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을 신뢰하기 (요 15:1-5)

첨부 1


하나님을 신뢰하기 (요 15:1-5)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성품은 관계에서 출발한다.
좋은 성품을 만들기 위해 첫 번째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관계”입니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로 들어 선 자만이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고,
우리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하나님을 알 때,
타인(他人)은 믿어주고 신뢰하는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가 중요하겠죠. 좋은 성품은 “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계속적인 관계의 “채움”을 통해 만들어 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경은 우리들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포도나무가 되시고, 우리가 그 가지에 붙어 있는 가지이지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므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지요.

즉, 우리들 삶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여기서 구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익숙함”인지 “친밀함”인지의 차이입니다. 
익숙함은 우리로 편안하게 만들어 줄지는 모르지만, 피상적인 관계로 인해 건조하게 말라비틀어 집니다. 결국 편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짐” “죄책감”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요.

여러분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무관심해 보이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깨어진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누구의 문제일까요? 요한 계시록 3장 20절을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삭개오의 삶의 변화가 일어난 순간에 어떤 일이 있었나요? 예수님께서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 결국 예수님과의 관계의 형성의 삭개오의 성품을 바꾸어 놓았지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던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 길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삭개오가 예수님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삭개오 자신이 스스로의 문을 열지는 못했지만, 삭개오의 눈이 예수님께 갈급하게 무언가를 요청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문을 여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편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신앙인의 고백이 있습니다. 시편 46편을 보세요. 시인은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시편 말씀을 보면서 얼마 전에 잠깐 키웠던 진돗개 ‘’온유‘가 생각나네요. 결국은 키우지 못하고 다른 곳에 보냈지만, 일주일 만에 집이 개판이 되었습니다. 개 냄새가 뒤덮고.
그런데 참 예뻤습니다. 어린 개가 새벽이 되면 낑낑댑니다. 그러면 나와서 얼굴을 보여줘야 하지요. 신기하게도 그 개는 함께 나와 있으면 조용히 잠을 잡니다. 편안하게 잡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얼마나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여유를 찾을 수 있는지 아시나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성품이 어떻게 변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의 가장 큰 변화는 성품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인정하고 부르셨다는 사실, 끝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어떤 삶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셨습니까?

그럼 자신과의 관계는?
우리는 흔히 관계를 양자(兩者)간의 문제로 정의 합니다. 그런데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로 자신 스스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성품을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자신을 얼마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내 마음을 나도 몰라!”라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의지를 믿을 수 있던가요? 
우리는 수없이 “할 수 있다!”라고 반복해 보지만 실패를 경험할 때 마다 지신에게 실망합니다. 이런 실패를 경험하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불만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 원수를 만나 함께 수용하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나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원수가 된다면 얼마나 수용하기가 어려워지겠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나의 대한 생각,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 늘 다른 사람에게 투사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믿고 신뢰하지만,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 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들의 과거의 경험이 얼마나 여러분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학창시절에 놀았던 부모들이 자녀들을 더욱 믿지 못합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내가 저 사람을 보며 분노하고, 왜 저 사람이 용서가 되지 않고, 왜 저 사람을 믿지 못하는지, “내 마음을 나도 몰라!" 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여러분들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문제는 어떻게 나 자신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나요? 2절에 보니까,
무룻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아하!
내가 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잘못된 것들을 제거하고 계시는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과실을 맺기 위해 일하시는구나!
그래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있지요. 
우리의 삶의 고통의 흔적들이 상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신앙의 흔적, 즉 “훈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혹시 이런 찬양을 들어보셨나요?
힘들고 치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못자국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고 내 마음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조용히 다가와 내손 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 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아픔으로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내가 나 지신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모습과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고린도 전서 15장 1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2007년 3월호 낮은 울타리의 주제가 재미있습니다. [동문서답 하십시오.]
한 달의 모든 이야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동문서답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 지금까지 닦아온 자신의 전문성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며, 마치 동문서답을 하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들,

언젠가 우리 교회에서 간증을 했던 평양과기대의 정진호 교수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을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
정진호 교수는 서울 공대를 나와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포항 공대 교수로 있던 사람입니다. 그의 부인은 오르간을 전공하고 연주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풀려가기 시작합니다. 연변과기대 교수로 올갠을 연주할 수 없는 곳으로 그의 삶이 인도하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중국에서의 삶이 안정을 찾았을 때, 다시 평양과기대 부총장이라는 직책으로 떠나게 된 것이지요.
왜 그가 준비한 대로 삶이 가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깨달아 지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삶을 계획한다는 것 믿을 수 없는 일이구나. 인생은 내가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여기까지는 비 신앙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나를 보게 될 때, [동문서답]하는 나의 인생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아직 아무것도 아닌 때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내가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보면 가능성이 없습니다. 내 자신이 나의 삶의 원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나에게 있어 나 자신은 다른 대답을 얻습니다. 내가 계획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 앞에서 우리는 다른 나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나를 신뢰하게 되고, 나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 앞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참으로 의미 있는 사람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 . .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생기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본문 말씀 5절을 보세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와야 우리는 비로소 “성품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용평가’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무디스,’ ‘스탠더드 앤 푸어스’ 같은 곳에서 각 나라의 신용등급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 평가에 의해 국가 간의 상거래와 은행거래를 하는 데 있어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합니다.

우리나라가 IMF 위기를 지나면서 이 신용등급에 대하여 무척 민감했지요. 이 등급이 개선 되어야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신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신뢰는 그 사람을 대하는 상대방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인생들, 그들의 삶에 기대를 걸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옛 생활로 돌아가 있는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신앙인 다윗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하는 순간에도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기를 끝까지 기다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을 향해 출발 했을 때에요, 그리고 계속되는 그의 실수, 때로는 불신앙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어주시고 신앙인을 만들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의 말씀,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을 보세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것이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생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신뢰 관계가 형성된 사람의 가장 품성의 특징은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형제자매들에 대한 기대가 충만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신뢰하시는 것만큼 우리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아 주시는 것만큼 우리도 참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다른 눈으로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나바는 사도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던 시절, 아무도 그를 신뢰해 주지 않을 때 그를 바울로 보았던 사람이며, 그가 그의 인생을 보장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위대한 사람 바울은 성품의 사람 바나바에의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 사도바울에게 영적아들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사실 육신적인 나이로도 얼마나 어린 사람입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누구에게 디모데를 보내든지 신뢰하도록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 전서 16장 10절에서도,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사도바울이 사람들에게 부탁합니다.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로 생각해 주십니다. 
사실 우리들이 잘 아는 사람, 특히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아는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뢰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좋은 사역자들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심하게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 아이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나고 있다는 신뢰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만나 교회의 목사가 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 ‘신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 만나교회의 장로님들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담임이 됐을 때, 만나교회에는 40여분의 장로님들이 계셨습니다. 다 우리 아버님과 같은 목회 세대요, 그 중에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의 모습을 아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저를 담임목사로 신뢰하고 믿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만나교회의 담임목사인 저를 자랑해 주셨습니다. 오늘 제가 목회를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성품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성품은 하나님의 옳고 그른 기준에 따르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타인에 대한 나의 평가와 나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 앞에 내 기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기대는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실망을 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나에게 임했던 은혜가 필요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잘못할 때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실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복수심에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복수심은 나의 잘못된 성품을 드러내게 하고, 내 영적 자원을 고갈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내 필요를 채워주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저버린 것 때문에 그렇게 실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나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좋은 성품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저에게 있는 상처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를 믿어준 교인들과 장로님들 때문에 제가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죠.
가만히 보니까,
저희 아버님을 보면서 참 힘들어 했던 목회 현장이 저에게 다 상처가 되었던 것이죠.
요즘 그렇게 기도합니다. 제 마음에 드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보게 하시고,
지금 저에게 보내주신 사람들을 동역자로 보게 하여주십시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하여 주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위에 성품의 사람들이 넘치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신뢰를 받고 있는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끝까지 믿어주고 신뢰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세상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뿐입니다. 
저에게 꿈이 있다면, 제가 먼저 사람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않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그런 동일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병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