어졌습니다. 잠시 후, 젊은이는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임제를 노려봤습니다. 그 때 곁에 있던 다른 분들이 젊은이에게 “자네는 높은 법문을 듣고도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높은 법문이라는 말입니까?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젊은이는 뺨을 맞는 순간 생각이 딱 멈추었을 것이라고. 느닷없는 일에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이게 옳다, 저게 옳다는 생각도,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생각도 딱 끊겼을 것이라고. 생각도 멈춘 그 자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각도 멈춘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엎드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시몬의 인생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드디어 어부 시몬이 제자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시몬에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였습니까?

8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8a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시몬이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으로 나갈 때, 막연하나마 어느 정도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그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상상 외의 결과에, 그 결과가 아니라 그런 결과를 있게 하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신 예수님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같은 사람과 함께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싶으나 도망칠 수도 없기에 제발 자신에게서 떠나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야기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고 좋아하여야 할 시몬이 오히려 엎드려 죄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놀라우신 예수님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비천하고 나약한 죄성을 본 것입니다.

2. 죄인인 자신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삶의 역설(paradox)에 맞닥트리게 됩니다. 그토록 잡기를 원하였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는데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는 것이나, 고기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게 된 것이나 별 차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크고 작고, 있고 없음도 전혀 소용이 없는 절대 무(無)를 경험한 것입니다. 드디어 인생의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물을 내려야 할 인생의 깊은 곳은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리입니다.

잘 나가던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철저하게 절망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신에게 희망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까지 하였습니다.

생각이 멈춘 자리, 생각이 시작하는 자리는 무(無)가 아니라 죄(罪)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라면 그래도 무엇인가 새로 시작할 수 있으련만, 새로 시작할 수도 없는 죄가 인간의 자리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로써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만나는 것입니다. 정신이 아득하여져서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그 순간에 나를 향하여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깊이는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어떻게 시몬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게 되었습니까?

9절과 1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a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시몬이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자신을 떠나달라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놀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놀람[qavmbo"/담보스]’은 말문이 막히고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놀람은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면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가득 찬 그물이 아니라 이토록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놀람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 분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스랍들이 부르는 우렁찬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에 이사야는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하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사 6:5)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오금이 절리는 신비를 경험하며, 자신의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나아간 순종은 시몬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비로 다가오심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다만 시몬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무릎을 꿇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도 들을 수 있는 예민함으로 훈련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기록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무딘 마음을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보습으로 갈아엎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기를 갈망하여야 합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원하여야 합니다.

찾아와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신비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넘치는 복 앞에서 오히려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절망하는 죄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런 죄인에게 사명을 주시는 반전이 있습니다.
 

III. 사명

예수님은 무릎 앞에 엎드려져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시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10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0b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고기를 잡던 어부 시몬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제자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이라며 엎드린 시몬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생명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1. 생명을 구하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역설이 있습니다. 엄청난 축복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시몬의 행동도 역설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람에게 생명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신 것도 엄청난 역설입니다.

모세, 그는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는 이스라엘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버려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일강에 버려지자 건짐을 받아 공주의 아들로 애굽 왕궁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왕궁에서 자라난 모세가 자기 동족을 돕기 위해 애굽 사람을 죽이자 곧 왕궁을 떠나 도망쳐야 했습니다. 자신의 동족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하는 순간 그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미디안의 목자인 모세를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호렙산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는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보내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그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그 일을 위하여 달려서라도 가야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못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고 하며 못가겠다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하겠다고 할 때는 도망치게 하셨고, 모세가 못하겠다고 할 때는 가게 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사명은 내가 할 수 있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할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뼈저리게 여기며, 은혜 없이는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게 하시는 주님의 사명입니다. 

시몬은 생명을 구하라는 사명을 받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시몬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엄청난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함께 놀랐던 야고보와 요한까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주어진 사명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2. 버리게 하는 사명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사명을 깨닫자 그동안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것을 오히려 내려놓았습니다. 그토록 얻기를 원하던 것을 잡았지만 그것보다 더 귀중한 사명을 위하여 버렸습니다. 가진 것을 버리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사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살 수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이 천국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자신에게 질문을 합시다. 자기 자신이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는가를 묻지 마십시오. 또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버렸는가 하는 것도 묻지 마십시오. 그러나 단 하나, ‘나는 예수님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가?’ 라고 물으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자신에게 자신을 구원할 의로움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며 자신에게 깊이 절망해보셨습니까? 그리고 이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믿으십니까? 단지 그 은혜로 자신을 자녀삼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깊은 곳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경험을 넘어서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번영과 축복을 넘어서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주심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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