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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성령으로 (고전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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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으로 (고전 2:1-13)  

바울은 핍박자였다. 예수가 싫어서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다니던 그는 주님 손에 붙잡혀 전도자가 되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전도를 위한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성령의 사람이란 마치 지성적인 사람이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 전도의 사람이 되는 것은 오히려 진정한 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 성경 속에서 바울은 무엇을 전하며 어떻게 일하는가?  

1. 오직 성령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전한다. (고전2:10)

고린도전서 2장에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결심이 세 번이나 나온다. 
고전2:1, 4, 13절이 그것이다. 바울은 왜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지혜를 사용하지 않는 결심을 밝히는가? 그것은 행17:16~34에 있는 경험 때문이다. 

바울은 아덴에 왔을 때 아레오바고 언덕에 서서 설교를 하였다. 철학자들이 많은 도시에서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철학을 사용하였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대해서 알려 주겠다고 설교하였다. 바울의 설교는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그들의 알지 못하는 신이 창조주 야훼 하나님임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 설교는 바울을 아덴 사람보다 우월하고 더 지식적이며 답을 가르쳐 준 똑똑한 사람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덴 사람이 모르는 신을 가르쳐 주므로 철학적 교사로서 인정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복음 전도자로서 서지는 못했다. 

전도는 설득이다. 듣는 자가 동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의 세상적 지혜가 드러났으나 말씀에 아무런 운동력이 없었다. 막말로 바울의 지혜는 도리어 어리석음이 되었다. 아덴 사람보다 우수한 지적 설교자는 되었을지언정 아덴 사람을 이겨놓은 우월감 앞에 그들의 마음 문이 닫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바울의 설교는 지적 유희로 다가왔을 뿐 그 결과는 너무도 미미했다. 지식과 지혜는 필요하다. 그러나 지혜의 말이 때로는 자랑이 되어, 아름다운 말의 유희가 자기 자랑이 되어 버리면 뜻밖에도 설교를 망친다. 지적이고 싶은 유혹을 피해가야 한다. 결국 아덴의 설교는 몇 사람을 믿게 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의 말, 아름다운 지혜의 말을 내려놓기로 다짐한다. 오히려 고전2:7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겠다고 한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통치자의 지혜도 아니다. 이 지혜는 감추어졌던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다. 세상 사람의 지혜로 볼 때는 어리석고 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다. 못 박힌 것은 약함이다. 수치다. 저주다. 희생이다. 아픔이다. 패배다. 버림 받음이다. 고통이다. 죽음이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지혜, 최고의 지혜라고 말한다. 이것은 고전2:10에 성령으로 보여주신 지혜라고 한다. 

십자가는 정말 걸림돌이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지혜를 찾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지혜다.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하였다. 바울은 정말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던 말세 전의 지혜를 성령님이 보여주셔서 알게 되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전한다. 성령이 보여주셔서 알게 된 십자가를 전한다. 십자가가 지혜요 능력임을 전한다. 십자가가 죄와 죽음을 정복했기에 그렇다.


2.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전한다. (고전2:4)

성령의 나타나심은 다양한 은사가 교회에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은사는 30가지가 되지만 고전12;8~11에서는 9가지다. 그 9가지 은사를 왜 주시는가?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령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의 은사, 또 어떤 이에게 주시는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등 이런 것은 모두 유익을 위해서다. 바울은 전도를 위해 성령을 의지한다. 성령의 나타나심, 은사를 통해서 전도하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을 세우려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헬라의 변론가나 세상 지혜, 수사학에 좌우되지 않는다. 믿음도 고전2:5의 말씀처럼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서 생겨나야 한다. 서신교회 부흥회에서 점심식사를 나누는데 사모님께서 교인 이야기를 꺼내신다. 강사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고 성령의 능력, 믿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식도 역류병을 지닌 남편을 위해서 손을 대고 선포했더니 가슴이 뜨거워지고 이튿날 병원에 갔는데 아픈 데가 없다고 해서 신기하다고 한다. 이름이 신금순 집사라고 한다. 전도에는 이처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행28:1에서 멜리데 섬의 바울을 보라. 뱀에 물리고도 죽지 않는다. 배가 파선되어 조난을 당한 바울이 보블리오 추장의 부친의 열병을 기도하고 안수하므로 낫게 한다. 성령의 나타나심이다. 전도는 이런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는 약하나 성령의 나타나심은 강력이다.  

3.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전한다. (고전2:13)

성령 보혜사는 스승이시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는데 성령의 가르치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었던 것이니 비밀과도 같다. 육에 속한 사람에겐 어리석게 보이고 또 그것을 알 수 없다.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엡3:3을 보라. 비밀이 무엇인지 나온다. 그 비밀은 하나님의 계시로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엡3:5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 비밀은 미스테리온으로서 사람의 지혜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계시하고 가르치므로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삼일 만에 다시 사신 예수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주 예수 안에서 너와 내가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며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방인들이 복음 때문에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자가 된 것이다. 

이런 비밀은 우리에게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고 우리는 이 가르친 것으로 전도한다.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조선인이나 모두 다 한 권속, 한 지체가 될 수 있기에 더욱 열심히 전도한다. 전도하기 위해 누구에게는 가고 누구에게는 가지 않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다 하나가 된다.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를 마치고 고린도 지방으로 왔다. 그런데 행18:9에서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래서 바울은 용기를 내어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문다. 

성령은 이와 같이 복음의 비밀과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 십자가를 가르쳐 주지만 전도인이 전도하는 기간까지 전도를 더 계속해야 할 것인지도 가르쳐 주신다. 요14:26에서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으면 항상 인도함 받는 삶을 살게 된다. 성령이 오시면 믿지 않는 죄에 대해서까지 책망해 주신다. (요16:9) 

바울은 자기 지혜를 버렸다. 아니 성령께 사용되도록 맡겨드렸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성령의 가르쳐 주심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들도 이제 성령의 가르침을 받자. 나의 약하고 두려움으로 인해 심히 떨지 말고(고전2:3) 나아가자. 또 한편 세상적 지혜와 언변의 능력을 가졌다고 교만하지 말자. 우월감에 빠지지 말고 나아가자. 성령님은 가르치는 자가 알고 선포하고 설명하도록 하신다. 또 성령님은 듣는 자가 받고 이해하고 식별하도록 하신다. 주저하지 말고 사람 앞에 나아가자. 

1997년 세네갈 선교 여행을 간 9명의 사람들이 미전도 종족이 사는 고립된 마을에 한국인 선교사의 안내로 들어갔다. 미전도 종족인데 너무도 오지여서 삼중 사중의 통역 단계를 거쳐 복음을 전하다 보니 “섬기러 왔다”는 말이 와전되어 “정복하고 다스리러 왔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붙잡혀 나무 기둥에 묶이고 사람들은 모여서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춤을 쳤다. 그래서 죽는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찬송하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서 전도사를 따라 모든 일행이 찬송을 하였다. 

그런데 원주민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결국 모든 원주민이 다 쓰러져 저녁이 되어야 하나둘씩 일어났다. 그들은 선교팀을 풀어주고 대화가 시작되어 오해가 풀렸다. 그런데 “왜 쓰러졌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대답하길 “전도단의 찬송 소리가 너무도 커서 어쩔 줄 몰랐는데 묶여 있는 여러분들의 얼굴에서 불이 나왔어요 그 붉은 불을 볼 때 쓰러지고 말았어요.” 한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그들은 복음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능력, 나의 재능, 나의 언변, 나의 가진 것보다 가르쳐 주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설 때 바울적인 태도를 가지고 바울적인 영성을 갖자. 오직 성령이 보여주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지혜를 전하는 전도자,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담대히 전하는 전도자, 오직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순종하며 사역하는 전도자로 성령의 사람이 되자. 

성령의 감동을 따르면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어떤 환경 가운데 있든지 당신은 지치지 않고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도의 달인으로 서게 될 것이다. 즉 실망하지 않는 달인, 포기하지 않는 달인, 성령을 따르기에 중단하지 않는 달인으로 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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