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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 그 영광된 이름 (룻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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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 그 영광된 이름 (룻 1:6-18)


1. 하나님의 백성임이 영광스럽습니까?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우십니까? 다시 말하면, ‘성도’라는 이름이 여러분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이냐’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애굽을 나와 이제 막 광야 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하신 영광스러운 이름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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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소유”라는 말은 ‘귀중한 재산, 보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아주 특별한 보물과도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붙여진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여주신 두 번째 이름은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제사장’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대표자, 중보자’를 뜻합니다. 즉 제사장은 모든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요, 하나님 앞에서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대표이며 누구를 위하여 중보 하는 민족입니까? 출애굽기 19장 5절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세계 열방을 대신하는 자요, 그들을 위한 중보자로 세움 받았다는 말입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의 대표자라는 것,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까? 全校生을 대표해서 상을 받는 학생이 많지 않습니다. 全軍을 대표해서 훈장을 받는 군인이 많지 않습니다. 全 市民을 대표하는 것 역시 정말 특별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온 세상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민족이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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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이름, 그 세 번째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여러분, “거룩한”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아시지요? ‘구별된’이라는 의미와, ‘신에게 바쳐진’, ‘신성한’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이란 비록 이 땅에 살지만 ‘하늘 백성으로 구별되고 성별된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특별한 이름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땅에 살지만 하늘 백성이라는 것, 인간이지만 거룩한 신의 소유로 구별된 존재라는 이 이름은 아무에게나 붙여지는 이름이 아닙니다. 이 세상 어느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이름을 부여받았습니까?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소유 … 제사장 나라 …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름은 정말 특별하고 영광된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영광된 이름들은 구약 이스라엘만의 이름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 역시 영광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베드로전서 말씀과 출애굽기 19장의 해당 말씀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차이란 ‘다르다’는 의미보다는 ‘進展’, 혹은 ‘發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 …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 … 거룩한 백성”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이름이라면, 신약 성도의 이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여기서 “택하신”이란 ‘고르고 고른, 정선한’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아무렇게나 무작위로 뽑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신중함과 계획함 가운데 선별된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왕같은”이라는 말은 왕과 비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왕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룩한”의 의미는 구약과 같고요. 마지막이 “그의 소유가 된”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자신을 위해 보존하거나 간수하다’, ‘자신을 위해 획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따라서 “그의 소유가 된”이란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을 위하여, 즉 신적인 계획과 목적을 위하여 소유로 삼으신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성도의 영광된 이름은 출애굽기보다 더 높고 커고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붙여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이름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친히 온 세상에 공표하신 영광된 신분과 이름을 가졌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이 영광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엘리멜렉 가족이 바로 그들입니다.

2. 실패를 통해 그 영광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➀ 엘레멜렉 가족은 “그 땅에 흉년”들었다는 이유로 모압으로 移住했습니다. 그들의 모압 이주는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첫째는 떠나서는 안 되는 “그 땅”을 떠났다는 점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언약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성취될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여 하나님의 소유요, 거룩한 제사장,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땅의 형편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농사와 목축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렇지만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방법은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때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멜렉 가족이 흉년을 피하여 그 땅을 떠난 것은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보지 못한 것이요, 나아가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되는 약속의 땅을 저버리는 행동이었습니다. 

엘리멜렉 가족이 “그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간 것의 두 번째 문제는 다름 아닌 ‘모압’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모압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방해하고 저주하는 자들의 땅이었습니다. 그들도 이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로 간 것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과 그 명령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셈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하나님이나, 그 언약, 혹 그 기업의 땅보다는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우선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고, 먹고 입고 자는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된 이름을 버렸습니다.

➁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살면 잘 되겠습니까, 잘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그 영광된 이름을 스스로 차버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 것의 결과는 정말 처참했습니다.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에서의 10년, 그 결과를 보십시오! 10년이 흐른 후, 그 가족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이 남달리 강했던 家長 엘리멜렉은 타향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 나고 똑똑한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들들의 좋은 엄마인 나오미는 더 이상 아내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아내라 불러줄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를 엄마로 불러줄 아들들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올 때는 제법 “풍족”했습니다(1:21). 이 “풍족”이라는 말은 ‘충만하다, 가득하다, 넘치다, 상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그들이 모압으로 이주할 때는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비었습니다.” “비었다”는 말에는 ‘빈손’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네 식구 중에서 세 남자가 죽고, 한 여자 만 남았습니다. 모압으로 갈 때 풍족했던 그들이 이제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그 영광된 이름을 버린 결과였습니다.

➂ 그런데 여러분, 모압에서의 10년을 돌아보면서 처절한 실패와 아픔뿐이었다고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결론이 아닙니다. 즉 나오미의 회고가 원망과 불평이 가득 찬 부정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나오미가 13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고 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일 여지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들들이 죽고 빈털터리가 된 것이 하나님과 언약과 기업을 버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그의 고백 때문이죠. 

그러나 그의 하나님 지식과 고백은 부정적이거나 불신만이 아니었습니다. 8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절 “여호와께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오미는 하나님을 벌주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을 뺏아가시는 하나님, 재산을 몽땅 털어 가시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선대하시는 하나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 며느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자신이 잘못 산 결과 지극히 당연한 징계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고 철저히 빈손이 된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편으로 ‘선대하시는 하나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오미가 실패를 통하여 보다 온전하고 깊이 있고 성숙한 하나님 지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물론 너무 늦게 깨달은 지식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이들을 잃기 전에 깨달았다면, 피땀 흘려 모은 재산 날리기 전에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래도 나오미는 자신의 모든 불행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이나 자신의 현실에 대해서 결코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늦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 됨에 대해 바르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긴 잠에서, 영적인 무지에서 비로소 깨어난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오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광을 너무나 가슴시리고 고통스러운 실패를 통하여, 즉 너무 비싼 레슨비, 고액의 수업료를 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을 포함하여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은 나오미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픔과 실패를 통하여 깨닫기보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특별하고 영광된 신분이자 이름인지를 알고 그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그 백성을 통해 그 영광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드디어 룻기의 여주인공인 ‘룻’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룻은 정말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녀는 자기 나라로 이주해 온 外國人인 엘리멜렉 집안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1장 3절 말씀에 따르면, 시아버지 엘리멜렉이 죽고 난 다음에 그 가정의 며느리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서 이민 온 엘리멜렉 가정이 한참 잘 나갈 때, 풍성하고 행복할 때, 시집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미 家勢가 기울고 있을 때, 그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을 때 시집을 왔다는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는지, 남편과 진한 연애를 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무튼 룻은 가난한 외국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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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그녀의 특별한 모습은 결혼 한지 불과 몇 년 못 되어서 남편이 죽었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보아스를 비롯한 베들레헴 사람들이 룻을 “소녀”라고 말한 것을 보아 그녀의 나이가 20세를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녀”라는 말이 열왕기상 1장 3,4절에서는 “젊은 처녀”, 혹 “동녀”라는 말로, 열왕기하 5장 2,4절에서는 “어린 소녀”라는 말로도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룻에 대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룻을 유부녀, 혹은 과부라고 하기에는 아직 그 얼굴에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이 없이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재혼할 수 있는 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길로 가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 나선 것을 보십시오. 그런 면에서 룻은 특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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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룻의 특별한 점은 그 동서인 오르바와의 비교에서입니다. 오르바 역시 룻과 함께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돌아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자기와 함께 돌아가 봐야 아무런 소망이 없다면서(12), 고향의 부모와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라고 강요했습니다. 지금도 불행하지만,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 더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불행 속으로 젊은 며느리들을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오르바는 룻과 함께 소리 높여 울면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결국은 나오미의 말을 받아들여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15).” 그러나 룻은 달랐습니다. 

끝까지 그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더라(14).”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붙좇았더라”는 말은 ‘달라붙다, 매달리다’라는 뜻이며, 이것이 명사로 쓰일 때는 아교나 본드 같은 것으로 두 가지 물건을 결합시키거나 땜질 한다는 뜻입니다. 즉 룻은 자신이 시어머니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어린 여인이지만 義理라고 할까요, 信義(믿음과 의리)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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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과 연결되는 네 번째 그녀의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룻이 그렇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세상적인 욕심이나 인간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룻이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로 돌아가 봐야 소위 ‘팔자 고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돌아가면 처분할 땅이 남아 있었습니까? 돈 많은 시아버지의 형제, 혹은 남편의 사촌이 거기 살고 있었습니까? 이후 나오는 말씀을 보면 보아스 역시 “유력한 친척”이라는 것과 그보다 좀 더 촌수가 가까운 친척이 있었지만 그는 나오미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까운 친척의 도움을 기대했을 가능성 역시 없습니다. 도리어 재혼하여 행복을 가꿀 가능성은 모압에 그대로 있는 것이 더 많고 좋았습니다. 게다가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말하자면 외국인 며느리로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야말로 ‘소망 제로, 불행 만땅!’ 이것이 그가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거기서 만날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룻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룻은 아무런 소망이 없을 뿐 아니라, 더 힘들어지고 고단해질 삶의 현장으로 스스로 들어가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답은 바로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부분이 오늘 설교의 또 다른 핵심입니다. 룻의 고국이자 동포들의 땅인 모압에는 여러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신들은 인간의 행복을 약속하면서 잘못 살 때는 벌을 주지만 복을 주는 쪽으로 더 강조된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압의 신들은 실재하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즉 살면서 만나지고 경험되는 신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룻은 시집와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시집 식구들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平安과 亨通과 健康과 福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도 있었겠습니다만, 룻은 불행과 죽음과 실패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룻이 알던 신들은 겉으로는 행복을 보장하고, 성공을 약속해 주는 것 같으나, 사실 생명이 없는 신이요, 불러도 대답할 수 없고, 잘못해도 그 잘못을 나무랄 수 없는 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집 식구를 통해서 본 하나님은 그 백성의 잘못을 분명히 징벌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즉 모양은 징벌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것을 다 잃은 뒤에도 인정받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룻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그 땅으로 돌아가려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모습을 통해서 이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안정되고 발전된 문화 속에서 풍요롭게 살아왔지만, 그러나 그 땅은 죽은 신들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거짓 신들의 땅에 머물기보다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의 성공과 실패를 통하여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그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룻과 그의 결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룻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참 신, 유일하신 하나님인 것을 보았습니다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모압 여인 룻으로 사는 것보다 더 영광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영광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것을 버리기도 했지만, 이방 여인 룻은 그들이 버린 그 영광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그 길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룻기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기적’입니다. 

이런 일들이, 즉 룻과 같은 사람들이 성도 여러분 주변에서 우리 교회 주변에서 많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 말하면, 성도 여러분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정말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라는 것이 입증되어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나오미처럼 실패한 자리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여드리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든지 여러분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4. 지금, 여기에서 그 영광을 깨달으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창조주이시며 
통치자로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생명처럼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해 
여러분은 바로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것이 
정말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우십니까?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 엘리멜렉과 나오미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된 영광을 스스로 버렸고, 그 결과 개인적이고 가정적이고 민족적인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 됨을 회복한 나오미의 모습은 사사시대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사사시대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의 길로 들어선 룻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룻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오미처럼 실패를 통해서 그 영광을 깨달으라는 것이 아니고, 룻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깨달아라 는 것도 아닙니다. 룻기의 메시지는 룻 시대의 사람들, 즉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두 경우를 통해 자신들의 영광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오미를 보고, 룻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를 깨닫는 것이 반복되는 사사시대의 불행의 고리를 끊는 길이요,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회복하는 길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를 통하여, 그리고 룻을 통하여,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놀라움과 영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설교 시작에 물었던 질문을 다시 묻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여러분의 이름은 영광된 이름입니까? 그 이름을 영광으로 알고 자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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