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높임을 받으신 예수 (빌 2:5-11)

첨부 1


높임을 받으신 예수 (빌 2:5-11)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었느냐, 하나님이었느냐? 이것은 오래된 질문입니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하나님이었느냐? 아니면 100 하나님이고 100 사람이었느냐? 원래부터 하나님이셨느냐? 아니면 원래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으로 추앙된 것이냐?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고 그렇게 가르치셨느냐? 아니면 이후에 추종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으로 추대된 것이냐? 모두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가 바로 여기에 걸려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경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경배하는 행위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너는 나 이외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어다’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경배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경배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곡 가사만 보더라도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예수 사랑해요 나 주앞에 엎드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예수님을 경배하는 행위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해 왔던 것이고 이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발달한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했습니다. 기독교 예배가 일요일에 모이게 된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느냐?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요일에 모이면서 주일예배가 태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고 그것이 주일예배의 태동이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면서 신앙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가 신학적으로 제기된 것은 이단 아리우스주의를 통해서입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출신이었는데 그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이 인간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신성이 신학적인 논란이 됐습니다. 아리우스는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은 사람이었는데 다만 최고의 사람이었다고 가르칩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이 기독교계를 발칵 뒤집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린 것이 니케아 회의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발표한 것이 소위 니케아 신조입니다. 

이 신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체요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상 동등되다’ 헬라어로 ‘호모 우시온’ 이 말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니케아 회의 이후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가 삼위일체입니다. one God in three persons-한분 하나님이시되 세 분의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니케아 회의가 열리기 훨씬 전에 복음서와 바울서신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축복했습니다. 비록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성삼위 일체에 대한 언급이 이와 같이 등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했다고 말했습니다. 경배했다는 말은 예배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약성경을 거부해야 됩니다. 신약성경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교리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을 믿으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셨느냐? 그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냐?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성경구절은 예수께서 중풍병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사죄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반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참람한 말을 하는도다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 있겠는가’ 이 바리새인들의 말이 옳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능히 죄를 사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사하셨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 자신이 당신에게 신적인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그 외에도 요한복음에 더 많은 말씀이 나옵니다.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당신을 경배하는 것을 예수님은 만류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예수님께서는 받으셨습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간디와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존경했습니다. 예수님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어봐야 됩니다. 간디와 같은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간디를 예수님의 학생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자유주의신학과 세속화된 종교가 실수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저 훌륭한 스승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신 분,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신 분으로만 간주한 것입니다. 

마치 이신론자들이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에 태엽을 감아놓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믿는 것처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도 인간이 성숙하도록 도우신 후에 무대 뒤로 사라지시리라고 생각했어요. 황태자가 어른이 된 다음에는 더 이상 선생이 필요 없듯이 인류가 어른이 된 다음에는 예수님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예수님의 역할을 다하신 것인 것처럼. 그들의 주장이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역할은 끝난 것이 아닐까. 그걸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말씀만 읽으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것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계속 읽어보면 9절 이후에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그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가장 높은 이름을 주셔서 모든 자들이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섬기고 경배할 것을 원하셨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존경하고 배우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예수 구주로 모시고 경배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 예배의 행위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예수님을 존경하라는 뜻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오늘 본문의 문맥 전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그 말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과 동등된 존재였다는 귀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원래는 사람이었는데 십자가 죽음 이후에 사람들에 의하여 추앙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원래부터 하나님과 동등된 본래 하나님이셨는데 다만 그 모든 것을 비우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종이 되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다시 본래 영광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셨다, 이것은 기독론,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신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를 주는 성경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다가 높아지신 것은 마치 알파벳 V 처럼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그를 다시 일으키시고 영광스러운 위치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냥 원상복귀라는 얘기냐. 그게 아니고 그 이전보다 더 놀라운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있는 것처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되었다는 놀라운 결과를 얻으셨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 이전에는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고 타락하고 세상이 함께 타락했는데 예수님이 이와 같은 수난을 당하신 이후에는 하늘에 있는 자, 그것은 천상의 천사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땅에 있는 자는 모든 인류를 말하는 것이고, 땅 아래 있는 자는 과거의 죽은 자들을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일로 말미암아 과거에 잃어버렸던 수많은 자들이 다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예수님의 수난이 얻은 놀라운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따라야 되지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예수님은 믿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 아닙니까. 그건 어느 시대든 존재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만 그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만 이런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이라면 다 그렇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초대교회가 다시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을 느꼈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와 같은 고민을 겪었습니다. 기독교를 합법화했던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십자가를 내세우고 승리를 경험했어요. 그러나 콘스탄틴은 자신의 세례 받는 시기를 늦췄습니다. 죽기 전에 세례를 받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세례 받은 다음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콘스탄틴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자기의 신앙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부담이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자책하는 버릇을 버리고 그러므로 어느 시대든 어떤 사람이든 주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당연히 믿고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서 애써야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께서 경배의 대상이 되고 또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을 탐내신다든가 샘을 내시는 게 아니고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구주 예수를 의지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의 주인이 되어주신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이제 예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셨다면 우리를 책임지실 것이고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고 그리고 우리를 당신 것으로, 당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