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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요 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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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요 4:19-26)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네를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뜨거운 날씨에 목이 말라 우물가에 가셨습니다. 그곳에 물을 긷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본래 팔레스타인 지역은 날이 뜨겁기 때문에 낮에는 사람들이 다니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아무도 다니지 않는 뜨거운 낮 시간에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왔습니다. 그녀에게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 번이나 바뀔 정도로 팔자가 드센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꿀 정도로 음탕한 삶을 산 여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을 보면 그녀는 홀로 된 여인으로서 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를 거두어 줄 남자를 찾았던 것입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 여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었습니다. 한 낮의 뜨거운 태양 빛을 감수하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처절한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과 대화하는 중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우물에 물을 길러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의 삶의 처절한 아픔과 고달픈 인생의 문제를 내려 놓으며 임시적으로라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러한 삶의 처지에 놓이게 된 근원적인 원인을 말씀하시며 그 문제를 치유하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 문제였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갖지 못했습니다. 

여인 생각에는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저주스러울 정도로 암담한 자기의 처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에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녀에게 가장 큰 문제는 ‘예배의 부재’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없는 삶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여인이 예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화가 있습니다. 20절에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녀는 어느 특별히 신령한 장소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신령한 곳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21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또 23절의 말을 보면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인은 예배하는 장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기에 가면 은혜가 있을까? 저곳에 가면 은혜가 있을까? 어느 곳이 신령한 곳인가? 를 찾습니다. 그 장소에 가기만 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령한 장소가 아니라 신령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거룩한 장소가 있어도 예배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진실하지 못하면 그 거룩한 장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지하이든, 일을 하는 공장과 사무실이든, 냄새가 나는 창고이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마음이 영적으로 열려 있고 진실하면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그 예배를 받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마음과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솔로몬을 통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임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곳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솔로몬이 산당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정성을 다해 드렸습니다. 사모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솔로몬 왕은 영과 진리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산당에 엎드린 솔로몬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예배하는 마음을 기뻐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소원을 들어 주셨고 그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시며 축복하셨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거룩한 예배는 그의 인생을 축복되게 만드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솔로몬은 제사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습니다. 아버지 다윗 왕이 준비해 놓은 가장 좋은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나가 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제사를 드리는 솔로몬의 마음에 신령과 진정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시에 온갖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는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고 모든 제사 의식을 거창하게 진행해 나갔지만 그 제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령한 마음과 진실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주셨던 복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있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부분은 23절 후반 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을 향해 신령과 진정으로, 영과 진실함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찾는다’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과 같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려서 찾아 헤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았다는 단어와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 심정이 부모가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것과 같은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자식을 찾는 심정만큼이나 애타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배 순서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해서 예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며 오만가지 생각을 다합니다. 오만가지 비판을 다합니다. 설교를 왜 저렇게 하느냐? 기도는 저게 뭐냐? 성가대의 옷이 삐뚤어졌다. 안내위원들의 인사하는 자세가 맘에 안 든다. 누가 오늘 안 보인다. 저 사람이 오래간만에 왔다 등 온갖 참견과 판단을 하며 예배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지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러면 대체 어디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까? 이곳입니까, 저곳입니까?’ 하고 물었던 예배 처소는 모두 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마리아 성전은 주전 125년에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에 무너졌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건물이 뭐 그리 대단한 문제겠습니까? 결국 진정한 예배 처소는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예배가 살아야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우리 모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영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신앙이 절대로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고, 예배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 깨닫고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감사함으로 감당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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