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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하고 담대하라! (수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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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담대하라! (수 1:1-9)

오래전 한 정신분석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 이전 경험까지도 그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배우고 내가 경험한 것들만 내 속에 있는 것이지 내가 경험하지도 않고 간접적으로 듣지도 않은 것들이 어떻게 우리 속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최근에 뇌를 연구한 외과의사들 가운데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실낙원 곧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경험, 안전한 낙원으로부터 버림받고 혼자 살아야하는 두려움과 외로움 같은 경험이 이미 모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되어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직 세상 경험을 조금도 하지 아니한 어린 아이들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산 사람들 마음속에도 실낙원의 그 아픔과 두려움과 외로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가장 과학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외과 의사들까지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다 두려움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한 걸음 더 나간다면 누구로부터 버림받은 마음이 그 속에 내재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두려움을 당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외로움을 당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버림받은 적이 없었던 사람들 속에도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인지 모르지만 경험했던 인류의 경험들이 DNA로 각인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과 같은 동물에게도 심지어는 지금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식물에게도 있다고 말합니다. 식물에게 그런 두려움과 외로움이 있다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겠지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전에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아픔과 상처까지도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는데 이제는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가지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여러분들이 들판에서 꽃 하나 꺾는 것, 나무 가지 하나 꺾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꽃이라든지 나무의 한 목적, 본래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에 동의하는 것이라면 상관없겠습니다. 본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주기 위해서 또 필요에 공여하기 위해서 꺾이는 것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분명한 까닭이 없이, 합리적인 까닭이 없이 그런 일을 할 때 혹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두려운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도 겁을 내고 식물도 겁을 내므로 그것들이 그 두려움으로부터 모면하기 위해서, 방어하기 위해서 독을 뿜어낸다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환경을 보호한다든지 식물을 보호한다는 것이 얼마나 옳은 것인가 얼마나 바른 것인가 또 하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얼마나 일리가 있는 것이고 얼마나 우리를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모든 존재들이 다 가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호랑이가 ‘어흥’ 할 때 우리는 호랑이가 상대방을 겁주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동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에 따르면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지의 환경,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호랑이는 ‘어흥’ 하고 소리 지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문제는 이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이 두려움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이 두려움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도자, 모세 다음을 이은 여호수아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은 우리가 어느 날 가질 수 있는 모든 두려움을 망라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대표적인 두려움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하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모세가 자기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인지라 언제나 한번은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막상 떠나고 나니 너무 아프고 외롭고 서러웠습니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어른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큰 어른 아론은 모세 이전에 떠났고 모세는 이번에 죽었습니다. 자기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고독,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린 것 같은 고독과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저도 최근에 이런 두려움 때문에 꿈에서 많이 운적이 있었습니다. 제 집안에는 형님들도 많이 계셨고, 다른 형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다 떠나셨고 마지막 한 분 제 친 형님이 계십니다. 일흔이 넘으신 연로하신 그 형님마저 떠나 아무도 없고 저 혼자 남아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동생들, 조카들, 손자, 손녀들만 있으니 얼마나 외롭고 서러운지 꿈에서 한참 울다가 깼습니다. 두어 번 연이어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실의 아픔과 두려움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이것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중압감입니다. 모세가 죽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자기 혼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가야 했습니다. 너무 벅차고 힘든 일입니다. 그에게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당장 요단강을 건너가야 했습니다. 평소에는 물이 없지만 지금은 물이 많은 계절이므로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요단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를 걱정해야했습니다. 또 요단강은 건너가게 되면 완전히 다른 환경에 다다릅니다.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를 상황이었고, 어떻게 끌고 가야할지 마음도 참 무거웠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스라엘 민족들이 들어가서 살 가나안 땅은 비어있는 땅이 아니라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강경한 적들입니다 그 적들을 다 물리치고 쫓아내고 그 땅에 가서 살아야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최고 지도자로 이 일을 혼자 힘으로 감당해야했습니다. 너무나 무겁습니다. 

아내 되시는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남편들의 이 중압감에 대한 이해입니다. 물론 아내들도 남편으로부터 이해받고 싶은 것이 많겠지만 가장이라는 존재에게는 이런 중압감이 있습니다. 지금 상당한 수입이 있는 사람들도 또 이미 은퇴하여 수입이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중에는 맞벌이하는 아내가 더 많은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장의 무게는 어떤 경우든 상당히 무겁습니다. 

나라의 대통령도 마찬가지이고 지도자들은 참 힘이 듭니다. 이제는 우리만 위해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이 민족을 위해서 또 이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합니다. 또한 내가 내 아내, 내 남편을 위해서 그리고 내 부모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거꾸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수아에게도 이런 중압감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무거웠습니다. 더구나 자기가 지금 이끌고 가야할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노예근성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430년 동안이나 노예살이를 했습니다. 제가 가끔씩 부르는 일본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아버님이 하시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36년밖에 일제의 압제를 받지 않았는데도 제가 이 노래를 아직도 부르는데 이스라엘의 노예살이는 430년입니다. 얼마나 깁니까? 그들은 노예근성이 가득했습니다.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는 태반이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었고 이들은 노예근성 때문에 늘 부정적이었습니다. 불평이 많고 불만이 많았습니다. 

노예근성이 있는 사람들은 일만 생기면 늘 다른 사람 탓을 합니다. 이 사람 탓을 하고 저 사람 탓을 하고, 그러다 원망을 하게 됩니다. 물론 충분한 까닭이 있어서 이 사람을 원망하고 저 사람 탓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조하는 사람들은 외부적인 실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노예근성 때문입니다. 노예라는 것입니다. 노예란 늘 뒤에서 말이 많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런 사람들을 이끌고 가야했습니다. 

하나 더는 자기 한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큰일을 해야 하겠는데 아무리 보아도 자기가 하기에는 너무너무 힘든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던 모세는 자기가 보기에 참 대단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저런 어른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를 생각했고, 모세에 비하면 자기는 너무도 부족하고 너무도 미약하고 어림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가득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두려움은 그래도 모세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에도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아무리 보아도 모세와 함께 하셨던 특별하게 함께 하는 것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더 두려웠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특별함이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여호수아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너와도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도무지 그런 큰 어려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여호수아가 어떻게 그 일을 했을까요? 여호수아는 얼마나 성공적으로 그 일을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형통한 인생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아주 작은 실수 한 것 이외에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 앞에는 뚫리지 않은 길이 없었고 열리지 않는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 비결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두려움이 있고 중압감이 있고 무거운 짐이 있는데, 여호수아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주저 없이 꼽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첫출발 때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이 말씀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약속을 전적으로 믿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멘’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아멘’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 모든 우려,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모세가 먼저 그랬습니다. 모세가 사역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에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떨기나무 불꽃을 보여주셨습니다. 요즘 같은 겨울에 들판에 나가면 불을 피우기 참 좋습니다. 나무가 말라있기 때문입니다. 떨기나무란 굵은 가지는 없고 잔가지밖에 없기 때문에 불이 붙으면 금방 탑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 있으면서 얼마나 불을 많이 피웠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경험과는 영 달랐습니다. 금방 탔다가 없어지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꺼지지 않으니 그것은 자기가 알던 바와 영 달랐습니다. 그는 도대체 그 까닭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면서 그것을 보여주신 까닭은 앞으로 네가 볼 것은 떨기나무 잔가지 거기다 불을 붙여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따로 공급하는 것으로 불을 피운다는 것을 알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40년 전, 지금보다 훨씬 힘이 있고 많은 권세가 있을 때 모세는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나무로 불을 피우려고 했고 자기 능력과 경험으로 일을 하려다 하다 보니 큰 실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너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주셨고 모세는 그것을 제대로 배웠습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40년 동안 모세는 이 말씀을, 가르침을 붙들고 당당하게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입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바로 이것이 떨기나무 불꽃입니다. 너희들이 나서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오랫동안 모세를 따라다녔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와 모세의 관계에 대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모세의 수종자’ 라고 말씀하시는데 늘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데리고 다니면서 늘 그 말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얘야, 내가 지금까지 그럭저럭 그 힘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가르침을 내가 따랐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여호수아는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떠나고 난 후 하나님께서 맨 처음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인 내가 모세와 함께 했던 것 같이 너와도 함께 하겠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 여호수아는 옛날에 모세가 자기에게 주셨던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신이 난 것처럼 나도 이 말씀을 붙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다음에 있었던 일이 요단강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이것이 드러났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 넘쳐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건너라고 말씀하셨지만 옛날과는 달랐습니다. 옛날에 홍해를 건널 때는 바다를 갈라주셔서 편편한 대로로 지나가게 해주셨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물이 가득 넘쳐흐르는데 그곳으로 지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옛날에 모세와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나와도 함께 할 것이니 지나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강에 발을 디디자말자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능력이 여호수아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감사한 것은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생각해봅니다. 성경 내 역사, 성경 외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모세와 여호수아 같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많이 가졌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상당히 힘들어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런 권세와 능력과는 관계없는 사람,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사람, 때로는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일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받아들였는가, 받아들이지 못했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하나 더, 어떤 사람은 그 말씀, 그 약속을 ‘아멘’하고 받아들이는데 어떤 사람은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실패할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야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혹 실패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르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25:24-25) 라고 말했습니다. 왜 두려웠습니까? 믿음이 없어서였습니다. 주인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혹시 주인이 내가 돈을 벌지 못하면 야단 칠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준 사람도 있고 두 달란트 준 사람이 있었지만 자기는 한 달란트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주인도 인정하지 않는 내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이 왜 생겼습니까? 믿음이 없어서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왜 생깁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 말씀이 특별한 몇 사람에게만 관계가 있고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능력이 안 생기고 권세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을 때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님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고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십시오.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한 마디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능력이 생깁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을 때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의 교육을 받아들인 것처럼 받아 들였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자기 한계를 완전히 뛰어 넘었습니다. 도저히 넘지 못할 모세의 울타리를 뛰어 넘었습니다. 정말로 힘들 것 같은 가나안 정복이라는 그 큰일을 여호수아가 해냈습니다. 여호수아는 평생을 평탄한 삶, 아주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형통이라는 단어에 관계되는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오늘 본문의 여호수아이고 또 한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열일곱 살부터 13년 동안 죽어라고 고생했습니다. 그 다음은 잘 풀리고 참으로 형통했지만 전인생으로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맞겠지만 인생 자체로 보면 형통과 좀 떨어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모세 밑에 있으면서 참 편안한 삶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죽고 난 후에도 길이 얼마나 잘 풀렸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모세보다 더 큰 일을 했고 모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수종자 노릇이나 하던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단 하나, 모세에게 제대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적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은총이, 복이 여호수아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 말씀을 받으십시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유명한 이사야 43장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리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희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사43:1-5)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대신 묻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신다면 여호수아의 형통이 충분히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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