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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계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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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계 1:12-13)

< 진실한 삶의 최고 인증 표식 >   

몇 주 전에 한 목사님 부부가 저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미국에서 큰 이민 교회를 섬기다가 조기 은퇴하고 중국 오지로 파송기관이나 배경도 없이 선교하러 떠나는 목사님 부부였습니다. 파송기관이나 배경 없이 선교를 떠나는 것은 후원을 받지 않고 조용히 선교하겠다는 뜻입니다. 제가 “어떻게 살려고 하세요?”라고 걱정스럽게 묻자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곳은 생활비가 별로 들지 않아요.”   

또한 그 목사님은 원로목사 자리도 사양했습니다. 원로목사는 대략 담임목사 사례의 절반 정도를 받습니다. 그 목사님이 섬기던 교회는 상당히 큰 이민교회이기에 사례의 절반만 받아도 노후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로목사 자리를 사양한 것은 원로목사 사례비도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영광스런 자리에서 내려와 빈손으로 선교를 떠나면서 오지에서 어르신 몇 분과 어린이 몇 명을 섬기며 노후를 보내겠다고 하니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목사님이 있어서 아직 한국 교회는 소망이 있다!”   

그 목사님이 저희 교회를 방문한 목적은 “내가 이렇게 선교하러 가니까 기도해 달라.”고 알리려고 방문한 것이 아니라 은퇴하며 받은 사례비의 십일조를 선교지로 떠나기 전에 드리고 가려고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그 십일조가 선교지에서 얼마나 요긴하게 쓰이겠습니까? 그래도 그것까지 놓고 가려는 목사님의 모습을 통해서 후배 목사를 격려하려는 목사님의 마음을 읽고 며칠 동안 감동적인 영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요새 얼마나 외형주의가 심합니까? 교회도 외형주의가 심하지만 선교단체도 외형주의가 심합니다. 그래서 힘을 과시하는 초대형 교회의 이미지가 전도를 더 막고 힘을 과시하는 선교가 선교를 더 막는 시대입니다.  

특히 중동지역에서는 소금처럼 녹아지는 조용한 사랑으로 영혼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후원금 모금과 힘의 과시와 눈앞의 열매에 관심이 많은 어떤 선교단체는 드러내놓고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이 진짜 선교를 막기에 현지 선교사들이 “제발 그렇게 과시하며 도전적으로 하지 말라!”고 권고하지만 전혀 말을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현지 모슬렘들을 자극하기에 열매는 없고 오히려 반감만 불러일으키다가 결국 샘물교회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샘물교회 사건으로 일반인들의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커졌습니까? 문제는 일반인들이 모두 교회가 그런 식으로 선교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음지에서 조용히 사랑을 실천하며 그 사회에서 소금처럼 녹아지며 선교하고 있습니다. 열매 없는 과시형 선교는 선교의 이미지도 망치고 결국 선교도 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일전에 한 선교단체가 “이스라엘 평화행전”이란 거창한 구호로 어린이와 학생까지 대규모로 이스라엘로 보냈습니다. 그때도 현지 선교사들이 “제발 그런 과시형 행사를 자제하라!”고 무수히 권고했지만 그 행사를 강행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주고 온 것이 아니라 ‘갈등’을 조장하고 왔습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중에도 크리스천이 있는데 그 평화 대행진이란 행사 때문에 그들의 입지는 더 힘들어지고 위험해졌습니다.   

‘순교’와 ‘순교 콤플렉스’는 다릅니다. 지혜롭지 못한 순교는 때로는 복음을 더 막습니다. 지혜롭게 행하다가 때가 되어 순교하는 것이 진짜 순교입니다. 선교는 성육신과 사실상 동일한 개념인데 성육신의 자세도 없이 어떻게 선교하겠습니까? 요새 얼마나 한국 교회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많습니까? 힘없는 사람이 낙심 없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미덕이지만 힘 있는 사람이 자비심 없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폭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태도가 전도를 막는 제일 원인입니다.   

선교는 ‘조용한 헌신’입니다. 영광의 자리를 내놓고 조기 은퇴한 목사님이 모든 물질적인 혜택을 거부하고 어르신 6명과 어린이 6명을 섬기며 여생을 바치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선교입니다. 그래서 욕심과 외형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선교는 가능합니다. 요새 불신자들이 진짜 불신하는 것은 ‘예수님’보다는 오히려 ‘교회’입니다. 그들은 교회로부터 성육신의 사랑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퇴장으로 그들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아름다운 퇴장’은 진실한 인생을 살았다는 최고의 인증 표식입니다.   

< 아름다운 퇴장을 꿈꾸십시오 >   

인생은 처음도 중요하지만 나중은 더 중요합니다. 순명을 따르지 않으면 강제퇴장을 당하지만 순명을 따라 스스로 퇴장하면 더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어떤 화장실 변기 앞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입장 때보다 퇴장 때 그 진가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퇴장을 두려워합니까? 퇴장을 자기 존재의 절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할 수 없는 것 5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둘째는 ‘스님 머리에 핀 꼽기’라고 합니다. 셋째는 ‘앙드레 김에게 검정색 옷 입히기’라고 합니다. 넷째는 ‘장가 간 아들 내 아들 만들기’라고 합니다. 다섯째는 ‘퇴직한 남편 존경하기’라고 합니다. 퇴직한 남편이 존경이 안 되는 시대니까 누가 퇴장하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아름답게 퇴장하면 그가 머물렀던 자리도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반면에 때가 되었는데도 퇴장하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면 결국은 강제퇴장을 당합니다. 

왜 한국교회에 아름다운 퇴장의 전통이 적습니까? 교회의 자리가 낮아지는 섬김의 자리가 아니라 과시하는 권력의 자리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육신의 삶을 실천하는 최대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를 잘 버리고 깎아내는 선교중심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퇴장은 교회를 살리고 새롭게 하는 제일 요소입니다.  

일전에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이 필리핀에서 철수할 때였습니다. 그때 수십 년 간의 필리핀 선교로 필리핀의 제일 교단이 되자 필리핀 선교사들을 철수시키고 다른 미전도 지역으로 재배치했습니다. 그때 수천 만 불에 달하는 재산권을 필리핀 교회에 넘겨주면서 얼마를 헌금 받았을까요? 상징적인 의미로 딱 1불을 받았습니다. 한국 돈 가치로 따지면 천억 원이 넘는 금액을 그냥 넘겨주고 새로운 영역으로 떠난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퇴장입니까?  

자기를 깎아내야 진짜 선교는 가능합니다. 그처럼 저희 선교연맹은 남에게 퍼주고 선교하느라고 역사에 비해서 미국 내에 큰 교회가 적습니다. 미국 내 2200교회 중에서 제일 큰 교회가 성인 2천 명 정도입니다. 분립과 선교에 힘쓰면 외형은 커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영향력은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결국 분립과 선교는 내적인 영향력을 키우는 가장 멋지고 복된 일입니다. 그런 멋지고 복된 일을 미루면 기다리는 것은 ‘강제퇴장’밖에 없습니다.   

이제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은 스스로 분립에 나서고 퇴장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교회 전체가 사는 길입니다. 초대형 교회가 스스로 멋지게 퇴장하며 수많은 ‘딸 교회’의 거름이 되면 그 교회는 존경 받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영향력도 배가됩니다. 그런 축복을 외면하고 스스로 분립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쳐서 그 교회를 강제로 흩을 것입니다. 스스로 죽으면 계속 살지만 스스로 죽지 않으면 조만간 강제로 죽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 교회가 생길 때 베드로의 설교로 3천 명, 4천 명이 한꺼번에 회개해서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가 1만 명 정도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때 그 교회는 사람들의 칭찬도 받으면서 계속 성장했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분립과 선교에 나서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스데반의 일로 핍박당하게 해서 그 교회를 강제로 흩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각처로 흩어진 제자들에 의해 더욱 멋진 선교가 이뤄졌습니다.  

스스로 분립되든지, 강제로 분립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다릅니까? 스스로 분립되면 존경을 받지만 강제로 분립되면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결국 담임목사가 성도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단계인 대략 3천 명 이상의 초대형 교회들은 빨리 분립의 길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락의 때가 곧 올 것입니다. 그 추락이 개 교회와 담임목사의 추락으로 끝나지 않고 때로는 사회 전체의 고난으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20세기 초, 북한에 엄청난 복음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오랫동안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그들의 신앙심이 남달랐습니다. 그때 큰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 당시 평양 인구의 3분의 2가 신자였고, 심지어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란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부흥을 선교로 연결시키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공산주의를 통해 강제로 북한 교회를 쳐서 흩으셨고 그 북한 성도들이 남쪽에 내려와 남한 교회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힘을 과시하며 분립에 힘쓰지 않으면 북한 교회의 꼴이 날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가벼운 잽(jab)을 맞고 있습니다. 이때 분립과 선교에 나서지 않으면 더욱 큰 환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형 교회 리더가 스스로 분립의 길로 가지 않으면 성도라도 나서서 거룩한 분립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하면 한국교회는 다시 새롭게 일어설 것입니다. 

< 일곱 금 촛대의 환상의 의미 >   

본문에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을 보았을 때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의 실체를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길 때 본 것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때 사도 요한은 ‘일곱 금 촛대’와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본문에서 일곱 금 촛대는 ‘하나의 중심대에서 일곱 개의 작은 촛대로 나눠진 촛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막의 성소 안에 있는 금 촛대가 그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있었는데 그 인자 같은 이는 바로 ‘주님’이고, 일곱 금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계 1:20). 그러므로 본문의 환상은 교회와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일곱 금 촛대의 기초를 이루는 대가 하나이듯이 모든 교회는 주님의 한 뿌리에서 시작된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개 교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같은 교회끼리 너무 경쟁이 심해서 서로 상처를 입히는 모습은 주님의 교회가 아니고, 주님의 교회란 이름을 빌린 인간의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아닌 인간의 교회가 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란 작품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세빌레에 오셔서 전도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때 밤에 세빌레의 유명한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면회하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 왜 또 오셨습니까? 당신은 이미 당신의 일을 교회에 맡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잘 건축하고 교회법과 프로그램을 세워 잘하고 있는데 왜 또 오셨습니까?”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전도계획, 성장 방법론, 각종 세미나와 프로그램은 있지만 정작 주님의 정신은 그 중심에 없습니다. 요새 왜 교회가 많은 비판을 받습니까? 교회가 육신적이고 외형적이고 상업적인 모습에 물든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 비판의 핵심내용은 바로 ‘교회 이기주의’입니다. 그처럼 개 교회 중심주의를 통해 다른 연약한 주님의 교회에 상처를 주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2.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곱 금 촛대가 한 뿌리에서 일곱 촛대로 나누어졌듯이 모든 교회는 한 교회지만 각각의 특징과 다양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의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 교회가 한 교회이기에 교회끼리 자기 교회로 오라는 경쟁이 없고 교회에서 한 교구에 배치해주면 그곳의 가톨릭교회로 가면 됩니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우지 못합니다. 그 독점과 기득권이 잘못 활용되면 그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반면에 개신교 교회는 목사와 성도가 감동을 따라 함께 예배를 위해 모이면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가정 교회, 상가교회, 지하교회 등이 많습니다. 언뜻 보면 가톨릭교회가 신사적이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상 개신교회의 교회개념이 원래 교회의 기본개념에 가깝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모두 주님의 교회지만 각각의 특성과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가 있기에 하나님은 다양한 교회를 두셔서 개인의 특징에 맞는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교회개념을 삶의 전 영역에서 적용시키면서 남의 것을 존중하며 자신은 자신대로 최선을 다하면 멋진 작품 인생이 될 것입니다.
  

3. 주님은 교회를 영원히 지켜주십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있다는 말은 주님이 교회를 붙들고 보호하는 분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중심적인 삶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중심적인 삶을 살 때 그의 생명과 가정을 지켜주시고 인생의 보람과 의미와 가치도 크게 해주실 것입니다.   

시편 20편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성도들을 도와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삶의 실패는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실패에서 비롯되고, 삶의 성공은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성공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교회를 연인처럼 소중히 여기고 바라만 봐도 흐뭇한 감정을 가지십시오. 교회를 사랑의 대상으로 알고 지극 정성으로 교회를 섬기는 삶은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통로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기에 교회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개인이나 가정은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 진짜 사는 길을 찾으십시오 >   

축복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의 축복으로 끝날 가짜 축복이고, 또 하나는 내일의 축복까지 연결될 진짜 축복입니다. 이제 진짜 축복을 추구하십시오. 그것을 위해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특별히 어려워진 한국교회를 위해서 한국교회가 욕심과 외형주의를 버리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더욱 회개하며 기도하십시오. 저는 한국 교회가 죽으면 한민족도 죽고 한국 교회가 살면 한민족도 산다고 믿습니다. 

이번 주에 들린 북한의 대포소리는 “한국교회여! 회개하라!”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북한의 대포 공격 있기 하루 전날에 어떤 분이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집니다.”라고 하면서 돈도 현찰로 찾아놓고 비상식량도 준비해 놓고 만반의 피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좁은 한국 땅에서 피하면 어디까지 피하겠습니까? 준비할 것은 ‘피난’이 아니고 ‘회개’입니다. 회개하면 언제나 사는 길은 있습니다.   

살기 힘들면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을 것처럼 힘들 때도 회개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사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주위를 보면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잘 사는데 왜 죽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얼마든지 잘 사는 길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을 살려보겠다고 투쟁하다가 자신을 불길에 던집니다. 절망적인 현실을 알리려는 충정은 이해되지만 꼭 그래야 합니까? 생명은 천국에 갈 때까지 결코 스스로 내던지지 말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선의 승리를 믿고 열심히 살아서 싸우십시오. 요새 한국 교회의 앞날에 대해서 비관하는 분들도 많지만 교인 숫자가 좀 줄면 어떻습니까? 외형주의를 벗어던진 진짜 교인이 많아지면 됩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키를 따지는 사람이 한국 사람입니다. 그처럼 외형이 없으면 실패한 줄 알고 고독과 쓸쓸함을 느끼지만 사실은 외형을 갖추었다가 추락하는 모습이 더 사람을 쓸쓸하게 만듭니다. 영웅의 자발적인 퇴장은 신선한 감동을 남기지만 영웅의 강제적인 퇴장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쓸쓸해집니까? 그런 모습을 무수히 목격하면서도 여전히 교회가 외형주의에 빠져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영웅의 비참한 퇴장은 외형주의와 힘 중심적인 삶에 대한 경고이자 분립과 선교를 향한 도전입니다. 가끔 존재의 터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그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욱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힘든 현실 중에서도 비틀거리면서라도 다시 하나님의 뜻을 향해 길을 떠나고 후일의 멋진 퇴장을 꿈꾸며 그때까지 멋지게 사십시오.   

한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이런 인터넷 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 아이는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아주 못생겼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을 찾아 넋두리를 했습니다. “나는 살 이유가 없어. 저 물에 뛰어들 거야. 그런데 물이 차가우면 어떡하지? 다시 나올까? 아냐! 내 길은 이것뿐이야!" 그리고 굳은 의지로 한발을 물에 담글 때 누군가 그 아이를 잡아끌며 소리쳤습니다. "나도 사는데 너도 살아!” 그리고 그 소설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그 아이가 뒤돌아보니 전인권이었다. 소설 끝.”  

그 여자 아이에게 “나도 사는데 너도 살라!”고 말한 사람이 전인권 씨라는 것이 얼마나 기발한 착상입니까? 전인권 씨는 마약, 도박, 이은주 스캔들 등으로 유명하고 외적인 모습도 마치 폐인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보기에 그는 살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열심히 사는 것이 신기해보인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전인권 씨도 사람들이 칭찬하는 김장훈이 존경하는 선배라고 합니다. 그 사실은 많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 세상에 삶의 이유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만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성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고 선교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과시적인 선교가 아닌 소리 없이 녹아지는 성육신의 선교는 삶을 가장 의미 있게 만들 것입니다. 이제 세상에서도 멋지게 성공하고 그 성공을 가지고 소리 없이 녹아져 이웃을 섬김으로 성공을 진짜 성공으로 만드는 복된 인물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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